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재협상은 없다'던 자신의 약속이 허사로 돌아갔음을 숨기고, 둘째는 '재협상'이 아니므로 국회심의가 필요없다는, 곧 국회심의를 회피하려는 일종의 노림수다. 하지만 정부측이 아무리 숨겨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언론은 '거의' 모든 내용을 상세히 알려준다. 그리고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우리 언론을 통해서도 상당한 내용이 흘러나온다.
11월 16일 국회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이 밝힌 내용을 보자. 첫째는 자동차 관련이다. 말 그대로 연비, 온실가스가 새로이 들어가고 기존의 배출가스와 자기인증에 관련된 환경 및 안전기준상의 미국차에 대한 특혜를 확대해달라는 요구다. 미국의 요구는 이러한 비관세부문을 넘어 관세영역까지 포괄한다. 즉 2.5% 관세의 즉시철폐 연기를 비롯해 10년으로 되어 있는 픽업트럭에 대한 관세철폐 시간표를 10년 뒤로 미루고, 여기에 대표적 독소조항 가운데 하나인 '스냅백'(snap-back, 관세철폐 환원조치)을 적용하자고 했다. 그리고 한EU FTA와의 비교동등대우를 주장하며, 관세환급조항을 별도로 추가하자고 했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가 안된 요구로, 수출 자동차에 들어가는 국내산 부품 비율을 올리도록 원산지규정도 바꾸자고 했다.
자동차와 쇠고기, 이쯤 되면 퍼주기 협상
그래서 만일 미국의 요구가 다 관철된다면 한미FTA 협정문 중 다음을 고쳐야 한다. (1) 픽업트럭을 포함해 미국의 2.5% 관세 철폐 일정이 포함된 '부속서 2-나-미합중국 양허표' (2) 자동차 환경성능, 안전표준 관련 제9장 '무역에 대한 기술장벽'의 부속서한(구체적 자동차 규제문제) (3) '부속서 6-가 품목별 원산지기준' (4) '부속서 22-나 자동차 제품에 관한 대체적 분쟁 절차 5조' 그리고 (5) 한EU FTA의 관세환급조항은 새로이 작성해야 한다. 한EU FTA에서는 협정문 말미에 별도의 '의정서'(Protocol)를 만들었는데, 아마 한미FTA에서는 별도의 '부속서'나 '부속서한'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뿐만 아니다. 정부측은 쇠고기 문제가 한미FTA와 '별개사안'이라는 이미 4년이나 케케묵은 헛구실을 이번에도 들이대어 마치 쇠고기는 협상대상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쇠고기는 협상을 했고, 미국의 요구는 2년 전의 한미 쇠고기 협상, 곧 수입위생조건의 완전이행이었다. 한마디로 핵심은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도 수입해 먹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일시 중단되었다. 해서 미 오바마 대통령도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 정부에 '지시'했다. 밤잠 자지 말고 열심히 해서 수주내에 마무리 지으라고 말이다.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뉴시스 |
통상거버넌스의 심각한 위기
하지만 나로서는 한미FTA 재협상, 그것도 '점 하나도 못 고친다'에서 협정문의 광범위한 실질변경까지 내몰리고, 밀실에서 일방적인 퍼주기 협상을 하고 있는 이 나라 통상교섭본부를 보면서 통상거버넌스의 심각한 위기를 생각한다. 사실 그렇다. 미국이 '재협상'을 운운하기 시작한 것이 2007년 6월이다. 이후 틈만 나면 미국측은 재협상을 말했고, 그때마다 통상본부측은 그런 일 없다고 하다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비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곧 적기에 적절한 대응을 회피하고, 있지도 않은 '이익 균형'의 자기기만에 매몰돼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통상이슈는 매우 광범위하고 전문적이다. 정부부처 안에서조차 교섭권을 독점하고 있는 통상교섭본부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할뿐더러, 청와대에도 이를 견제할 장치나 인물이 부재한 형편이다. 특히 통상교섭본부가 예의 그 '협상기밀'을 이유로 심지어 국회와의 협의조차 기피함으로써, 이 나라에 통상협상은 오직 통상관료 그들만의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현대 경제에서 통상(通商)이란 그저 관세를 철폐하고 쿼터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통상정책을 금리, 환율 또는 부동산 등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로 보면 큰 오산이다. 우리 경제의 사실상 모든 면, 곧 그 대외적인 모든 면이 통상인데, 이에 관한 교섭 즉 통상협정의 권한이 극소수 통상관료의 손안에서 좌지우지되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견제 없는 통상권력의 심각한 월권적 상황이 만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교섭이라는 특정한 하나의 '기능'이 그 내용까지 대체해버린 셈이다.
최근 골목상권 살리기 법안인 유통법과 상생법 개정을 둘러싼 해프닝은 통상협상이 잘못되면 어떤 결과를 빚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개정안에 대해 통상교섭본부가 태클을 걸었다. WTO협정과 아직 서명도 안된 한EU FTA를 위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이러한 통상교섭본부의 논리는 이 법안에 반대한 영국의 유통업체 테스코의 로비를 받은 영국 비즈니스부 장관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한EU FTA협상과정에서 우리측이 유통써비스 개방조건에 EU 7개국처럼 해외 대형마트 진출시 주변상권, 환경, 교통, 고용에 대한 영향을 심사하는 '경제적 수요심사' 조항을 달기만 해도 이런 문제는 생길 리 없었다. 말하자면 협상 실패의 책임을 국회에 전가해서 상임위 통과 법안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만에 하나 우리와 영국 사이에 통상분쟁이 발생하면 통상교섭본부가 국회에 낸 공식의견서는 영국측에 유리한 증거로 인용될 것이 뻔하다.
통상교섭본부를 이대로 놔둘 것인가
한미FTA 재협상도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의연히 살아남은 신화 속에서 그들 권력은 더욱 비대해졌고, 통상협정은 어느 샌가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일이 되어버렸다. 통상거버넌스가 비교적 잘 갖추어진 미국의 경우, 무역대표부는 협상 전후는 물론 그 과정에도 의회와 반드시 협의해야 한다. 우리처럼 저런 무소불위의 권력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이번 재협상에도 미국은 하원 세입세출위 수석전문위원들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협정은 크게 대내협상과 대외협상으로 나뉜다. 우리의 경우, 대내협상은 거의 요식절차에 불과하고 국회협의도 사후보고면 그만이다. 대외협상은 비밀이기 때문에 오직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새로운 통상거버넌스는 이 양측면 모두를 균형있게 아울러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통상교섭본부는 해체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미국처럼 대통령 직속으로 두던가, 정보통신위원회처럼 독립부처로 두던가, 아니면 일본이나 독일처럼 경제부처로 돌리는 것이 지금처럼 교섭이라는 '기능' 때문에 외교파트에 두는 것보다 협상력과 전문성 강화에 훨씬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 그 반대편인 국회에 통상 관련 상설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더불어 통상문제가 주권자의 경제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해당사자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오늘날의 통상은 그 구조상 열개의 잘된 협상이 있어도 하나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와의 부단한 소통네트워크를 강조하는 것이 미국, 유럽 등지에서 두드러진 최근 경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대로 조약에 대한 국회의 '체결동의권'에 근거해 통상절차법이 처음 제안된 것이 2005년이다. 하지만 외교통상부의 반대와 정치논리에 밀려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다.
한미FTA 재협상 논란과 더불어 지금이 민주적, 대안적 통상거버넌스 바로 그 개혁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할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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