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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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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4)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 역사적인 조건 ①

1. 영세중립 원년(元年)을 중심으로 서술

스위스는 1815년 11월 20일에 영세중립 국가가 되었다. 영세중립의 원년(元年)인 1815년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가 기념해야하는 해이다. 인류가 평화를 추구한 역사를 1815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은 너무 무리한 구획이지만, 영세중립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중립의 관점에서, 영세중립의 원년을 '평화지향적인 세계사의 분기점'으로 삼을 수 있겠다. 그러면 중립ㆍ평화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를 다룬 책이 없으므로, 이는 매우 난감한 질문이다. 전쟁사(戰爭史) 중심의 역사책은 있어도 평화사(平和史; 평화를 주제로 삼는 역사) 중심의 역사책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전쟁에 대한 위협ㆍ전쟁으로부터의 공포)으로 날을 지새운 우리 민족은, 평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전쟁사 중심의 역사관이 지배적인 정황 속에서, 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역사적인 조건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이러한 조건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실적ㆍ문헌이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해야한다. 더욱이 중립의 관점에서 대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데...뾰족한 수가 없으므로 중립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1815년(영세중립의 원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중립의 시각에서 1815년을 중요시하여,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한국사 속의 중립의 조건'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2. 1815년에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스위스가 영세중립 국가로 공인된 1815년 11월 20일에 조선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1월 20일은 양력이므로 음력(당시 조선에서는 음력을 사용함)으로 계산하면 1815년 12월 15일 경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의 1815년 12월 15일 항목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혜경궁께서 복용할 삼귤차를 달여 들이도록 [순조가] 명[명령]하고, 또 이유고(梨乳膏)를 달여 들이도록 명했다. 은신군(恩信君)의 입후(立後) 문제에 대하여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했다. 묘(廟)ㆍ사(社)ㆍ궁(宮) 및 산천(山川)에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신시(申時)에 혜경궁이 경춘전(景春殿)에서 훙서(薨逝)하였다. 환경전(歡慶殿)을 빈궁(殯宮)으로 하도록 명했다."

위의 항목에서 보다시피,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즈음의 다른 날의 기록도 국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임금ㆍ조정의 대응조치는 있으나 대외관계(청나라ㆍ일본관의 관계)에 관한 조치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815년 전체의 항목을 보아도 심각한 대외관계에 관한 기록은 없고 통상적인 대응만 나타나 있다. 대외적으로 전쟁의 위협이 없는 시대, 즉 청나라ㆍ일본이 조선 땅을 전혀 넘보지 않는 평온한 시대이었으므로 나라 안의 동향이 많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1815년에 조선 땅이 평온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의 임금이 대외정책을 잘 펼쳐서 평온했던 것이 아니라, 종주국인 청나라의 대(對) 조선정책이 유화적이었고 일본은 조선 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유화적으로 다룬 까닭을 알려면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난(亂)'이라는 표현은 전쟁에 대한 당시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을 외부에 전가하는 표현인 동시에 중국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극히 비주체적인 용어이다.<홍면기『영토적 상상력과 통일의 지정학』(서울, 삼성경제연구소, 2006) 47쪽> 그런데 '병자호란'을 대체할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냥 '병자호란'이라고 표기한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점령한 후금(나중에 청나라가 됨)이 조선의 인조 정권을 접수한 뒤 조선 땅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으나, 더 높은 차원의 전략에 따라 인조 정권을 살려주었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후금이 인조 이하 지도부를 몽땅 다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징기스칸의 군대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로 문제는 그것이다. 그렇게 다 죽여 버리면,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다는 것-그것은 징기스칸의 손자가 세운 원나라 정권에서 잘 볼 수 있다. 후금은 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기본적으로 무능했다. 전략도 전술도 없었다. 그저 '명나라=은인=아버지 나라'라는 의식으로 살았다. 물론 그 점에서는 유치(幼稚)하지만, 반면 '명나라=서인 정권의 이익'으로 삼은 점에서는 더 없이 노회한 정치꾼들이었다. 정치적 어린애이면서 노회한 정치꾼들-그렇기에 후금에 너무 쉽게 졌다. 바로 그 점이 후금의 마음에 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강고하게 정권을 잡는 노회한 인간들인데, 외부적으로는 더 없이 무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들[후금]은 인조 정권, 쿠데타 정권, 서인 정권을 다시 그대로 온존시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들을 없애고, 조선을 식민지로 직할 통치하면 비용이 막대하게 든다. 후금은 낙후한 조선에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 했다. 뜯어먹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보태 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선을 포기했다.(손영식, 2005, 74)

무능한 인조 정권을 살려두는게 식민지를 관리하는 비용이 덜 든다는 고도의 전략에 따라, 평온한 상태에서 권력을 유지하게 된 인조 이후의 임금들. 이 임금들은 (청나라가 전략적으로 부여한) 평온함에 취한 나머지 평화지향적인 대외정책에 너무 소홀했다. 이들이 광해군처럼 정신을 차려 중립지향적인 대외정책을 이끌었어야하는데, 오히려 북벌정책(효종의 대외정책)을 구사하면서 종주국인 청나라를 쓸데없이 자극했다.

3. 영리한 정권이었다면...

영리한 정권이었다면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하여 조선-청나라-일본의 평화로운 3각 관계를 정립했을 텐데...군사적인 방식의 북벌정책은 역행해도 분수를 넘은 것이다. 전쟁을 생각케하는 북벌정책이 아닌 조선-청나라-일본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반도 중립지대화를 청나라ㆍ일본에 제안하여 승인을 받았더라면, 19세기말의 망국의 수난~20세기 초의 일제지배~20세기 후반의 분단체제(중립화 통일이 불가능한 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늘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중-일 관계를 전쟁이 아닌 평화의 방식으로 이끌어야 중립화 통일이 가능한데, 이에 역행하듯 '군사적으로 무능한 정권'이 북벌정책(효종)을 펼치거나, 청나라가 허용한 평온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평화체제(조선의 중립지대화)를 구상할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중립지대화는커녕 '중립지대가 없는 붕당싸움'에 열중하여 국력을 소진시킨 끝에 망국의 길을 향하여 줄기차게 걸었다. 국내에서 붕당 싸움할 기력이 있었으면, 청나라ㆍ일본을 찾아가 조선의 중립지대화를 설득했어야한다. 허용된 평온함을 넘어 청나라ㆍ일본이 다시는 병자호란ㆍ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없는 한반도 중립지대화-동북아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했어야한다. 스위스의 위정자들처럼.

스위스는 1515년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참패한 뒤 국제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큰 위험부담을 준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전투를 계기로 스위스는 향후 외교에서 중립노선을 선호하게 된다.(박후건, 2007, 41)

스위스는 한반도와 똑같이 전쟁을 겪었으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끝에 영세중립을 성취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의 조선의 임금ㆍ조정은 영세중립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국내의 당파싸움에만 매달렸다. 참으로 바보 같은 정권이 인조 이후 지속된 끝에, '영세중립을 거론조차할 수 없는 현재의 분단체제'를 조성하는 원인(遠因)을 제공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 세력이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따른 사대주의 외교를 펼친 화근(禍根)이 분단체제의 근원(根源)을 이룬 게 아닐까?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 이후의 임금들은 붕당정치의 허수아비가 되었거나 세도 정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한반도ㆍ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인용 자료>
* 『순조실록』제18권 (서울,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93)
* 손영식『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울산,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 박후건『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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