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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부의 딜레마 '시장', 아직은 걸음마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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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부의 딜레마 '시장', 아직은 걸음마 단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한반도포커스'] 북한 시장의 미래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한반도포커스> 14호(2011년 7·8월호)를 전재합니다.

<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14호는 '북한 경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5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7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 (☞제14호 전체 내려받기)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 조치)가 실시된 지 9년이 경과한 현 시점에서 보면 7·1 조치는 북한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7·1 조치가 내포하고 있는 전반적인 정책기조는 지난 9년 동안 일시적, 부분적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7·1 조치를 통해 형성된 하나의 경제 시스템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1 조치는 다양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가격·임금·환율의 대폭적인 인상을 포함한 전반적인 가격체계의 재조정, 계획의 분권화 및 기업 자율성 확대, 배급체계의 재편, 무역의 분권화 확대 등과 같은 계획경제 내 개선조치가 우선적으로 꼽힐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시장메커니즘의 부분적 도입이다. 종합시장의 허용, 사회주의 물자교류시장의 도입, 기업에 대한 계획외 경제활동, 즉 사실상의 시장경제활동에 대한 용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단순화시켜서 보면 시장에 대한 합법화이다. 기존에 진행되던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를 공식 제도 내에 일부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합법화에 그치지 않고 시장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는 점에 7·1 조치의 획기성이 있다. 시장에서 발생하는 잉여를 국가가 수취하기 위해, 더욱이 그러한 잉여수취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는 시장화를 직접·간접적으로 촉진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내놓았다. 아울러 각종 납부금, 사용료 등의 형태로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조세행정체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조세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Cap Anamur

그런데 2005년부터 개혁적 정책기조가 후퇴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2007년부터 시장에 대한 정책이 촉진에서 억제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7· 1 조치 등 경제개혁을 내각이 주도하고, 이러한 개혁이 지속됨에 따라 당의 반발이 갈수록 커졌으며, 아울러 개혁의 지속에 따라 기존 질서의 동요, 배금주의 및 개인주의의 확산 등 이른바 개혁의 정치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2007년부터 본격화된 시장에 대한 단속, 통제는 다방면에 걸친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종합시장에서의 매대상인을 대상으로 상행위(장사) 연령에 대한 제한, 상행위 시간에 대한 제한, 상행위 품목에 대한 제한, 상행위 장소에 대한 제한 등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서비스업 개인투자활동에 대한 제한 조치가 취해졌고, 무역회사의 구조조정 조치도 단행되었다. 나아가 종합시장의 물리적 폐쇄, 즉 농민시장으로의 환원도 시도되었다.

2009년 11월 말에는 화폐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하면서 보다 업그레이드된 시장 억제정책을 시도했다. 주민들의 보유 현금에 대한 몰수조치를 통해 시장경제활동의 재정적 기반을 대폭 축소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시장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물가 폭등, 상품 공급 위축 등 화폐개혁의 부작용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북한정부는 2010년 2월부터 시장에 대한 단속의 고삐를 늦추고, 나아가 5월에는 시장에 대한 억제정책을 철회했다.

결국 시장은 다시 합법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시장에 대해 북한정부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숨통을 트기 위해서는 시장을 허용해야 한다.

하지만 시장이 활성화되면 정치적인 부담이 증가한다. 지금과 같이 후계체제 구축이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는 더욱 그러하다. 성공적인 권력계승을 위해서는 내부단속, 내부결속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비사회주의의 온상'인 시장이 활기를 띠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화폐개혁의 후유증 등으로 민심이반이 심각한 상황인 만큼, 새로운 지도자가 주민들의 '먹는 문제'에 대해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고, 이는 대내적으로는 시장을 풀어놓는 길 이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2007년부터 시장을 억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시장화의 진전으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다. 국가는 당, 군, 내각 등 모든 부문들이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시장으로부터의 잉여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조차 시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또한 시장의 역사가 20년에 달하는 등 시장화의 장기화가 진행되고 있다.

시장은 이제 어느덧 북한경제 운영에서, 특히 주민들의 생활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아직 안정적이지는 못하지만 일정 정도 시스템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도달하게 된 데는 7·1 조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7·1 조치라는 대내 개혁적 조치는 대외개방 정책과 동시에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7·1 조치 실시 후 2개월 만인 2002년 9월에 고이즈미·김정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같은 시기에 신의주 특별행정구 설치가 발표되었다.

