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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의 말로, '쌍화점의 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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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의 말로, '쌍화점의 시대'의 종말

[기자의 눈] '성(性)적 에너지' 충만한 홍대앞을 가보니…

서울 홍대 앞 거리에 가끔 간다. 갈 때마다 놀란다. 젊은 예술인들이 활동하던 그곳은, 이제 그저 그런 유흥가가 돼 버렸다. 흥청대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개성은 점점 희미해진다. 예술적 열정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성(性)적 에너지다. 이대로 가면,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이 즐비한 강남 유흥가처럼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떠올린 게 고려가요 '쌍화점'이다. 몽골의 부마(사위)국가였던 당시 고려의 자유분방한 성(性)풍속을 보여주는 노래다. 노래 속 무대인 쌍화점은 외국인이 경영하던 상화병(술을 넣어 발효시킨 만두 떡, 일종의 호떡) 가게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요즘 식으로라면 '분식집', 아니면 '호떡집'쯤 되겠다.

다른 주장도 있다. 박덕유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쌍화점이 만두 파는 분식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랍에서 수입한 사치스런 유리나 보석 세공품을 파는 가게라는 게다. 요즘으로 치면 '수입 명품점'쯤 되겠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를 가리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성적 일탈의 무대로는, 분식집이나 호떡집보다는 수입 명품점이 더 그럴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샤테크'와 '스폰' 문화, 그리고 '쌍화점'의 시대

강남이나 신촌, 또는 홍대 앞 유흥가에서 '쌍화점'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였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수입 명품에 열광하는 세태는 여전하다. 인터넷에선 이른바 '샤테크'라는 말이 유행한다. 한국의 유난스런 명품 소비 행태를 잘 아는 외국 업체들이 해마다 제품 가격을 올리다 보니, 아예 명품 브랜드인 샤넬 제품을 미리 사뒀다가 나중에 팔면 돈이 된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아사희'라는 필명을 쓰는 요가 강사는 지난 9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스폰' 문화에 대해 적나라한 고백을 했다. 강남의 옷가게나 찻집에 있으면 돈 많은 남성들이 다가와 돈과 성(性)을 맞바꾸는 거래를 제안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극소수의 이야기겠지만, '수입 명품 가방'의 유혹에 못 이겨 이런 거래에 응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박덕유 교수의 해석이 맞다면) 수입 명품점에서 벌어지는 성적 일탈을 다룬 노래인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첫 번째 왕이다. '쌍화점'의 시대는, 요즘으로 치면 '세계화'의 시대였다. 지금의 세계가 '달러'를 중심으로 움직이듯, 당시 세계는 '교초'라는 지폐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몽골제국의 지폐 '교초'가 동쪽의 고려부터 서쪽의 시리아까지 두루 쓰이면서, 이들 지역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였다. 고려 귀족 부인들의 눈을 홀리는 명품을 팔고 다니는 아랍 출신 '회회아비'는 익숙한 풍경이었을 게다.

▲ 홍대 앞의 대표적 번화가인 주차장 길. 서울시의 도심 재개발에 저항하던 문화인들의 상징적 건물이었던 서교365번지가 아직 남아있는 가운데, 이미 대형 빌딩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교초 가치 폭락과 고려의 멸망…미국 재정 위기의 결과는?

몽골제국은 아랍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환차익을 얻었다. 지폐의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 보유한 귀금속은 아랍으로 흘러들어갔다. 아랍 지역은 은의 가치를 중국보다 더 높이 평가해줬기 때문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몽골지폐 교초를 잔뜩 보유했다. 몽골제국의 2차 일본원정 당시 몽골제국이 일본으로 파병될 고려 병사들에게 지급한 급료가 교초 3000정이다. 은(銀)으로 환산하면 7만5000냥이다. 그리고 전함 건조 비용으로 이와 비슷한 금액을 지불했다. 고려가 동원한 말에 대한 비용으로는 교초 800정(은 2만 냥)을 지불했다. 오랜 대몽항전으로 망가진 고려 경제에 외화가 쏟아졌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전하고 받은 달러와 비슷한 효과다. 고려 조정은 막대한 외화 보유고를 쌓았고, 귀족들은 아랍산 명품을 들고 유혹하는 회회아비들에게 교초를 뿌렸다.

그러나 화려한 '쌍화점'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 고려왕들의 이름은 모두 '충(忠)'자로 시작한다. 이름에서 '충(忠)'자를 떼어낸 첫 번째 임금이 공민왕인데, 이 무렵부터 몽골식 '세계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 은과 태환되는 지폐였던 교초는 사실상 불환지폐가 됐다. 미국의 달러와 비슷한 궤적이다. 1971년까지는 누구든 35달러를 내면 금 1온스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달러는 가치가 고정돼 있지 않다.

