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운동'이길 포기한 사민주의, 미래는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운동'이길 포기한 사민주의, 미래는 없다"

[월러스틴의 '논평'] 스웨덴 사민당의 패배와 영국 노동당의 선택

사민주의에 미래는 있는가?

지난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눈길을 끌었다. 먼저 9월 19일 스웨덴 사민당이 선거에서 참패했다. 사민당의 득표율은 30.9%로 1914년 이래 가장 저조한 성적이었다. 1932년부터 지금까지 사민당은 열에 여덟 번은 집권해왔지만 중도우파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민당의 이같은 성적과 더불어 극우 반이민 정당이 처음으로 스웨덴 의회에 진출했다.

왜 이 사건이 그리 드라마틱한 일일까? 1936년 마르퀴스 차일즈는 <스웨덴: 중도의 길>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정권 아래 스웨덴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극단 사이에서 고매한(virtuous) 중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적었다. 스웨덴은 평등주의에 입각한 재분배와 민주주의를 효율적으로 결합한 국가였다. 적어도 1930년 이래 스웨덴은 사민주의의 전형이자 진정한 성공 사례였다. 최근까지도 스웨덴은 그러한 지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영국에서는 9월 25일 에드 밀리반드가 노동당 당수로 뽑혔다. 토니 블레어가 이끌었던 노동당은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이라는 구호로 급격히 재편된 바 있다. 블레어는 당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블레어가 말하는 중도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중간이 아니라, 핵심 경제 부문을 국유화하는 사민주의적 프로그램과 고삐 풀린 시장 지배 사이에 있는 중도였다. 이는 1930년대 이후로 스웨덴이 가던 노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 9월 25일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애드 밀리반드 ⓒ로이터=뉴시스

영국 노동당은 토니 블레어의 핵심적인 동지이자 에드 밀리반드의 형인 데이비드 밀리반드 대신 동생 에드를 선택했다. 이는 노동당이 블레어와 단절하고 좀 더 사민주의적인(더 스웨덴적인?) 정당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해석됐다. 그러나 며칠 후 연설에서 에드 밀리반드는 '중도' 노선을 재확인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는 "공정함"이나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으로 연설의 곳곳을 꾸미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낡은 생각과 결별하고, 삶에는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기초적인 보장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해야 합니다."

이 두 선거가 사민주의의 미래에 대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운동과 이데올로기로서의 사민주의는 전통적으로(그리고 아마도 정확하게) 19세기 후반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주창한 "수정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자(남성 노동자)가 보통 선거권을 얻기만 하면 노동자는 자신들의 정당인 사민당(SPD)이 집권하는 데 선거를 이용할 수 있으며, 마침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의회 권력을 잡는 순간 사민당은 사회주의를 "이행"(enact)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은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바보 같은 짓이라고 결론 내렸다.

사회주의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정의는 여러 측면에서 다소 부정확했지만, 적어도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핵심 경제 부문의 국유화라는 개념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베른슈타인 이후 운동으로서 사민주의의 역사는 급진적 정치에서 온건한 중도로 서서히,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사민주의 정당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자국 정부를 지지하면서 이론상으로 내세웠던 국제주의와 1914년 결별했다. 제2차 대전 후 냉전이 도래하자 사민당은 소련에 맞서 미국의 편을 들었다. 독일 사민당은 1959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독일 사민당은 "우리는 이제 노동자 계급 정당이 아니라 국민(people)의 정당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과 다른 사민주의 정당들은 "복지국가"라고 불리는 사회적 타협을 지지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1950~60년대 세계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기간에 이는 꽤 성공적이었다. 당시 사민당이 각국에서 많은 사람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를 모았다는 점에서 이 타협은 "운동"이라 불릴 만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자, 사민주의 정당들은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지 국가에 대한 강조를 버리고 시장 제일주의를 비교적 부드러운 방식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블레어가 말한 "새로운 노동당"의 전부였다. 스웨덴 사민당은 다른 사민주의 정당보다 이 조류에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다.

그 결과 사민주의는 많은 사람의 강한 지지와 지원을 얻을 수 있었던 "운동"이기를 포기했다. 사민당은 예전의 열정이 고갈된 채 선거 기계가 됐다.

더는 운동이 아니라고 해도 사민주의는 여전히 문화적 선호로 남아 있다. 유권자들은 아직도 복지국가의 쇠약해진 혜택이나마 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혜택이 점차 줄어들 때마다 그들은 또한 주기적으로 반발한다.

마지막으로 극우 반이민 정당이 스웨덴 의회에 진출한 것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민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이나 다른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 본 적이 없다. 사민주의 정당은 각국에서 주류 민족의 정당으로 남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지지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갉아먹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맞서 자기네 영역을 지키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연대와 국제주의는 그 지역에 [다른 민족과의] 경쟁이 없을 때만 유용한 구호다. 스웨덴은 최근까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문제와 마주쳤을 때,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유권자들 중 일부는 쉽게 극우파로 변했다.

사민주의에 미래가 있을까? 문화적 선호로서는 여전히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운동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 <월러스틴의 '논평'>은 세계체제론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매달 1일과 15일 발표하는 국제문제 칼럼전문번역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배급하는 <에이전스글로벌>과 협약을 맺고 월러스틴 교수의 칼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월 1일 논평 원문보기)

*저작권 관련 알림: 이 글의 저작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있으며, 배포권은 <에이전스 글로벌>에 있습니다. 번역과 비영리사이트 게재 등에 필요한 권리와 승인을 받으려면 rights@agenceglobal.com으로 연락하십시오. 승인을 받으면 다운로드하거나 전자 문서로 전달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단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합니다. 저자의 연락처는immanuel.wallerstein@yale.edu입니다. 월러스틴은 매월 2회 발행되는 논평을 통해 당대의 국제 문제를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