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혐오증(xenophobia)이란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방인이나 외국인, 또는 낯설거나 익숙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증오"이라고 정의돼 있다. 이 증상은 세계 어느 곳에나 퍼져 있는 고질적인 전염병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전염병에 감염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방인이란 말인가? 근대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충성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라고 부른다. 애국주의 아닌 다른 것에 더 큰 충성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표출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식민 모국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른바 반식민지적 상황, 즉 자신이 속한 국가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강대국의 그늘 밑에서 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그리고 강대국의 민족주의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기술적·문화적 우위를 뽐내면서 약소국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가치를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약소국의 민족주의를 가치 있고 진취적인 것으로 칭송하는 한편 강대국의 억압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가치 없고 퇴영적인 것으로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외국인혐오증적인 민족주의가 고개를 드는 제3의 상황이 있다. 한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네 국가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즉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느낄 때이다.
국가적 쇠락의 느낌은 요즘 세계가 처한 것과 같은 엄청난 경제적 위기의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전세계의 정치 상황에서 외국인혐오증이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 미국의 극우파 네트워크 '티파티'의 집회 장면 ⓒEPA=연합뉴스 |
예컨대 미국에서는 이른바 티파티(Tea Party(중산층·백인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운동)라는 단체가 "조국을 되찾겠다" 또는 "미국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월 28일 워싱턴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 단체의 지도자 글렌 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우리의 목덜미에 파괴의 뜨거운 숨결을 내쉬고 있으며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2월 자이토구카이(在特會.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의 준말로 일본의 보수 우익 단체)라는 신흥단체가 교토(京都)에 있는 한 조선계 초등학교를 포위하고는 "야만인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이 조직의 지도자라는 인물은 티파티를 본따 이 조직을 만들었다면서, 자신의 조국이 국제사회의 존경을 잃어가고 있으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티파티와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거의 모든 국가에서 애국주의 정당이 생겨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들 정당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이른바 진정한 시민들에게 나라를 돌려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몇 대를 계속해서 그 나라에 살아야 진정한 시민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도 말이다.
중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등 남측의 국가들이라고 해서 외국인혐오증이라는 전염병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언제 어느 국가에서 외국인혐오증이 그 흉측한 머리를 들어 올리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또다시 되뇌어 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외국인혐오증의 치명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외국인혐오증이란 질병은 부침이 있는 만큼, 약간 완화된 형태의 구호로 이들 외국인혐오증 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척 하면서 경제사정이 나아져 외국인혐오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제도권 우파 또는 중도우파 정당들이 이러한 전략을 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좌파, 또는 중도좌파 정당들은 어떤가? 대부분이,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비애국적"이라든가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낙인 찍힐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외국인혐오증의 물결이 언젠가는 잦아들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물결에 쓸려가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권의) 보편적 가치라든가 실용적 "타협"에 대해 옹알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좌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물결에 휩쓸려 버릴 것이고, 또 일부는 그 물결에 편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파시스트 정당들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좌파" 지도자에서 파시스트로 변모한 수많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파시스트란 말을 만들어낸 베니토 무솔리니야말로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모든 평등주의적 가치들을 끌어안는다는 것, 예컨대 어떤 종류의 공동체든 자치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며 모든 형태의 자치체가 상호 관용의 정신 속에 살아가는 국가적 정치구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규정하기도 또 유지하기도 매우 어려운 정치적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희망인 것만은 분명하다.
▲ 2008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휩쓴 원주민들의 폭동은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증오로 나타났다. 원주민들이 사망한 외국인들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월러스틴의 '논평'>은 세계체제론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매달 1일과 15일 발표하는 국제문제 칼럼을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배급하는 <에이전스글로벌>과 협약을 맺고 월러스틴 교수의 칼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9월 1일 288회 논평 원문보기) *저작권 관련 알림: 이 글의 저작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있으며, 배포권은 <에이전스 글로벌>에 있습니다. 번역과 비영리사이트 게재 등에 필요한 권리와 승인을 받으려면 rights@agenceglobal.com으로 연락하십시오. 승인을 받으면 다운로드하거나 전자 문서로 전달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단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합니다. 저자의 연락처는immanuel.wallerstein@yale.edu입니다. 월러스틴은 매월 2회 발행되는 논평을 통해 당대의 국제 문제를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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