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웃음거리 아닌가?
이건 명백한 국제적인 웃음거리다. 그동안 어느 나라가 이렇게 하던가? G-20 홍보가 매일 전국을 뒤덮고 있다. D-day 표시까지 동원한다. 엄청난 국가적 경사가 벌어지는 듯한 환상을 유포하는 동시에 이걸로 우리의 세계적 위상이 전격적으로 달라지는 기회라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4대강처럼 G-20는 이명박 정권의 성역이 되고 있다. 언론과 방송도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G-20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어디에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이명박은 G-20 개최와 관련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에 기여하는 국가로서의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적 긍지"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G-20 개최가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적 긍지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지난 6월 G-20이 열렸던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대대적인 항의시위가 열렸다. G-20가 서민들의 삶은 방치하고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를 약속해놓고 이행하지 않은 기만에 대해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G-20이 개최되는 곳이면 어디든 보게 되는 광경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나라의 국가적 자부심이나 국민적 긍지를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아니다. 선진국이라는 위상이 그로써 훼손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이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대해 발언권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에게도 주어질 권리로서 당연한 문제제기다. 경찰이 시위대와 충돌하는 모습은 또한 다반사로 목격하게 되는 사태지만 이것이 시위와 집회의 권리 자체를 봉쇄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 만일 그토록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적 긍지를 논하고 싶다면, 선진국에서는 당연한 시위와 집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후진성부터 정리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에게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적 긍지를 다치게 하는 것은 도리어 이명박 정권이다. 이건 부끄럽게도 "완전 촌티"다. G-20 연다고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자랑하고, 서민들의 삶을 위한 세계경제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고민과 발상은 없는 채,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지는 발언권을 틀어막고 있는 모습은 전혀 선진국형이 아니다. 이런 자세를 그대로 지속시킨다면 선진국 진입이 아니라 우린 아직 후진국이요, 하는 것을 입증하는 무대가 되고 말 것이다.
G-20 환상의 기만성
이명박 정권이 유포하고 있는 G-20 환상은 기만이다. G-20이 열리면 뭔가 한국이 국제적 위상이 달라지고 동북아 경제의 에너지가 한층 더 비약적 발전을 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런 걸까? G-20개최국이 된다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일까? 그래서 국가의 격이 상승하고 오늘날 이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인가? 이는 마치 지난 김영삼 정권 당시 OECD에 가입하면 한국의 선진성이 확보되는 것처럼 선전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OECD 가입의 결과는 자본시장에 대한 방어구조가 없는 상태에서의 자본시장의 개방과 훗날 한국을 쓰나미처럼 덮친 투기자본의 공격에 의한 외환 위기였다.
우선 G-20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G-20의 전신은 이른바 선진국 모임 G-8이었다. 그러나 2007년에서 2008년, 미국에서 비롯된 세계적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보다 포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G-20 구성이 제안되었다. 포괄적 논의가 요구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가 직면하게 되는 금융위기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나라가 더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요구 때문이었다. 동요하고 있는 서구 중심의 제국주의적 체제에 중간국가를 포섭해서 세계자본주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전략의 소산이었다.
이후 각 나라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의 이른바 준비모임 성격의 회합이 국가 정상 회의를 위해 2009년과 2010년에는 일 년에 두 차례 열리게 되었다. 2009년에는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피츠버그, 2010년에는 캐나다의 토론토와 한국의 서울, 이렇게 일정이 편성되었고 2011년부터는 일 년에 한 차례 연례모임이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2011년 의장국은 프랑스이며, 그 다음 해인 2012년은 멕시코다.
그렇다면 흔히들 말하는 선진국은 모두 이 G-20에 가입했는가? 아니다. 스위스,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아예 가입하지 않았고, 네델란드,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등은 독자적 가입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라는 틀 속에서 대표기구를 통한 참여를 선택하고 있다.
물론 G-20는 국제법적 헌장이나 구속력을 가진 기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G-20에 국제통화기금 (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이 참여하고, G-20에서 논의되거나 결정된 사안을 반영시키게 된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가볍게 볼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G-20을 대체하는 유엔 내부의 "경제안보위원회(Economic Security Council)"를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엔 회원국 모두가 참석하는 "총회(General Assembly)"에서 이 문제를 결정해서, 명실상부하게 전 세계의 경제문제를 공정하게 논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유엔 자체가 안보리 구조 중심인 비민주적 기구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도 한계가 있지만, G-20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을 주변에 포진시키는 서구 제국주의의 새로운 유형의 지배구조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빠져 있어
G-20이 지난 시기에 다룬 주제를 보면 그 관심 사안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가속화되기 이전인 2006년의 경우에는 G-20의 전신인 G-8이 "풍요의 건설과 지속(Building and Sustaining Prosperity)"를 내세우면서 에너지 문제를 비롯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개혁 등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는 세계경제에 대한 별반 위기의식이 보이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일종의 낙관이 유지된 때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역시 커다란 변동이 없는 채로 넘어갔으나 2008년에는 금융시장의 경쟁심화가 가져오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에는 미국이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해법 찾기를 신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보다 전면적인 세계경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인식의 본질에는 금융자본의 책임이나 투기적 시장의 확대에 따른 국가의 통제력 강화 그리고 공공영역에서 서민들의 삶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빠져 있다.
