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정확히 말하면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소위 '전문가'들에 맞서서 상식과 이성을 지키기 위해서, 몰라도 인생에 별 지장 없을 공부를 억지로 했다. 얼마전에는 한미 FTA, 한-EU FTA 협정문의 번역오류 파문으로 영어공부도 다시 해야 했고, 1997년 IMF 구제금융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저축은행 사태 등 걸핏하면 터지는 대형 금융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관치금융의 실태, 금산분리를 둘러싼 경제학의 이론과 실제에도 정통해야 할 판이다.
서울대 법인화 논란, 또다른 공부거리?
이런 판국에 서울대 법인화 논란에도 민주시민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이건 정신적 고문에 가깝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서울대의 체제개편 문제라면 똑똑한 대학 구성원들과 정부 당국자가 알아서 처리할 일 아닌가. 더구나 서울대 체제를 개혁하겠다는데 노동조합이나 일부 교수들이 반대를 한다? 이건 보나마나 지나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세력의 '철밥통 지키기' 내지 무사안일주의가 분명하겠지. 대학서열구조의 정점에서 갖가지 특혜를 누리는 국립 서울대가 연구와 교육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충실히 봉사하기는커녕 자기 문제 하나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배아줄기세포 공부를 강요할 때부터 다 알아봤다며 혀를 찰 국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 30일 밤에 이상한 일이 터졌다. 서울대 학생들이 법인화 중단을 요구하며 총장실을 포함한 본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기말시험도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왜 이럴까? 학생들을 기득권세력이라 하기도 곤란하고, 일부 극렬 사회혼란세력이라고 말하기도 좀 어렵지 않은가?
사태는 심상치 않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몇주에 걸친 준비를 거쳐 5월 30일 2000명을 훌쩍 넘는 학생이 모인 비상총회를 성사시켰고, 장장 5시간이 넘는 진지한 토론과 민주적 의사절차를 통해 서울대 법인설립준비위의 즉시 해체를 요구하는 안이 95%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었다. 또 학생의 총의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총장실을 포함한 본부 건물 점거농성이 8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 서울대 법인화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건 '소통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뉴시스 |
십수년 만의 서울대생 대규모 집단행동
학생들의 행동을 언론이 말하듯이 '기습점거'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비상총회 당시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위해 출입구를 만들어 일일이 참석자를 확인하느라 줄이 길게 늘어섰고, 약속이 바쁜 어떤 학생들은 기다리기 힘들어 돌아가는 모습마저 눈에 띄었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자리를 지키며 의사를 결집한 것은 지난 십수년 동안 없었던 일이다.
왜 학생들이 느닷없이 이렇게 많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수년간 서울대 법인화를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학교당국은 법인화에 이견을 가진 교수진, 총학생회, 노조 등과 대화하고 민주적 절차를 이행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데 실패했다. 특히 작년 12월 8일 국회에서 서울대 법인화법이 예산안 등에 몰래 끼워넣기로 한꺼번에 날치기 통과된 이후로는 대화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민교협, 노조, 총학이 구성한 법인화반대공동대책위가 만들어져 지독히 추웠던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천막농성, 일인시위 등을 하며 줄기차게 대화를 요구했으며, 지난 5월 12일에는 법인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151명(1명은 성명서 발표 후 서명)의 서울대 교수가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성명서에 대한 반응은 법인설립준비위 부단장이 이메일로 공대위 위원장에게 이해를 구한다는 사신을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한마디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는 묵살되었고, 성실한 대화의 자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국회 속기록에 드러난 기막힌 날치기 풍경
기막힌 것은 날치기도 불사하면서 서울대 법인화법을 밀어붙인 주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3월 4일의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 속기록(바로가기)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그동안 여당 의원들도 이 법은 숙성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해왔으니 날치기 통과의 주체가 여당이 아니라 이주호 교과부 장관임을 세상이 다 안다고 지적하지만, 정작 이주호 장관은 국회의 의안 처리과정에 대해 자신이 언급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발뺌한다(12~13면). 또 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날치기 바로 전날인 12월 7일 변재일 교과위 상임위원장이 장관과 법안 수정 문제를 협의한 사실을 지적할 때 이장관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도 TV를 보고 서울대 법인화법 통과를 알았다는 어이없는 발언을 고수한다.
