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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삼성 다닌다고, 그저 좋아만 했던 저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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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삼성 다닌다고, 그저 좋아만 했던 저는 죄인입니다"

[인터뷰] 삼성 자살 노동자 故 김주현 씨 부친 김명복 씨

기자 노릇이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조금 누그러들었다지만, 바람은 여전히 날카롭던 19일 오전.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 순천향대학 병원을 찾았다. 지난 11일 아침 삼성전자 LCD 탕정 공장 기숙사 1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고(故) 김주현 씨의 빈소가 있는 곳이다.

"우리 부부는 바보였어요. 삼성의 실체를 1%라도 미리 알았더라면…"

이미 보도된 것처럼 김 씨의 유족들은 발인을 무기한 연기한 상태다.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아들을 죽음에 내몬 삼성전자 측이 공개적인 사과를 할 때까지다. 김 씨의 아버지인 김명복 씨는 삼성전자 LCD 탕정 공장 앞에서 매일 아침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시위를 마치고 빈소로 돌아온 김명복 씨의 표정은 얼음처럼 단단했다.

몇 마디 인사말이 오간 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음이 쪼개지듯 김 씨의 말문이 열렸다.

"매스컴에선 다들 삼성이 좋다고만 하고, 그래서 삼성 들어가면 출세한 거라고만 생각했죠. 우리 부부가 바보였어요. 자식이 죽고 나서야 삼성의 실체를 알았어요. 그걸 1%만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삼성으로부터 입사 통보를 받았을 때, 고(故) 김주현 씨는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LG전자에도 동시에 합격했지만, 주저 없이 삼성을 택했다고 한다. 삼성에서 연수를 받는 동안 쓴 일기에는 '삼성맨'이 됐다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난다.

▲ 故 김주현 씨가 지난해 1월 연수 당시 노트 한 편에 적은 노래 가사. 희망을 말하는 노랫말이지만 그는 1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시안(김봉규)
"아들에게 없던 버릇, 과자를 왜 자주 먹나 했더니…"

하지만 이런 자부심은 지난해 2월 공장에 배치됐을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명복 씨는 "아들이 '내가 생각한 삼성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했다. 우선 노동조건이 너무 가혹했다. 하루에 12~14 시간씩 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실상 맞교대 근무를 한 셈이다.

김명복 씨는 어쩌다 집에 온 아들이 유난히 과자를 많이 먹어서 잔소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삼성에 들어가기 전에는 없던 버릇이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들은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설비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뛰어 가야 했다. 한창 나이에 먹성이 좋은 아들이 늘 배가 고팠던 게 당연하다.

"300만 원 월급의 진실…100만 원만 기본급, 나머지는 시간외 근무수당"

김 씨를 당황하게 한 일은 이밖에도 많다. 그는 "아들이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쯤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평일이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에는 작은 회사도 주5일 근무가 일반적이다. 김 씨는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이라면 당연히 금요일 저녁에 퇴근해서 주말을 가족과 보낸 뒤 월요일 아침에 회사로 돌아가는 생활을 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했다. 지난해 김 씨가 받은 월급은 300만 원이 넘곤 했다. 또래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많은 수입이다. 그러나 내역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기본급은 100만 원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시간외 수당이다. 그가 받은 많은 급여는, 혹독한 시간외근무의 대가였다.

"'삼성맨'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냐 탓했는데…"

아들을 괴롭힌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숙소 문제다. 식욕이 좋고 운동을 즐겼던 고(故) 김주현 씨는 덩치가 컸다. 키가 186센티미터(cm), 몸무게가 90킬로그램(kg)쯤 됐다. 그런데 삼성전자 탕정 공장 기숙사는 김 씨가 편하게 쉴 곳이 못 됐다. 김 씨는 발에 맞지 않는 군화를 신은 신병처럼 지내야 했다. 그는 숙소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하지만 김명복 씨가 아들이 지내던 기숙사를 실제로 찾은 것은 아들이 죽은 뒤였다.

"거실 하나에 방이 세 개 있더군요. 그리고 방 하나에 침대가 세 개 있어요. 그런데 침대 크기가 다 똑같아요. 그래서 키가 큰 주현이한테 안 맞아요. 하루 종일 혹독하게 시달린 주현이가 잠도 편하게 잘 수 없었던 거죠. 그리고 거실 하나당 세탁기 한 대, 건조대가 두 개 있어요. 아홉 명이 쓰기에는 부족하죠. 실제로 주현이는 20일 동안 빨래를 못하고 지낸 적도 있다고 해요. 그때 제가 '(단정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삼성에 다니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탓한 적이 있는데, 그땐 제가 실상을 너무 몰랐던 거죠.

위생 문제도 심각했어요. 신발장, 침대 아래, 방구석 등에 먼지가 수북하고, 몹시 불결하더군요. '삼성'하면 떠오르는 청결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였죠."