런던에서의 경우
아니나 다를까, 이 G-20이 개최된 런던을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공식적인 G-20에 대한 비판과 시위가 연달아 벌어졌다. 2009년 런던의 경우 하나만 보더라도 "인민의 권리를 최우선으로(Put the People First)"라는 주제 아래 비정부 기구 NGO와 노조, 그리고 환경운동 단체가 연대를 해 160개 이상의 모임을 조직했으며, "일자리, 정의 그리고 기후"라는 구호를 내걸고 3만 5천명 이상의 시민들이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세계경제를 독점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자본시장의 민주화와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력 강화, 녹색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 공공영역의 확대, 공공기관의 사적 자본 지배구조 심화(민영화: Privatization) 반대 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시위대는 G-20이 결국은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모임일 뿐이며 일반 시민이나 인민들의 이익은 뒷전이라고 비판하면서 영국 의회 앞에서 "권력은 인민에게(Power to the People)"를 외쳤다.
G-20 반대시위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반전운동도 주영 미국 대사관 앞에서 조직되었고, "G-20이 주도하는 세계경제 폭락(G-20 Meltdown)"이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비판과 반대 운동도 시위에 가담, 영국 중앙은행 앞에서 벌어졌다. 영국 런던에서의 이러한 시위에 발맞춰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도 유사한 시위가 펼쳐지면서 G-20이 개최되는 시기는, G-20 참가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아니라 이들이 세계 경제의 위기와 서민들의 삶을 압박하는 책임을 지라는 요구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독교 NGO 단체들도 이 시위에 적극 참여 하는데, "월드 비전(World Vision)"과 "눈물의 기금(Tearfund)"를 비롯해서 영국 감리교 등이 에큐메니컬 예배를 조직,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여러 가지 폭력과 기만, 그리고 착취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또한 "대안 G-20(Alternative G-20)"가 "이스트 런던 유니버시티(East London University)"에서 열려 세계경제의 민주적 혁신을 주제로 토론이 열리기도 했다.
런던 경찰의 시위대 살해사건
바로 이러한 G-20에 대한 유럽 시민운동의 비판과 반대 운동으로 해서 G-20 개최도시는 경찰력을 비상체제로 전환, 시위에 대해 폭력진압을 서슴지 않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경찰의 대응으로 해서 시위대와 경찰력의 충돌이 빚어지면 언론들은 사태의 핵심을 짚어내기보다는 시민과 경찰의 충돌만을 집중적으로 조명,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왜곡하는 기만적 언론 전략을 펼친다. 이는 언론과 자본의 결합과 동맹체제의 가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의 폭력과 과격한 진압에 대한 시민운동의 대응도 강력하다. 이들은 평화시위를 폭력시위로 변질시키려는 경찰의 유인 충동작전의 진행과정과 비무장 시민들을 경찰봉으로 마구 가격하는 장면들을 사진과 비디오로 찍어 공개하고, 평화시위에 대한 인권적 차원의 보호보다 평화시위를 무산시키려는 행위에 대해 묵과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언론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도 문제가 되어 영국의 "전국 언론인 협회(National Union of Journalists)"는 경찰의 부당진압을 법으로 고소,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2009년 런던에서 열린 G-20이 세계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특별히 조명받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경찰에 의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희생자는 신문팔이 이안 톰린슨(Ian Tomlinson)이라는 청년으로 그는 시위대를 진압하던 경찰의 경찰봉에 머리와 배를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경찰을 애초에 경찰의 책임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영국의 진보적 언론 <가디안(The Guardian)>이 경찰의 폭력 장면을 찍은 비디오를 공개함으로써 사태의 진상이 폭로되었다. 사인 조사 후 발표된 내용은 이안 톰린슨이 내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임이 밝혀져, 경찰은 더 이상 발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G-20 개최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을 종합해보면, G-20는 일반 시민들이 요구하는 전쟁반대,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력 강화, 녹색경제 집중, 온난화현상 저지를 위한 에너지 문제 조절, 정의로운 경제 질서 등에는 귀를 막고 있음이 드러난다.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경찰력이라는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동원해서 침묵시키고 때로 가혹한 진압행위로 말미암아 희생자까지 만들어내는 사태를 빚고 있는 것이다.
만일 G-20가 이런 시민사회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국제적 차원에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면 경찰력을 비상체제로 가동시켜 과격한 진압작전을 펼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다보스 포럼 등의 연례 회의가 열리면 그 주변에 이와 다르지 않는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해온 사태의 반복과 심화라고 볼 수 있다.
서울 G-20은?
