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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당신이 청소 노동자를 '이해'한다고요?"

[기고] 그녀들이 최저임금 유인물을 외면한 이유

대학 내 비정규직 청소‧경비 노동조합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동국대, 동덕여대, 성신여대, 서강대, 연세대, 이화여대, 한양대 등에 이어 최근에는 홍익대학교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주 40시간 노동조차 지켜지지 않기가 일쑤인데다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인 현실도 여전하다. 매년 재계약 철이 다가올 때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이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계약을 해지하는 일도 되풀이되고 있다.

'학교'라는 작은 피라미드 신분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했던, '투명인간'과 같았던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같이 "함께한 학생들과 정도 많이 들었다"며 "학생들이 없었다면 노조는 꿈도 못 꿨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프레시안>은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본관점거를 맞아, 대학 안에서 이들과 함께 울고 웃어왔던 학생의 글을 받았다. 비정규직 연대활동을 해왔던 대학생 김세현 씨는 "청소·경비 노동자를 만나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떻게 산산이 깨부숴지는지를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편집자>

홍익대학교가 새해 벽두부터 청소·경비 노동자들을 집단으로 해고하면서 뉴스감이 없어 무료해하던 언론사들을 바쁘게 만든 다음 날, 나도 홍익대에 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해고된 노동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사람들이 두 부류나 있었다.

한쪽은 교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이번 해고 사태가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학생회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겠으니 외부세력(아마도 노동조합)을 물리고 탄원서를 제출해달라"며 해고된 노동자를 설득하려 했다.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으니 문득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2007년이었다. 학회 출신이라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대해 배울 기회도 많았고 주변에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 중 몇 사람이 우리 학교에 일하는 청소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정규직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애환이 무엇인지 이해한다고 믿던 우리는 노동자들을 설득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날부터 시작됐다. 내가 이해한다고 믿던 것들이 사정없이 깨지고 부서지는 경험이.

▲ 3일 홍익대학교 청소·경비 해고노동자 140여 명이 총장실 앞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청소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유인물을 보려하지 않은 이유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시작부터 거센 도전에 부딪혔다. 최저임금제나 식대에 대해 설명한 유인물을 만들어 휴게실을 방문했는데 아무도 그걸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하는 설명을 들으시면서 이것저것 되묻고는 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는데 한 분이 슬며시 따라나와 귀띔했다. 글자 크기가 문제였다. 20대 눈에는 대문짝만 한 글자였지만 50대, 60대 눈에는 개미글씨였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다음날부터는 훨씬 큰 종이에 두 배는 큰 글씨로 인쇄해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몇몇 분들이 글을 읽지 않고 곧장 가방에 넣어 버리는 일이 생겼다. 알고 보니 한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었다.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 이유도 모르고 읽어보라고 자꾸 권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밤에 이불을 박차고 혼자 창피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학교, 용역업체와 투쟁을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해고한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학교로부터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확답을 얻고 싶었다. 두 차례의 본관점거와 십여 차례의 집회가 날마다 이어졌다. 그런데 본인들의 일이라 더 열성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노동자들이 이상하게도 집회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가거나 점거 와중에 귀가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고 싶었다. 하루는 돌아가는 조합원 한 명을 붙잡고 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이 자신의 일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가족들의 밥을 차려놓고 6시까지 출근을 한다. 그때부터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5시 즈음에 집에 다시 돌아온다. 집에 도착하면 청소, 빨래, 저녁 식사 준비까지 고스란히 어머니(혹은 아내)인 본인의 몫이다. 다 끝내면 잠깐 TV를 볼 틈도 없이 잠을 자야 한다. 내일 4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그러니 집회나 점거에 필요한 몇 시간이 쉽게 생길 리가 없었다. 결국, 두 번째 점거 때는 댁에 가시라고 밤에는 학생들이 지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본인들의 일이거니와 학생들만 추운 곳에서 밤을 새우게 할 수는 없다며 조합원들이 각자의 휴게실에서 이불과 난로를 들고 왔다. 이날도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날 밤에는 이불을 박차지는 않았다. 오히려 코까지 골며 편하게 잤다. 전기장판이 켜진 집 침대보다 잠이 더 잘 왔다.

노조 생기자…"아들과 난생처음 영화관 간 게 기억에 남아"

여차여차해서 투쟁은 끝이 났다. 얻은 것이 많았다. 법적 근로조건이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간 못 받은 체불임금도 돌려받았다. 법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만 받았음에도 백여 명의 체불임금이 3억 원이 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 일상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의 휴게실을 다시 찾았다. 투쟁이 끝나고 바뀐 점들 중에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다.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 때에는 체불임금이 가장 큰 이슈였으니 돌려받은 임금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웬걸. 체불임금 이야기는 간데없고 주5일제가 너무 좋다는 말들만 한참을 들었다. 주5일제 덕에 시간이 나서 난생처음 아들과 영화관에 갔다거나 아들 내외와 펜션이라는 곳에 갔다는 자랑을 한참을 들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누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돈 몇 푼보다 삶이 훨씬 소중할 텐데 나는 왜 노동조합이 투쟁했다는 이유로 돈부터 떠올렸을까.