"자식보다 믿었던 삼성, 억장이 무너진다"

그때만 해도 김명복 씨는 '그래도 삼성인데'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들어가기 힘든 삼성에 아들이 다닌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아들이 삼성 입사 대신 다른 진로를 택하기 힘들었던 데는 어려운 집안 형편도 한몫했다. 김명복 씨는 "주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인천의 한 전문대에서 전자 분야를 전공했다.

김 씨는 아들이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역시 쉬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힘겹게 공부한 아들이 대기업 정규직이 됐을 때, 이들 가족은 '이제 고생은 끝났다'는 심정이었다.

"아들이 학창 시절에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어요. 고깃집 불판을 닦는 일도 했고, 서빙도 했죠. 무척 고된 일을 하면서도 가족 앞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어요. 늘 밝고 활달했죠. 아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삼성에 들어간 뒤였어요."

힘들다고 호소하는 아들 앞에서 김 씨 부부는 "그래도 삼성이 제일 좋은 회사 아니냐. 조금 참고 견뎌보자"는 말을 거듭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독히 후회스런 기억이다. 김 씨는 "아들의 말을 못 믿고, 오히려 삼성의 이미지를 믿었던 게 한스럽다"고 했다.

▲ 14일 충남 천안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故 김 씨의 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故 김주현 씨의 직장 생활, 삼성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故) 김주현 씨가 힘겨워한 것은 어쩌면 사회 초년병이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 아니었을까.' 이번 사건을 지켜본 이들이 흔히 하는 지적이다. 그러나 김명복 씨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런 지적에 고개를 젓게 된다. 고(故) 김주현 씨에게 '사회 생활'은 삼성에서 겪은 게 처음이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을 뿐아니라 직장 생활 경험도 있다.

"주현이는 대학 1학년을 마친 뒤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특례업체에서 근무했어요. 인천 부평 공단에 있는 작은 공장이었지요. 안경알 만드는 회사였는데, 그곳 환경도 무척 열악했죠. 위험한 화학물질을 사용해야 했고요. 하지만 주현이는 힘든 기색이 없었어요. 적은 월급이지만 꼬박꼬박 적금도 붓고, 헬스클럽에도 등록했죠. 그 기간 동안 권투 도장에도 다니고 격투기도 배웠어요. 주현이가 워낙 운동을 좋아했거든요."

26살 젊은 나이지만,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곱고 편하게만 자란 여느 신입직원들과는 달랐다는 이야기다. 이런 아들의 말보다 더 믿음이 갔던 삼성의 '이미지'. 김명복 씨는 다른 부모들에게 할 말이 많다.

"삼성 공장 안이 어떤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어떤 부모라도 자식더러 삼성에 취업하라는 말 못 할 거예요."

삼성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은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의 '이미지' 때문에 삼성의 열악한 노동현실에 스스로 눈을 감곤 한다는 설명이다. 김명복 씨 역시 이런 부모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작은 공장에 다니면서, 가족과 지내고 싶어요"

김 씨가 '삼성 공장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지난해 여름께였다. 아들의 말을 더 이상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들은 원래 아토피 피부염이 있었다. 그래서 독성 물질을 다루는 환경은 아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하지만, 인천 부평공단의 병역특례업체에서 일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삼성에선 달랐다. 여름 어느 날, 집에 온 아들의 팔과 다리에선 진물이 줄줄 흘렀다. 피부가 벗겨져서 온통 벌겠다. 공장 안에서 입는 방진복은 아들의 몸에 있는 먼지나 땀이 공장 라인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줄 뿐이었다. 공장 안의 화학물질이 아들의 몸에 스며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큰일이다 싶었다. 아들은 철들고 나서는 처음으로 부모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지난해 8월 아들의 부서가 바뀌었다. 자재 관리 부서였다. 화학물질을 직접 다루는 일은 아니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온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 봤다. 다음날 출근을 앞둔 아들은 눈을 뜨고 있었다.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딱딱한 여느 부자(父子) 관계와는 많이 달랐다. 김명복 씨는 아들 옆에 누웠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날 한잠도 못 잤다.

"회사에 가는 게 그렇게 싫으냐."
"네, 도저히 못 다니겠어요. 다른 작은 공장에 다니면서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요."


뜬눈으로 지새운 아침. 김명복 씨는 부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삼성이고 뭐고 없다. 주현이 회사 못 간다."

꿈같은 휴가, 그리고 회사 복귀

그리고 회사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병가를 신청했다. 이날 오전, 김 씨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아들이 우울증이라고 했다. 회사를 5개월쯤 쉬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견서를 회사에 냈다. 그러나 회사가 허용한 병가는 두 달뿐이었다.

