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미주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위의 글은 죽산 조봉암의 유언이다. 그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고루 잘 살도록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 즉 당시로서는 제3의 길이었던 한국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온 몸으로 정치적 실천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이제 52년 만에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이다. 2011년 오늘, 조봉암과 관련하여 복권되고 있는 것은 사형 판결과 그의 손상된 명예뿐만이 아니다. 그의 못 이룬 꿈이자 좌절된 이상, "우리 국민 대다수가 고루 잘 사는 나라", 그의 복지국가 건설의 꿈도 복권되고 있다.
조봉암은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일본에서 엿장수를 하며 대학을 다녔고,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혁명가를 자부하며 일제로부터의 조국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후 그는 1932년 상해에서 체포될 때까지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서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보내는 서신'이 공개된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출당 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과 결별하게 되는데, 1946년 6월 22일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미소공위촉진 시민대회에서 '비공산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배포하면서 공식 전향하였다. 이 성명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모두 반대하였는데, 이때 조봉암은 제3의 길, 즉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공식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조봉암의 이러한 사상적 변천의 과정은 1956년 5.15선거 공약과 진보당 창당대회의 선언문 및 강령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드러난 조봉암이 추구하는 제3의 길 노선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의 길과 시장자유의 독점자본주의의 길을 배제하고, 양 극단이 아닌 그 중간의 길을 선택한다는 1946년 공개 전향 당시의 수준을 넘어, 조국통일의 평화적 실현과 진정한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규정하면서,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적 수준으로까지 완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봉암의 제3의 길이 제시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건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우리나라는 계급적 문제를 해결하여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연대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의식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우리나라에 고유한 민족모순을 해결하고 저개발과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립적 경제성장을 추진해야 하는 문제에 함께 봉착하고 있었다. 즉, 조봉암의 제3의 길 노선은 당면한 민족모순의 해결과 경제사회적 불평등의 해소 및 경제사회적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였던 것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지향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사회적으로는 평등적 민주주의이며, 경제적으로는 계획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로지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통한 변혁 방법을 선택하였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혁명적 변혁세력이 아니라 평화적 의회주의 방식의 급진적 개혁세력이었다. 진보당의 의회주의적 실천노선은 선거혁명을 통해 시장자유 독점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한편, 당대의 혁신계 지식인 중에서 가장 현실 정치적이었던 조봉암은 어쩌면 대단한 이상주의자였다. 그가 꿈꾸었던 정치적 이상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고 보장되는 사회, 착취 없는 사회, 각자의 노력에 의해 평화롭고 여유로운 생활의 영위가 보장되는 사회, 전쟁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생활사회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였다. 그리고 당시 조봉암과 진보당이 주장하였던 피해대중과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복지국가의 구현은 평화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선결조건이기도 했다.
당시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노선은 영국과 미국 등 당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변화와 북구제국의 복지국가 건설 성과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보당 강령의 전문 '자본주의의 수정과 변혁' 부분에 잘 기술되어 있는데, 자본주의의 조국인 영국에서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국가 간섭으로 전환되었으며, 제2차 대전 후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한 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에 의한 자유자본주의의 지양과 자유자본주의적 야경국가의 사회주의적 복지국가로의 민주주의적 평화적 전화가 거의 결정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 이 강령의 전문에서는, 자유자본주의의 아성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정책이 실시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이를 "미국의 전통적 개인주의와 약한 정부의 사상을 배척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에 관여할 것을 주장하면서 실시된 자본주의 수정의 미국적 방식"으로 보고 있다. 강령의 전문은 이렇게 고전적 자본주의 국가 영국과 가장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수행하여온 최대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수정 내지는 변혁이 진행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제2차 대전 전후부터 가장 건실한 민주정치가 행하여지고 있고 국민생활이 안정 향상되고 있는 북구제국의 경우도 살펴보고 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및 핀란드 등 북구제국에서 제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당(노르웨이에서는 노동당)이 단독으로 또는 농민당과 연립으로 정권을 장악하고서 대체로 동일한 사회주의적 복지국가의 건설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다. 산업 건설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사회보장제도가 크게 발전하고 있는 이들 제국에서는 국민생활이 안정화되고, 또 높은 수준에 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견실히 향상되고 있다."
▲ 죽산 조봉암. |
즉, 진보당은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전반적으로 국가의 개입과 계획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 이유로 시장과 자본형성이 미약한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발전 단계에서는 경제발전의 주도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당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변화 방향으로 볼 때 낡은 자유방임 자본주의로는 무력하고 무효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제시한 경제 및 산업 정책은 독점적 대산업의 국유화와 기간산업의 확충을 위한 국가의 재정투자 확대 등 개입주의 전략을 추구함과 함께 개인자본의 소유권 보장, 사적 투자의 장려, 생산조합 조직의 장려와 지원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와 조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데, 이러한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담당할 관민합동의 경제계획위원회 설치의 제안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러한 경제정책과 함께 통합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진보당의 사회정책은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노동권의 제도적 신장, 완전고용과 산업민주주의의 추진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사회보장제도의 내용으로는 교육과 의료의 단계적 완전보장과 국민연금 및 주거복지의 실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 이에 진보당은 고율의 누진소득세와 적극적 재정정책을 제시하였다.