아울러 7·1 조치 실시 후 4개월 만인 동년 11월에 '금강산관광지구법' 및 '개성공업지구법'이 공표되어 이들 지역은 특구로 지정되었다. 이들 3개 지역을 거의 동시에 특구로 지정, 외자유치에 적극 나서겠다는 정책적 의지의 표현은 북한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또한 북한정부도 7·1 조치 성공의 최대 관건은 공급능력의 확충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다만 이러한 대외개방이 의외의 복병을 만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함으로써 7·1 조치의 앞길에 먹구름이 끼게 되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으로 임명된 양빈이 중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신의주 특구 구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북일정상회담 이후 납치 의혹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2차 핵위기 발발로 북미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특구를 통한 북한의 대외개방은 금강산, 개성 등 남한과의 협력사업에 경사되었다. 다만 무역의 경우, 북중교역 및 남북교역 공히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내륙지역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중국측의 투자가 앞서게 되었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의 악화로 남한과의 경제특구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금강산관광사업은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 이후 3년 가까이 관광은 중단되었다. 북한은 남측의 부동산 몰수 및 동결, 현대에 대한 관광 독점권 취소 등의 압박조치와 함께 관광사업의 재개에 대한 강력한 희망과 의지를 보였으나 북한의 책임 인정과 재발방지 약속 등을 둘러싼 남한정부와의 이견으로 남북간 대치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개성공단 사업의 경우, 북한은 2008년 겨울부터 남한정부에 대해 일련의 압박조치를 취하면서 위기적 상황을 초래했다. 개성공단 통행 제한 · 차단 조치를 취하고 기존 계약의 파기를 통보하는 등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을 인질화하고, 나아가 공단 폐쇄를 무기화했다. 아울러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에는 남북간의 긴장이 극에 달하면서 공단 폐쇄의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북한은 결국 개성공단 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또한 근로자 숙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2009년 하반기부터 고교졸업생을 중심으로 근로자를 추가 공급하는 등 한반도 정세의 긴장 고조 분위기 속에서도 개성공단 사업만은 유지,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정부는 천안함 사태의 원인 결과 발표 직후, 개성공단을 제외한 대북 교역 및 교류의 전면중단을 선언한 5·24 조치를 내놓게 된다. 이에 따라 남북경협은 극도로 위축되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대외경제관계에 있어서 중국에 더욱더 매달리게 되었다. 2009년 10월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 이후 신북중 밀월시대의 상황 속에서 중국과의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나진·선봉 특구 및 신의주 특구의 부활이다.

나진·선봉은 1991년 12월에 경제자유무역지대로 지정,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로 출발했으나 외자유치 성과가 지지부진해서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북한은 2010년 1월, 라선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켰고, 같은 달 '라선경제무역지대법'을 개정, 나선 특구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2002년 북한이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중국측의 견제로 물거품이 되었던 신의주 특구는 2011년에 황금평·위화도 특구의 형태로 부활했다.

지난 6월 8, 9일에는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및 나선경제무역지대의 착공식이 양국의 거물급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이들 두 지역에 대한 협력사업을 중앙정부 차원에서 조율하고 있는 조중 공동지도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조중 라선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경제지대 공동개발 총계획요강'은 북한이 중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개성공단보다 훨씬 개방적인 조치를 취하고, 개성공단보다 더 폭넓게 시장경제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경제의 현주소를 개혁개방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중국, 베트남의 경험과 비교하면 북한의 개혁개방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중국, 베트남의 개혁개방 수준에 훨씬 뒤진다.

하지만 개혁개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곤란하다. 현재 시장은 일정 수준 합법화되어 있으며,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이중경제구조는 공식화되어 있다. 게다가 이제는 과거의 계획경제체제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경제특구는 전부 본격 가동되고 있지는 않지만 남쪽의 동·서 국경지대(개성, 금강산)에 각각 1군데씩, 북쪽의 동·서 국경지대(나선, 황금평·위화도)에 각각 1군데씩, 총 4군데에 설치되어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결국 북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진 개혁개방이라고 평가 가능하다. 우선 점진적, 지그재그식 개혁개방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개혁개방의 딜레마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게다가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위한 대내외 정치적 조건의 미성숙이라는 조건, 즉 국내 정치적 리더십의 불변, 그리고 북미관계 등 대외관계의 미개선이라는 조건하에서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경제개혁의 제도화 수준은 아직 낮은 편이다. 공식과 비공식, 합법과 불법의 경제활동이 뒤엉켜 있다. 국가는 개혁을 주도하지 못한 채 마지못해 끌려가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대외개방은 중국이라는 특정국가에 경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과도하게 심화되는 방향으로 대외개방이 진행되고 있다.

* 원제: 7·1 조치 이후: 북한 개혁개방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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