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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침략' 아닌 '출병'이라고 하는 일본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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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침략' 아닌 '출병'이라고 하는 일본 교과서

[韓日 교과서 전쟁, 해법은?] 2011 일본교과서 쟁점 <2>

지유사와 이쿠호사 교과서에 보이는 임진왜란 관련 서술은 과거 후소샤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다. 공통되는 것은 임진왜란을 언급하면서 '침략 전쟁'의 본질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한 항목의 제목을 여전히 '출병'이라고 붙인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문제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조선으로의 출병(出兵): 전국을 통일한 뒤 히데요시는 중국의 명을 정복하고 천황과 함께 대륙으로 이주하여 동아시아부터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장대한 구상을 갖기에 이르렀다. 1592년 히데요시는 15만의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그러나 명과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고,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약 14만의 대군을 파견했다…2차례에 걸친 출병에 의해,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황폐해졌다. 또한 이 출병에 막대한 비용과 병력을 소모했던 히데요시가(家)의 지배는 동요했다." (지유사 역사 교과서 114~115쪽)

"히데요시의 대외정책과 조선출병(朝鮮出兵): "또한 히데요시는 해외 진출의 뜻을 품고…1592년 명으로의 出兵 안내를 거절한 조선에 15만인 남짓한 대병을 보냈다…조선출병으로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현저히 황폐해졌다. 또한 이것의 실패는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쿠호사 역사 교과서 97~98쪽)

침략이 아닌 출병?

▲ 일본 이쿠호사 공민 교과서 표지. ⓒ연합뉴스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지유사와 이쿠호사의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지칭하면서 '조선출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대군을 다시 파견했다"는 등 애매한 서술을 남발하고 있다. 그것은 이 전쟁이 갖는 '침략'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다. 침략 목적이 아니라면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왜 '보내고' '파견했을까?'

그와 관련하여 이쿠호 교과서에서 '명으로의 출병 안내를 거절한 조선' 운운한 것이 주목된다. '명을 정벌하는데 앞장서고〔정명향도(征明嚮導)〕',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정명가도(征明假道)〕'는 요구를 조선이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선을 공격했다'는 전래의 괴변을 슬쩍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침략 전쟁'이 아닌 '정당한 정벌'로 왜곡해온 역사는 꽤 길다. 한 예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조선에서 일본군이 물러나 국교를 다시 열어 조선을 재생시켰다"며 "(그럼에도) 조선은 그 은혜를 잊고 있으니 영원히 인교(隣交)를 맺을 나라가 아니다"라고 운운한 바 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끼친데 대한 미안함은커녕 일본군을 철수시킨 것 자체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발이다.

하쿠세키 류의 자의적이고 왜곡된 인식은 메이지 유신 이후 변형된 형태로 재현된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대외침략이 이어지는 와중에 히데요시의 침략을 '정당한 정벌'이자 '계승해야 할 위업(偉業)'으로 찬양하는 분위기가 극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은 '대륙 진출'이자 '조선 출병'으로 미화되고 히데요시는 일찍이 그것을 실천한 '선구자'로서 칭송되었던 것이다. 지유사와 이쿠호사 교과서에서 '출병' 용어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이 같은 전래의 인식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보인다.

'현저한 생활의 황폐'?

지유사와 이쿠호사의 교과서는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피해의 서술과 관련해서도 문제를 안고 있다. 양자 모두 "두 차례에 걸친 출병에 의해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황폐해졌다"고 극히 간략하면서도 모호한 서술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교과서에서도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대거 살해하고 포로로 끌고 갔을 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는 잔학한 행위를 저질렀다. 일본인들 스스로 교토(京都)에 '귀 무덤(미미츠카, 耳塚)'을 만들어 놓은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조차 일본을 가리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라고 통탄한 바 있다. 깊은 원한과 적개심은 무고한 침략과 잔학 행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황폐해졌다'는 간략하고 모호한 서술을 통해 침략자,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회피, 호도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역사인식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보다 확실하고 엄정한 서술이 될 수 있도록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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