조봉암과 진보당의 경제-사회 통합적 복지국가 노선은 50년의 긴 잠복기를 거쳐 참여정부 때 수면 위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다름 아닌 '복지(사회정책)와 경제의 선순환' 논리이다. 제도적 복지가 총수요를 견인하여 사회 통합적 경제성장을 안정적으로 이룩한다는 이 논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복지국가의 경제학적 기초가 되었던 케인스 경제학에 근거한 것인데, 참여정부에서는 국가의 제도적 복지를 통한 총수요의 진작 이외에도, 국가의 복지 분야 사회투자의 확충을 통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기능을 복지-경제 선순환 논리에 추가하였다.
우리는 1997년의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 없이도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경쟁시장에서 복지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았다. 이렇게 시장복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가족복지가 보태주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 중 10년은 민주정부 시기였음),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쟁시장에서의 각자도생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으로 시장복지는 불확실해졌고, 가족복지는 대부분 해체되었고, 민생이 만성적으로 불안해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라는 하나의 자본주의시기를 마감하고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질적으로 새로운 자본주의시기를 열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지국가 전략은 보편주의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특정 사업장이나 지역별 구분을 넘어 국가 수준에서 제도적으로 복지를 보장받는 방식을 요구하고 성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복지의 계층화가 극복된다. 이를 위해서는 누진적이고 연대적 조세재정 전략이 요구된다.
누진적 조세제도의 확립은 그 자체로서 시장임금의 차이를 보정해주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정은 진보적 산업정책과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를 위해 지출됨으로써 산업과 경제의 양극화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수출경제와 내수경제의 통합적 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또, 충분한 재정능력을 갖춘 민주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기존의 파행적인 기업별 노사관계가 아니라 노동권의 보편적 신장에 근거한 협력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노사관계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보편주의 복지국가라는 '한 배'를 타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소득과 능력에 합당한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세금 없는 복지국가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장만능국가에서 보편적이고 역동적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복지국가 혁명'을 필요로 한다. 누진적, 연대적 방식으로 세금을 기꺼이 더 내겠다는 '깨어있는 시민'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이 우리 풀뿌리 시민사회의 다수가 될 때 마침내 보편주의 복지국가라는 '배'의 출항이 가능해진다.
이제 우리 국민 다수가 보편적 복지국가를 원하고 있는 바, 존엄과 연대와 정의를 가치로 삼고,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 그리고 공정한 경제와 혁신적 경제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한국형의 역동적인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하는 데, 죽산 조봉암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되어야 하며, 대의민주주의와 정치기제를 충분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조봉암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 시대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고, 이미 국민소득 2만 불이라는 충분한 물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는 만큼,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적 정치기제를 통한 복지국가의 건설은 더 이상 이상주의가 아니라 민생불안과 사회모순의 해결 대안으로 추진해야 할 당면과제이자 우리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다. 가히 조봉암과 진보당의 패배 이후 50여년 만에 찾아온 '한국형 복지국가' 건설의 호기라 하겠다.
조봉암이 현재에 주는 중요한 의미의 하나는 그가 큰 꿈(민족적 사회민주주의와 평화통일 복지국가의 건설)을 품은 이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고 체계적인 현실 파악에 기초하여 어려운 시기에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높은 이상과 더불어 현실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 능력, 원칙에 기초한 유연하고 타협적인 자세 등은 현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복지국가 운동 및 정치세력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조봉암은 당시 명백한 진보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었던 복지국가의 건설을 위해 보수야당 정치세력과의 '연합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통합적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호헌동지회의 신당창당에 참여하고자 한 것과 1956년 대선 때 복지국가 정책 수용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양보)가 그것이다.
첫 번째 사례다.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수호의 기치 아래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다. 호헌동지회는 당시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범 민주 대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신당 창당을 추진하였는데, 조봉암은 여기에 합류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조병옥과 장면 등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반대하였다. 이에 조봉암은 1955년 2월 22일 '신당운동에 호응할 터'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비록 미력하지만 지팡이를 짚고라도 따라갈 것을 작정하고, 이 글을 널리 동포 앞에 드리는 터"라고 하였다.
두 번째 사례다. 1956년 5.15 대선 당시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 요구에 직면해있던 조봉암은 "진보당이 지향하는 정강에 어떠한 야당이라도 호응해온다면 정·부통령 후보 지명의 백지화는 물론, 나 자신의 입후보를 취소할 용의가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세 개의 정치적 원칙, 즉 책임정치의 수립,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평화적 통일의 성취에 합치된다면 야당연합전선은 가능하다."고 언급하였다.
조봉암은 민족적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정치의 우선성'을 실천한 진보개혁의 선각자였다. 그는 유럽 공산주의의 교조적 경제 결정론과 정치적 무능을 넘어 당시 대한민국이 처해있던 객관적 조건에서 제기되는 시대적 요구와 자신의 이상을 현실 정치를 통해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우리 경제의 후진성을 제대로 천착하였으며, 남북분단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상황에서 평화통일 복지국가를 그의 꿈이자 진보당의 강령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지금 우리가 처한 조건은 50여 년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국가자본주의에 의한 산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룸으로써 복지국가를 건설할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정치적 반대자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던 이승만 독재와 같은 정치행태가 극복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과 대결적 상황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조봉암 시대의 그것과 비슷한 조건이다. 그리고 경제사회적 양극화는 더 심각해졌다. 이제 조봉암의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 당시 조봉암의 이상주의적 과제가 이제 우리시대의 실천적 과제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이 글은 2011년 7월 15일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 및 업적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필자가 발표하였던 '죽산 조봉암의 복지국가론'을 요약하고 다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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