삶에 초점을 맞추자 한글을 모르던 조합원들이 생각났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컴퓨터 교실을 열었다. 컴퓨터 교실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그런데 정작 한글 교실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한글을 배우는 것보다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더 큰 일이었다. 간신히 설득해서 한글 교실 첫 수업을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 은행에 가고 싶다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평생을 노동하며 살았는데 한글을 몰라 통장관리는 남편이나 아들이 했던 일이 그분들의 한이었다. 두 번째로 많았던 대답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싶다는 것이었다. 글을 모르니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돌아오지 못할까 두렵고 어쩌다 타야 할 일이 있으면 안절부절,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기사나 학생들한테 자꾸 묻게 되니 민망할뿐더러 혹여 내릴 정거장을 놓칠까 노심초사한다. 상상도 못한 대답들이었다. 사실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오고 읽고 쓰는 게 일상인 우리가 돈 때문에, 전쟁 때문에 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누군가의 불편함이나 삶을 그저 짐작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리한 일이었다.

'버리다' 가르치려 쓰레기 얘기했더니…

▲ 연세대학교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한글·컴퓨터 교실인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에서 한 노동자가 한글을 배워 손자에게 쓴 편지. ⓒ프레시안(김윤나영)
한글 교실 수업은 일대일로 진행했다. 이미 조합원들과 알고 지낸 지도 만 4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라 더는 어설프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가 깜짝 놀랄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교만한 지레짐작이었다. 두 일화를 소개한다.

교사로 참여했던 학생 중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맥주를 마시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너라면 'ㅂ'을 어떻게 가르치겠느냐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 친구는 상대가 조합원이라 '버리다'를 통해 알려주기로 작정을 했단다. 그래서 껌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그걸 보면 어떤 말이 생각나느냐고 조합원에게 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합원이 '줍다'가 생각난다고 대답을 했다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교사로 참여한 또 다른 친구는 'ㅜ'를 가르치다 '두부'를 예로 들었다. 그러자 조합원이 장 보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평생 파나 두부가 생긴 모양을 보며 그것들을 샀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평생 두부를 사고 요리하고 먹었는데 그 두부가 글자로는 '두부'라고 생긴 줄을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조합원은 신기하다며 웃는데 그 친구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둘은 모두 조합을 만들고 싸우는 과정에 오랫동안 함께 한 학생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셋은 모두 한글 교실을 그만두었다. 한 명은 입대했고 한 명은 취직했다. 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글 교실을 나왔다. 그러다 최근에 홍대 관련 기사를 접했다. 마침 집이 홍대 근처에 있어서 발길이 향했다.

청소노동자들을 '이해'한다던 이들이 준 상처

그곳에 내가 있던 학교의 청소‧경비 노동조합 분회장도 와 있었다. 그녀는 홍대 총학생회장이 홍대 노동조합의 분회장을 불러 녹음기를 꺼내놓고 이야기하자고 했다는 말과, "총학생회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외부세력(인 노동조합)이 물러가야지만 나서서 돕겠다"던 말을 듣고는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학생들이 노동자들을 이해하고 (노동자들과) 함께해서 편하게 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끄러운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들을 부끄럽게 느낄 수 있어 당당했다.

어제 다시 찾은 홍익대. 홍익대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건물의 네 벽은 어느새 각양각색의 글이며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총학생회 입장글 주변과 총무처니 사무처니 적혀 걸려 있는 명패 주위에 홍익대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재학생, 졸업생부터 트위터 사용자들과 지역 주민의 글들. 농성장의 한편에는 소식을 들은 지지자들이 보내온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과일, 과자, 쌀, 김치 같은 반찬들.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방송인, 연예인, 프로레슬링 해설자 등이 돈을 보내거나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왔다갔다고 한다. 그중에 어느 방송인은 자신의 어머니가 같은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관련 기사 : 김미화 "우리 엄마도 청소 노동자였다")

홍익대에서 해고된 청소 노동자들을 이해한다고 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과 이해한다는 말은 없지만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 누가 해고 노동자들과 더 빨리 마음으로 만날까? 만약 후자의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정답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답을 알려줄 수는 없다. 대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부끄러웠던 옛이야기. 그냥 응원하고 함께하다 보니 이해받게 되어 당당해진 최근 이야기.

홍익대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길 바란다. 그래서 노동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까지 가슴 따뜻해지는 새해 소식을 듣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이해한다던 그 사람들이 해고된 홍익대 노동자들에게 이해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못난 사람들에게 더 모진 세상은, 요즘 몹시 추운 겨울이다. 하지만, 홍익대 농성장에는 겨울밤 방에서 가족들과 군밤을 까먹을 때의 훈훈함이 있다. 시간 되는 분들은 한번쯤 놀러 가봄직하다. 운이 좋다면 잊지 못할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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