공민왕 시기, 몽골제국의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빚으로 지탱하는 정부는 반란자들에게 만만해 보인다. 봉급이 불안한 군인과 관료가 정부에 충성할 리 없으니 말이다. 숨어있던 갈등이 폭발했고, 몽골제국의 영역은 그들의 고향으로 쪼그라들었다. 고려 역시 후유증을 겪었다. 몽골과 유착한 권문세족이 보유한 교초가 휴지조각이 되면서, 그들은 힘을 잃었다. 왕실 재정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남쪽의 왜구를 막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고려 왕실은 북방의 이성계 세력에 의존했다. 결국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됐다.

이런 역사를 떠올리면, 세계제국의 재정위기가 불안해지는 게 당연하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위기를 맞았다. 미국과 동맹 관계인 한국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미국 재정 위기가 주는 교훈 : '부자 감세'의 위험

그러나 이번 사태를 다루는 보수 언론의 태도는 사실 선동에 가깝다. 이들 언론은 이른바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하지만 국채 신용이 강등되고 재정위기를 맞은 미국은 복지국가와 거리가 멀다. 애초 복지국가가 아니었던 나라가 겪는 재정위기를 복지 지출과 엮어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국이 겪는 재정위기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다. 지난 6월 29일자 <로이터> 통신은 미 브라운대학의 왓슨국제관계연구소가 발표한 '전쟁 비용(Costs of War)' 보고서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10년간의 전쟁에서 쓴 비용은 최대 4조4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올 2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2012년 회계연도 미국 정부 총 예산안 3조7290억 달러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다. 두 번째는 부시 대통령의 감세 정책이다. 이로 인한 세입 감소가 대략 1조2000억 달러다. 세 번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발생한 지출이다. 구제금융 법안과 경기 부양에 미국 정부가 쏟아 부은 달러는 조 단위로 계산한다.

이런 점을 살핀다면, 이번 사태의 교훈으로 이명박 정부가 부시 대통령을 흉내 낸 '부자 감세' 정책이 지닌 위험을 짚는 게 옳다. 또 부실 금융기관에 국민 세금을 쏟아 붓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짚어야 한다. 예컨대 무모한 개발 사업에 돈을 빌려주느라 부실해진 저축은행을 함부로 지원하는 건 위험하다. 또 저축은행 피해자들에게 현행 법률이 정한 것 이상으로 보상하려는 시도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보수언론,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엉뚱하게 복지 확대를 비난한다.

"소비자들은 왜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을까"

그런데 미국이 빚더미에 오른 이유를 찬찬히 살피면, 오히려 결론은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복지 축소가 오히려 문제를 키웠다는 말이다.

차근차근 따져보자. 재정 적자의 원인 가운데 전쟁과 부자 감세를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민간 부문의 부채가 정부 부문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선 보수 언론도 같은 입장이다. 10일자 <조선일보> 역시 "재정적자의 복수…올 것이 왔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의 말을 인용해 "빚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민간의 빚이 금융회사를 거쳐 정부로 옮겨갔을 뿐"이라고 분석했다.

민간 부문의 과도한 부채가 2008년 금융위기를 낳은 배경이다. 그리고 이 부채를 정부가 떠안으면서 2011년 미국 재정위기가 생겼다. 그렇다면 민간 부문은 왜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을까.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선 매리너 에클스 전(前)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이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대공황이 발생한) 1929~1930년의 미국에서는 그런 종류의 분배가 달성되기는커녕, 거대한 흡입 펌프가 작동해 당시 생산되던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소수의 손에 안겨주었으며, 이들의 자본 축적을 도왔다.…(중략)…결과적으로, 마치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 즉 여타의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신용이 바닥나자 게임은 중단되었다."

1929년 대공황에 대한 설명인데, 로버트 라이시 미국 UC버클리 대학 교수는 이런 설명이 2008년 금융위기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1970년대 말 미국인 총소득에서 최상위 부유층 1퍼센트가 가져가는 비율은 9퍼센트에 못 미쳤다. 그러나 이후 소득은 점점 더 소수에게 집중되었으며,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불거진 금융위기 한 해 전인) 2007년경 상위 1퍼센트가 가져가는 비율은 23.5퍼센트에 달했다. 소득이 이 정도로 소수에게 집중되었던 마지막 시기가 (대공황 한 해 전인) 1928년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경제 위기, 진짜 원인은 '양극화'다"

▲ 고려가요 '쌍화점'과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고려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쌍화점'이 그것. 고려 말의 화려한 귀족 문화의 뒷면에는 극단적인 경제적 양극화가 있었다. 소수의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했고, 다수 대중은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고려는 결국 망했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과전법 등 사실상 토지를 국유화 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양극화를 완화시킨 토지 국유화 정책은 세종대왕 치세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됐다. 사진은 영화 '쌍화점'의 한 장면.
진짜 문제는 '양극화'라는 설명이다. 전체 경제 규모는 계속 성장했지만, 부(富)는 소수에게 집중됐다.