병가를 내고 이틀 동안, 아들은 내리 잠만 잤다. 그렇게 푹 자고나니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며칠 뒤, 아들은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농담도 곧잘 했고, 운동도 즐겼다. 그러나 두 달은 너무 짧았다. 회사에 복귀할 날이 다가오자, 아들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명복 씨는 의사로부터 병가를 연장해야 한다는 소견서를 받아 회사에 냈지만,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10일, 아들은 인천에 있는 집에서 막차를 타고 공장으로 떠났고,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인 11일 오전, 아들은 회사 기숙사 13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 메시지는 짧았다. "엄마 아빠 누나 힘내시고 죄송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은 회사가 아니라 구급대원이었다. 아들의 문자를 보고 불안해진 가족들이 구급대원에게 연락했고, 구급대원이 아들의 시신이 있는 병원을 알려줬다.

모텔에서 만난 삼성 직원 "삼성이 신경 써줄 때 빨리 장례 치르는 게 좋다"

▲ 이야기를 마치고, 아들의 영정 앞으로 가는 김명복 씨의 뒷모습. ⓒ프레시안(성현석)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삼성 직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매뉴얼'을 갖고 있었다. 무조건 3일장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김명복 씨는 숨이 막혔다. 아들이 회사 생활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잘 아는 그로서는 삼성 측이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들이 이날 투신하기에 앞서 한차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더욱 그랬다. '한번 몸을 던지려 했던 직원이라면, 안전한 곳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게다가 영안실에 있는 삼성 직원 가운데 정작 아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삼성 측에 이야기했다. "공개 사과하시오."

그리고 얼마 뒤, 삼성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김 씨를 차에 태웠다. 십 분쯤 지나서 도착한 곳은 어느 모텔이었다. '웬 모텔?' 방문을 열자 삼성전자 박모 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이런 곳에서 뵙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보상' 이야기를 했다.

"1년 연봉 2760만원에 퇴직금, 위로금에 알파를 더 드리겠습니다. 산재는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요구한 '사과'에 대해선 전혀 말이 없었다.

"그만 이야기합시다."

하지만 박 차장은 "삼성이 신경 써줄 때 빨리 장례 치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24시간 모텔에 대기할 테니 사모님과 빨리 상의해서 답을 달라"고 했다. "시간을 끌수록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자식들하고 즐겁게 사는 게 희망인데, 그게 사라졌으니…"

이쯤에서 겁이 덜컥 났다. 김명복 씨는 "국가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게 삼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피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두려울 수밖에. 김 씨는 "삼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모들이 합의하고 넘어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고 했다.

다시 영안실에 왔다. 두 시간쯤 뒤, 휴대폰이 울렸다. 박 차장이었다.

"사모님과 얘기가 잘 됐습니까"
"이거 보쇼. 당신과 만난 지 겨우 두 시간 지났소."
"빨리 하시는 게 좋습니다. 절차를 빨리 밟는 게 좋습니다."


김명복 씨가 "끝까지 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김 씨는 학원 차를 몬다. 그의 아내는 청소 일을 한다. 예전에는 직원 20명쯤 되는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외환위기를 앞두고 파산했다. 혹독한 고생을 하다 7, 8년 전에 차를 한 대 샀다. 그리고 3년 전에 할부금을 다 갚았다. 딸도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했고, 아들은 재작년 말 삼성 입사가 확정됐다. '이제 고생은 끝이다' 싶었는데, 아들이 죽었다.

김 씨는 이제 잃어버릴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서 자식들하고 즐겁게 사는 게 유일한 희망인데, 그게 사라졌으니…. 이제 뭘 더 하겠어요."

"왜 굳이 '공개사과'냐고요?…다른 부모들이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갈 데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저는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운전하면서, 잘은 못살아도, 살아갈 수는 있어요. 딸도 다 키웠고, 아내도 일하고요. 자식 잃은 부모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삼성이 어떤 곳인 줄도 모르면서, 자식이 삼성 다닌다고 그저 좋아만 했던,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삼성이 돈으로 모든 걸 덮도록 내버려두면, 저는 주현이한테 또 죄를 짓는 겁니다. 물론 제가 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싸울 겁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현이 얼굴 볼 면목이 있죠.

왜 굳이 '공개 사과'냐고요. 삼성이 어떤 곳인지를 세상에 알려야하니까요. 다른 부모들이 알아야죠. 자식을 삼성에 보낸 부모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주현이 같은 희생자가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 고(故) 김주현 씨 빈소. ⓒ프레시안(성현석)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빈소 안은 휑하기만 했다. 유족들과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삼성백혈병 충남대책위 관계자 한두 명이 그곳에 있는 전부였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삼성일반노조 등 이른바 '외부세력'이 이번 사건에 관여하는 것을 삼성 측은 몹시 못마땅해 한다. 아들이 죽고서야 이들 단체의 이름을 알았다는 김명복 씨에게 이들 '외부세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고맙죠. 진심으로 고맙죠.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이번에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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