이렇게 지난 시기의 역사를 잠시라도 살펴본다면 조만간 서울에서 열리게 될 G-20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예상될 것이다. 이미 이명박 정권은 경찰력 비상체제를 가동시키고 있으며 특수병력까지 동원할 예정에 있다. 물론, 세계 각국의 주요 정상과 정부 요인들이 참석하는 회의라는 점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작업은 정부의 책임이다. 그러나 런던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G-20에 대한 비판과 반대, 그리고 시민운동의 집회나 시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지는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경찰도 경찰 저지선을 넘는 시위대에 대해서는 가혹한 대응을 한다면서 강력한 진압작전을 쓰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사들이 적지 않은 경찰 고위직과 여권 내부를 생각해보면, 시민사회의 정당한 발언권과 비판이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G-20 개최의 시기에 선진 국가들의 시민운동이 집결하고 새로운 대안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은 우선 G-20에 대한 국제적 관심사가 몰리는 상황을 무대로 활용하고, 그 무대를 통해 진정하게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운동을 펼쳐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만이 발언할 수 있고 국제적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권력이 시민, 국민, 인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떤 정부도 오늘날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G-20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에 대한 탄압은 정부가 시민의 적이 되는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사사건건 민주적 원칙을 곧잘 배반하고 있는 정권이라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거센데, G-20 개최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넘길 리가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현재 G-20에 대한 홍보도 강화하고 있는 마당에, 일반국민들로서는 G-20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처지라 이명박 정권의 일방적 여론 밀어붙이기가 다시 가속도를 낼 전망이다.
G-20의 진상
정리해보자면, G-20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주도권을 강화 유지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의 세계 체제 유지 전략의 소산이다. 그런 까닭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그 부담을 분산시키면서 본래의 주도권 강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G-20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목표라고 하겠다. 금융자본의 지배를 위한 구조 강화, 전쟁의 정당성을 마련하는 작업,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발언권을 보다 강력하게 만드는 시도, 세계 경제에 대한 민주적 논의보다는 G-20 참가를 고리로 회원국을 늘리면서 그런 가운데 일부 강국의 독점체제 유지하는 전략 모두가 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을 안정시키면서 일부의 불만을 달래는 작업을 위한 국제적 자본가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아니라면 경찰력을 철통같이 둘러 세워 시민운동의 움직임을 차단할 이유가 없으며 인류 사회 전체가 함께 고뇌하고 풀어나가야 할 바를 내놓고 논의를 하는 현장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G-20는 그런 기구가 아니다.
결국 G-20는 지난 시기 전 세계를 지배해온 자본의 주도권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체제에 대한 성찰과 반성 없이 위기를 극복하는 잠정적 땜질과 여러 가지 도전 앞에서 자본의 주도권을 어떻게 다시 다질 것인가에 그 근본적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국제 경제 회의가 인류의 미래와 우리 사회의 질적 변화에 과연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시위의 권리
오늘날 투기자본의 약탈적 행위와 전쟁을 막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중대한 작업이다. 따라서 G-20는 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인류적 논의를 하는 장으로 변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G-20는 "개혁"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만 투기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라든가 전쟁의 지속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토론과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다름 아닌 G-20의 국제적 정체성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와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적 양극화 현상, 그리고 전쟁의 위협은 모두 이러한 상황에 그 근본 원인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G-20 정도의 규모와 수준의 국제적 모임이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인류적 숙제를 함께 풀어나갈 자세를 갖추고 세계 시민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 2009년 런던의 G-20이 대대적인 시민운동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은 그래서 이런 역사와 현실로 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 열리게 되는 G-20도 전 세계적 시민운동의 의식수준과 맞추어 나가려 한다면 당연히 여러 가지 비판과 반대 시위, 운동이 서울에서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G-20의 환상 속에서 진정 인류가 제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세계적 흐름에 무지한 상황을 스스로 폭로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경우, 자본의 주도권을 철저히 그 권력 기반으로 삼은 세력이라는 점에서도 G-2O에 대한 기대와 정치적 계산은 분명하다. 이를 계기로 서민경제를 바로 세우고 자본의 약탈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며 전쟁이 아닌 평화경제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지를 갖고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시민사회는 G-20 개최에 대한 정부의 공식홍보의 틀에 갇히지 말고 비판적 시선과 함께 정작 제기되어야 할 문제를 온 세계에 알리는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거인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난장이로 취급받는 작은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라면, 그래서 거인들의 발에 난장이들이 짓밟히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이는 당연한 의무이다. 이것은 이 나라와 전 세계 민초들의 갈망을 좌절시켜온 신자유주의의 군림과 폭력의 책임을 묻고 이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소망과 노력, 그리고 믿음이 있다면 이명박 정권이 G-20에 대해 지금도 도처에서 유포하고 있는 환상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한다. 그리하여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꿈꾸는 작은 자들의 연대를 위한 집회와 시위의 권리가 바로 우리사회의 선진적 발전의 표시임을 분명히 밝혀나가야 한다.
권력이 바라는 것과 다른 목소리를 짓밟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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