보통 사람들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었는데, 이들은 종종 착각한다. 전체 경제 규모가 성장한 만큼, 자신들의 소비 능력도 늘었다고 말이다. 실제 소득과 눈높이 사이의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무리해서 집과 자동차를 산다. '회회아비'들에게 아랍의 사치품을 사들인 고려 귀족처럼, 불필요한 소비를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명품'에 대한 열광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태로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다. 그 뒤엔 빚을 지게 된다. 그리고 더는 빚을 낼 수 없는 때가 온다. 거품이 터지고, 경제는 주저앉는다. 신용이 낮은 이들에게 무리하게 대출을 해주면서 생겨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이런 경우였다.

위기가 터지면, 흔히 과소비를 탓한다. 1929년 대공황 당시에도 그랬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그랬다. 대공황 당시 보수 지식인들은 "검약과 근검이라는 청교도적인 자본주의 윤리를 어긴 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이야기 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라는 평가가 나온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종종 복지 확대를 비난하는데 쓰인다. '과소비=과잉복지'라는 논리다. 과소비가 위기를 낳듯, 과잉복지도 위기를 낳으리라는 것.

그러나 라이시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위기의 진짜 원인은 과소비가 아니라 양극화였다. 마찬가지로 '과잉복지'가 위기를 낳은 사례 역시 없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남유럽 경제 위기의 원인은 복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지 강국으로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과 독일은 세계적인 경제 불안 속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이시 교수 역시 "미국 중산층들이 글로벌 경쟁과 노동대체 기술로 이중고를 겪기 시작한 1980년 경, 미국 정부가 택했어야 하는 방향은 사회안전망 확대, 노동조합 강화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이와 정반대 방향을 택했고, 그 결과 양극화가 심해졌다. 그리고 이는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11년 재정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고려말 '쌍화점'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수입명품으로 한껏 사치를 부렸지만, 대중의 삶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소수의 권문세족에게 토지가 집중돼 있었던 탓이다. '쌍화점'의 시대는 동시에 '양극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걸 바로잡은 것은 결국 '역성혁명'을 통해서였다. 정도전, 조준 등 조선 건국 세력은 사실상 토지 국유화 조치를 밀어붙였다. 이를 통해 '양극화'는 완화됐고, 새로운 나라 조선은 '세종, 문종 시대'라는 한반도 역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간판 내린 홍대 앞 카페 주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글 머리에서 '홍대 앞 거리' 이야기를 했다. 그곳에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이유는 또 있다. 카페 간판이 너무 자주 바뀐다. 카페 문을 닫고 떠난 주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그 중에는 '부잣집 도련님'이 반쯤은 취미로 운영하던 곳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는 아등바등 모은 돈을 털어넣은 이들이다.'괜찮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그러니 온통 자영업으로만 몰린다. 식당과 카페, 술집은 계속 늘어나지만, 그에 비례해서 성공 확률도 줄어든다. '홍대 앞 거리'에서 끊임없이 바뀌는 카페 간판이 그 증거다.

간판을 내린 카페 주인은 낭떠러지로 몰린다. 그들에게 비상구는 없다. 결국 지금 절실한 것은 '사회 안전망', 그리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다.
(☞관련 기사: "'좌파'보다 국익에 무관심한 그들, '진짜 우파' 맞나?" ,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도 '무상복지'가 필요한 이유)

이건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홍대 앞 거리'에서 간판을 내린 카페 주인들 중에는 유명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을 다녔던 이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간판을 내린 뒤에는, 낭떠러지로 내몰린 빈민일 따름이다.

이들이 기본적인 생계는 유지하면서 자신을 추스릴 기회(사회 안전망)가 제공돼야 한다. 또 변화한 노동시장 수요에 맞춰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배울 기회(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필요하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이들이 늘어나면서, 중산층도 줄었다. 최근 <조선일보>는 '자본주의 4.0' 기획에서 한국의 중산층 비율은 1992년에 정점을 찍은 뒤,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건강한 사람도 가끔은 병원 신세 진다…'보편적 복지' 필요한 이유"

이른바 '복지 담론'이 유행하기 전, 한국 사회를 장악했던 담론이 '양극화'였다. 그런데 어느새 언론과 정치권은 '양극화'라는 낱말을 잊은 듯 하다. 낭떠러지로 내몰린 이들에게 안전망이 없다보니,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진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사회 안전망' 강화다.

그러나 '사회 안전망'은 당장 낭떠러지로 내몰린 이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 안전망'의 신세를 질 일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마치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한두 번쯤은 병원 신세를 질 일이 있듯 말이다. '보편적 복지'가 절실한 이유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선 '보편적 복지'는커녕 '무상급식'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관련 기사: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도 '무상복지'가 필요한 이유)

▲ 무상급식을 포함한 '보편적 복지'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오세훈 서울시장.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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