나아가 김의원이 작년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현 오연천 서울대 총장이 국회에 출석하여 아직 학내 구성원의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않다고 밝힌 사실을 지적하자(22~25면), 이장관은 전혀 반론을 펴지 못한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여당도 국회의장도 서울대 법인화법 통과를 요청받았다고 말했으니 요청의 주체를 밝히라고 꼬집는다(47면). 심지어 현재 한나라당 원내대표 황우여 의원도 서울대 법인화 과정이 지나치게 졸속이며 재론이 필요함을 명확히 지적했다(55~57면). 실제로 서울대 법인화법은 서울대 외의 국공립대학, 교육단체, 시민사회 등 이해당사자가 폭넓게 참여하는 공청회다운 공청회 한번 없이 날치기 통과되었던 것이다.
어이없다. 교과부 장관, 교과위 상임위원을 포함한 여당 국회의원 모두 하나같이 서울대 법인화법은 내가 나서서 밀어붙인 건 아니라고 변명하며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다. 권영길 의원 말대로 법안 통과를 대통령이 요청하지 않았으면 장관이 책임져야 마땅하다(47면). 설마 서울대 법인화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대통령이 국회에 직접 주문했을 리 없고, 설령 그렇다 한들 이제 레임덕을 코앞에 둔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장관이나 여당 의원의 도리가 아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논의 시작해야
또 이주호 장관은 "서울대 측에서는 나름대로 또 여론수렴을 충분히 해서 그걸 저희들이 반영"(24면)했을 뿐이라고 둘러대기도 하지만, 오연천 총장은 (작년 10월의 국정감사에서 학내 여론수렴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법이 통과된 이상 자신은 법인화를 추진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로 일관하며 점점 더 커져가는 학내 구성원들의 우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대학, 최상위 국립대학의 체제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중차대한 사업을 추진한 책임있는 주체가 이처럼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그러니 답은 하나다. 서울대 법인화는 귀신이 한 것이다. 이처럼 졸속 추진된 서울대 법인화가 낳을 모든 문제는 앞으로 귀신이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온국민이 드디어 서울대 법인화 귀신에 대해서까지 공부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똑똑하고 혈기 넘치는 학생들이 귀신을 잡기 위해 일이백명씩 집에도 못가고 매일 본부 건물의 찬 바닥에서 밤을 새우는 21세기판 '귀신 잡기'가 벌어진 것은 당연하다.
갈 길은 분명하다. 국회 양당 대표가 공개적으로 약속하든 아니면 교과위 양당 간사의 합의 형식을 취하든, 서울대 법인화를 재고해야 한다. 더불어 서울대를 포함한 국립대학교 전반의 발전 방향에 대해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적 논의를 차분하게 개시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대 총장은 더이상 졸속으로 서울대 법인화를 추진하지 못하겠다고 안팎에 당당하게 선언해야 한다. 곧 기말시험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치르고 방학계획을 세우기에도 바쁘다.
사족 1: 농성학생들은 왜 내가 이 글에서 법인화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지 않았는지 항의하지 말기 바란다. 고등교육의 공공성과 자율성이라는 원칙만 입에 올려도 벌써 피로에 찌든 국민들은 손사래를 칠 터이다. 또 학내의 법인화 논란과정에서 드러난 내부의 문제는 캠퍼스 안에서 토론하도록 하자. 남 보기 창피하다.
사족 2: 농성학생들은 제발 이주호 교과부 장관의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말기 바란다. 왜냐고? 이장관은 서울대 법인화 귀신과 춤을 춘 넋나간 사람이니까. 정신 나간 사람에게 무슨 책임을 묻겠는가? 만약 제정신이라면 가장 먼저 이 사태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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