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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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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5)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 역사적인 조건 ②

1. 1815년 이전의 역사

영세중립 원년(1815년)의 앞뒤로 나누어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을 탐색하려는 필자의 방침에 따라, 1815년 이전의 조선의 역사를 서술한다. 1815년 이전의 역사가 너무 방대하므로, 임진왜란~1815년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1) 임진왜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뒤 명(明)나라와 조선을 정벌하여 이름을 만세에 남기려는 허황된 꿈을 꾸었다.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주들에게 포상으로 약속한 토지가 부족하자 그들에게 나누어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백여 년간 계속된 내전으로 전쟁이 일상화된 무사들의 넘치는 전쟁 욕구를 해소해주는 대안으로 명과 조선을 접수하고자 그 길목인 조선부터 침공한 것이다.(백지원, 2009, 29)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늘 그러했듯이, 임금을 비롯한 지배자는 도망치고 민초들만 남아서 맨손으로 침략군에 저항했다. 의주까지 도망친 선조는 화급하게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의 지원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일본군에 맞설 군대를 파병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서인(西人)을 비롯한 조선의 지배층은,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사림파 사대주의자들(송시열이 대표적인 인물)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하면서, 명나라만을 숭배하고 후금(청나라)은 오랑캐로 멸시했다.

2) 병자호란의 원인을 제공한 숭명배청(崇明排淸) 외교

이른바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따른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외교가 후금을 자극하여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후금(청나라)은 떠오르는 해임을 직감하지 못한 조선의 지배계급이 숭명배청의 외교를 펼친 것은 후금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병자호란의 원인이 된 '숭명(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은 시대착오의 소산이다.

명군[명나라 군대]이 명목상으로는 '조선을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들어왔다.(한명기, 1999, 16) 명의 참전은 조선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갈 경우를 우려하여 요동을 방어하고, 궁극에는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한명기, 1999, 31)

이러한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지는 해인 명나라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 어리석은 대외정책이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지는 해(명나라)와 떠오르는 해(후금)가 뒤바뀌는 명청(明淸) 교체기에 양쪽의 중간에서 줄다리기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중립적인 외교가 시급했다. 적어도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치며 국익을 챙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집단이 명나라만 일방적으로 짝사랑하여 병자호란의 화근을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명나라는 조선에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 생각이 없이 요동 보호하는 국익을 위해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했는데, 명나라 군대를 받아들인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나라로 섬기는 '재조지은'의 사대주의 이데올로기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3)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 속에서 중립외교 펼쳤어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의 국제정세는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엄혹했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위협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와중에 누르하치[후금]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한명기, 2009, 242) 속에서 중립외교가 나라를 살려내는 은혜로운 생각(再造之恩)이지 지는 해인 명나라에게만 바보같이 충성을 바치는 것이 재조지은이 아니다.

샌드위치처럼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한가운데에 끼어있는 조선의 대안은 균형외교ㆍ중립외교이었다. 한반도를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완충지대로 상정하는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일본(임진왜란의 주역)과 후금(청나라; 병자호란의 주역)에게 호소하고 명나라의 동의를 얻어냈어야 한다. 한반도 주변의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주변국가들(명나라ㆍ청나라ㆍ일본)을 합종연횡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도모하기는커녕 주변 국가들을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능력도 조선의 지배계급이 갖추고 있지 못했다. 오로지 골수에 사무친 사대주의 이데올로기인 '재조지은'을 국내 정치용으로 악용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이러한 수단을 잘 사용한 서인 집단이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권력을 내리 장악하게 되어 망국에 이르게 된다.

2. 임진왜란과 명나라, 그리고 사대주의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준 전쟁이다. 과연 그러한가?

임진왜란은 실질적으로 동인(東人)들이 치렀다. 유성룡 이순신 그리고 곽재우 정인홍 등 영남 의병 등이 그들이다, 반면 서인(西人) 가운데 공을 세운 사람은 별로 없다. 임진왜란의 뒤에 그 공로로 동인이 집권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서인은 '명나라=임진왜란 승리자=이 나라 구원자'로 규정했다. 송시열이 말한 바, 재조(再造)의 은혜를 준 나라였다. '다시 이 나라를 세우게 해 준 은혜'-그것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해 주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참전해서 이 나라를 구원해준 전쟁이었다. 이에 반하여 동인이 보기에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수군과 곽재우 등의 의병이 싸워서 이긴 전쟁이다.

서인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쿠데타[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단 동인이 세웠던 공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친명(親明) 이데올로기, 그것은 인조 쿠데타에 이용되었으며,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병자호란 때 처절한 패배 뒤에 이제 친명 이데올로기는 소중화론(小中華論)으로 나가면서 집념이자, 강박 관념이 된다. 정권 장악을 위해서 만든 친명 이데올로기가 서인의 질곡이 된 것이다.

명나라를 빌미로 집권한 송시열이나 서인-노론에게 명나라는 이제 '서인 노론 정권' 그 자체가 된다. '서인-노론 정권의 이익=명 나라-소중화(小中華)-재조지은(再造之恩)'이 된다. 쿠데타[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시작하여 상대 당파를 제압하고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이론을 선택한 서인들-그들은 병자호란이라는 잘못된 선택 뒤에 명나라[지는 해]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명나라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것은 사대주의로 나간다. 정신적 사대주의-소중화(小中華)라는 것, 대의명분-강상(綱常)윤리에 폭 빠진 것. 그리고 자신감과 자주성의 상실. 서인의 역사에는 이것이 면면히 드러난다.(손영식, 2005, 69~70)

이렇게 자주성을 상실한 서인-노론의 역사가 줄곧 이어져 내려와 망국의 원인을 제공하며 일제의 침략을 허용한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사대주의에 심취한 서인-노론이 자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주적인 중립외교를 전개하면서 한반도 중립화를 이룰 수 없었다. 서인-노론의 자주성을 잃은 사대주의가 지나치게 외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외세의 한반도 진입을 너무나 쉽게 허용하고, 외세의 난립 속에서 득세한 일본이 끝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 사대주의와 '중립'의 간극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립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아니지만, 극도의 사대주의가 망국을 초래한 것보다는 낫다. 이러한 점에서, 중립외교를 시도했다가 물러난 광해군의 미완성 중립화가 아쉽다.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이어져 영조ㆍ정조 시대에까지 대물림되었다면, 조선 땅도 스위스처럼 영세중립지대가 되었을지 모른다.

결국 극도의 사대주의가 한반도 중립화를 가로막은 흉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망국의 근원이 되었다.

<인용 자료>
* 백지원『조일전쟁』(서울, 진명출판사, 2009)
* 손영식『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울산, 울산대 출판부, 2005)
* 한명기『임진왜란과 한중관계』(서울, 역사비평사, 1999)
* 한명기『정묘ㆍ병자호란과 동아시아』(서울, 푸른 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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