1.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5년 후인 1627년에 후금의 군사가 물밀듯 밀려와 한양을 함락시키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임금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끝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조 정부는 맹약을 어기고 계속 명(명나라)을 지원하면서 후금을 배반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을 보내 강경하게 조선을 힐책하자 후금의 사신을 죽여 우리의 뜻을 보이자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에 따라 1636년 조선을 점령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만약 자신이 왕위에 있었더라면 이 전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성호 이 익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낸 것은 명나라의 방어를 위해서였으므로 지나친 은혜의식[再造之恩]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바로 사대 모화주의자(事大慕華主義者)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그들은 아무런 힘도 기르지 않고 있음은 물론 후금의 정세도 파악치 못하고 늙은 명나라만 붙들고 있다가 끝내 오랑캐라고 깔보고 내려다보던 후금을 임금의 나라로 받들어야 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대 모화주의자들에 의해 임금 자리를 빼앗긴 광해군은 이 땅의 임금 중에서도 자주와 자립을 추구한 드물게 보이는 군주였다. 그의 이런 정책 때문에 사대 모화주의자들에게 쫓겨나 외로운 섬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광해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은 최명길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최명길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개인의 노력으로 세밀히 파악하여 주화파(主和派)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백성의 희생을 줄이고 나라를 유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이이화, 257)
2. 주화파와 척화파
일반적으로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을 주화파라고 부르고 이에 맞선 세력을 척화파(斥和派)라고 부른다. 정묘호란ㆍ병자호란 당시의 척화파 거두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이던 인조 앞에서 최명길의 주화론과 김상헌의 척화론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주화파와 척화파는 패전에 따른 강화(講和)를 논의할 때 등장하기 마련이다. 패색이 짙은 아군의 내부에서 '적군과의 강화교섭을 시작할 것인가 적군과 끝까지 싸워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을 놓고 격론을 벌인다. 전자가 주화파라면 후자는 척화파이다. 전자가 비교적 온건한데 비하여 후자는 강경하다.
3.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으며 전쟁을 유발한 척화론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관련하여 보면, 주화파와 척화파는 단순한 온건ㆍ강경 논쟁에 머무르지 않는다. 광해군 집권 당시부터 부각된 사대 모화주의자들의 척화론이 인조반정의 논리로 연결되면서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이 끊기기 때문이다.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이 전쟁(정묘호란ㆍ병자호란)을 유발한 원인을 제공한 점에서, 인조반정 주도세력인 서인 의 역사적 책임이 크다.
광해군은 심원한 계책과 명민한 판단력을 가지고 명과 후금에 대한 외교관계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대등하게 유지하는 데 힘썼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비변사 신하들은 명을 추종하고 의존하려는 사대사상에 젖어 있었고 후금을 오랑캐로 깔보는 척화(斥和)로 일관함으로써 대(對) 후금관계를 악화시켜 마침내 화를 자초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의 신정부는 서인 일파에 의하여 독점되었으며 반정의 명분으로서 전왕[광해군]의 명에 대한 배은망덕과 노이(奴夷; 후금)와의 통호를 들었다. 이때부터 숭명사대(崇明事大)와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어 호란을 일으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맥을 끊으며 호란을 일으킨 요인을 제공한 척화론의 배후에, '재조지은'을 주창하는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이 있다.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단절시킨 근원인 셈이다. 이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을 지론으로 삼은 서인-노론 세력과 이 세력의 거두인 송시열이,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후대로 전승되는 역사의 맥락을 단절시킨 것이다. 중립외교의 역사를 차단한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 서인-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4. 그들만의 전쟁(손영식, 72~73)
김상헌ㆍ송시열 등은 후금에 대해서 강경파ㆍ주전파였다.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파였는데, 정작 그들 스스로는 무기를 잡고 싸우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가는 파탄이 난다. 청나라에 이길 자신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도발하지 말아야 한다.
[재조지은의 모화사상이 유발한] 병자호란은 '그들만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서인 정권이 먼저 선전포고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어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이 패망하는 것으로 끝나버린 허망한 전쟁이었다. 도대체 저항다운 저항도, 전쟁다운 전쟁도 없이 망했다.
왜 그렇게 저항이 약했던가. 관군도 싸움다운 싸움 못 했고, [임진왜란 때와 같은] 의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① 짧은 전쟁 기간-이 또한 준비 없이 전쟁판을 벌린 [인조] 서인 정권의 책임이다. ② '너희들의 정권'이라는 의식. 인조 정권은 쿠데타로 탈취한 정권이었다. 동인-북인의 입장에서 서인들이 일으킨 전쟁에 마음이 내킬 리가 없었다. 의병은 주로 삼남에서 일어났다. 영남은 동인의 아성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가 전쟁터여서 의병이 고향 지키기 차원에서 일어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터였던 경기도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조 정권이 쿠데타 정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인의 핵심 축을 이루는 충청도 서인들은 왜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들은 정치꾼이기에 막대한 이익이 따르는 쿠데타에는 가담하나, 대가 없는 희생인 의병에 마음이 내킬 리가 없었을 것이다. ③ 지도부의 비겁함과 무능함-김상헌 등의 주전파들, 말은 많으나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병자호란 뒤에 서인 정권은 마땅히 물러났어야 하나 다시 집권했다.
[병자호란 때] 모두가 완전히 심리적으로 얼어붙어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왜 그러했던가? 유일 강국 명나라 군대를 완파한 청나라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헌 등 주전파는 목청을 높여서 싸워 죽자고 했다. 실제로 싸워야하는 군인들은 내켜하지 않은 전쟁, 그러나 전투를 하지 않는 문신들은 싸워 죽자고 하던 상황-희극적이지 않은가?
5. 무능한 서인 정권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차단한 서인 정권이 병자호란 때만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정묘호란 당시에 보인 서인 정권의 무능함을 지적하기에도 부끄럽다.
전쟁[정묘호란]에 대비한 태세가 전연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취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후금과 강화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왕과 대신들이 강화를 위한 회의를 거듭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난국을 타개할 식견을 가진 자가 없었고 오직 기울어져가는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거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었다. '명나라와는 사대하며 후금과는 교린한다는 원칙'을 정했으나, 후금이 이 원칙을 수용할리 만무했다. 후금의 요구사항인 '척절남조(尺絶南朝; 명과의 관계를 끊어라!)'를 에워싸고 의견이 백출했다. '영절천조(永絶天朝; 명과의 관계단절)' 등에 관해 설왕설래했다. 이 때 전선의 상황은 한강과 임진강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이 떨어져 10일이 지나면 궤멸될 상태였고 오직 고군분투하는 정충신의 군사에게 공급할 식량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대신들은 강상(綱常)과 사대의 명분론에만 급급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김종원ㆍ이양자, 54ㆍ55ㆍ60)
<인용 자료>
* 김종원ㆍ이양자『조선후기 대외관계 연구』(파주, 한울, 2009)
* 손영식『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울산,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 이이화「광해군의 자주실리 외교」『마당』(198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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