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걸그룹들의 일본 진출이 화제다. 주류 가요의 질적 하락을 두고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충고가 많았다.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새로운 작곡가 수혈과 가수 출신 최고경영자(CEO)들의 전략에 의하여 2000년대 중반부터 일정 수준으로 향상되었으니 쓴 소리가 본의 아니게 현실화된 셈이다. 소녀시대, 카라가 얻는 관심은 국내 주류 가요의 역량과 해외진출 기획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류라는 말을 써오긴 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일본 만화와 드라마를 재현하고 역수출하는 일본류의 순환과도 양상이 다르다. 더구나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경제규모는 큰 편이지만 삶에 관련된 각종 지표와 순위는 형편없이 낮아 규모는 있으나 존경할 수 없는, 별로 부럽지 않은 한국에 사는 주민들에겐 괜히 뿌듯한 뉴스이기도 하다.
그런데 걱정도 있다. 대중성에 대한 편견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예정책의 기조를 기업경영논리에 가까운 '선택·집중·사후·간접'으로 정한 이 정부는 대중음악지원예산까지 팔릴 법한 스타발굴에 쓰고 있다. 문화역량을 강화하여 격변하는 21세기에 우뚝 서겠다는 멋지고 근사한 구상의 일부일 것이다. 딱 하나 안타까운 것은 앞서 한 말이 모두 희망사항이란 점이다. 내부의 역량과 다양성 없이는 산업의 안정성도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고 증명한다면, 노벨상 감이다. 현 정부야 우주 어느 별과의 거리를 말할 때처럼 도무지 현실성 없는 그냥 숫자를 나열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니 그렇다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조는 그 전부터 뿌리내려왔다는 사실! 문화부(문공부에 가깝나?)의 제일 좋은 방에 놓인 의자를 데우고 있는 엉덩이의 주인이 누구인가와 무관하게 그 전부터 시장논리가 중심에 있었다. 문화체육부란 명칭, 창조한국(창조영국), 도시재생사업 등, 마치 한국의 모델과도 같았던 영국에서 이런 정책들을 추진하며 경제효과를 내세웠다가 역공을 초래한 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늘날 대중성이란 말은 시장성이란 뜻으로 통한다
며칠 전, 종종 찾는 음악카페에 외국에서 온 청년들이 찾아와 노래를 신청했다. 첫 번째 신청곡인 너바나(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s'가 나올 때 이건 한국으로 치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이고, 오프스프링(Offspring)의 곡이 이어질 때엔 이건 한국의 노 브레인이라 말하자 그럴 듯 했는지 일행이 웃었다(그린데이는 한국의 크라잉 넛 쯤?). 마지막으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 흐를 땐 한국의 산울림이라며 농담을 마무리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유행가들을 듣는 그 청년들의 취향이 평범하고 무난하다는 뜻의 장난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으로 뒤집어보면, 그다지 평범하지도 무난하지도 않게 된다.
순수음악 혹은 전통음악과 구분하려 사용되었으니 다분히 차별적인 용어인 대중음악을 해외의 팝으로 설명할 수 있다. 'popular music'에서 나온 말이라 대중성이 대중음악의 필요충분조건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화의 차이가 뉘앙스의 차이를 만들어낸 풍속이란 말처럼 같은 말이 다른 뜻을 갖게 된 예는 많다. 카우보이가 단지 목동이란 의미가 아니듯이 어원과 다른 의미가 통용되고 고착되는 사례도 많다. 예전에 '문학의 밤'이라 통칭한 교회 학생회의 정기행사는 음악과 연극을 포괄한 문화행사였다. 미국의 가치를 담아온 '팝'이 오늘날 하나의 장르로 통용되는 것처럼 대중음악이란 팻말이 붙은 방 안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니 대중성 강박의 이유는 어원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감독이 다르다는 것을 오로지 크레딧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한국영화들이 있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몇몇 히트작들을 떠올려보면 카메라와 색감, 음악은 물론이고 스토리 진행과 에피소드 배치까지 비슷하다. 가볍고 유머러스한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극단적인 위기가 발생하고 눈물을 동반한 파토스 혹은 감동의 휴먼드라마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장르영화가 정착하지 못한 현실과 투입자금의 회수 때문에 웃음코드를 넣자, 로맨스가 약하다, 액션을 강화하자, 클라이맥스가 약하다와 같은 요구들이 제기되고 반영된다. 그 결과가 '한국형 상업영화'라는 또 다른 장르의 생성이다. 심지어 연극과 영화 그리고 TV드라마는 연기는 물론이고 카메라 앵글도 다른데도 큰 화면으로 보는 드라마 같은 영화들도 있고, '불신지옥'이란 대중적인(?) 제목 때문에 오히려 진가가 가려진 영화도 있다. 일련의 상업영화와 역사소설의 내용이 보수 이데올로기 강화에 기여하지만, 시스템 역시 보수적이다. 모두 대중성과 완성도를 위한 노력들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시장성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소비자를 말하고, 많은 소비자의 선택이 시장성이기에 시장성과 대중성의 등치가 이루어졌다. 대중음악이 그 극단에 있다. 1990년대 전반기는 록발라드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1980년대 헤비메탈 열풍의 영향으로 록 밴드에서 활동한 경험 있는 보컬리스트들 중 여럿이 솔로가수로 데뷔하면서 역시 록 밴드를 이끌다가 작곡가로 전향한 기타리스트들이 만든 곡들을 불렀다. 기량을 갖춘 보컬로 대중성 있는 가요와 접목된 록을 부르는 가수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록발라드가 양산되었다. 1992년에 김종서와 신성우가 데뷔했고, 1993년엔 박상민이 데뷔했고, 1995년엔 김경호가 데뷔했다. 대중성을 위해 보컬 한 사람만 발탁해 데려오면서 괜찮은 솔로가수들을 얻은 그만큼 괜찮은 밴드들은 사라졌다.
활동형태만이 아니다. 1980년대 무렵까지는 어느 가수가 인기를 끌게 되면 여러 음반들에 수록된 곡들을 짜깁기 하여 베스트 음반이라는 타이틀로 판매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또한 가수가 소속 음반사를 바꾸면 해당 가수의 음원을 가지고 있는 예전 음반사에서 몇 장의 음반들에 실렸던 곡들을 하나의 음반으로 만들어 출시하거나 미발표 곡을 신보인양 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물론 저작권을 옮겨와 새로 편집음반을 만들고, 혹은 가수의 인기가 높아 말 그대로 베스트 음반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앨범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보다는 수록된 노래 단위로 소비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 앨범시대 이후에도 대중적인 히트곡을 모은 편집음반이 범람했고, 음반의 가치하락에 일조했다. 돌파구가 아니라 제 다리 삶아먹기였다. 그와 똑같은 상황이 디지털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2010년, 재미있는 제목의 가요들이 쏟아졌다. 지나(G.NA)의 새 앨범을 플레이하자마자 튀어나오는 "꺼져줄게 잘 살아", 이 한 마디를 시작으로 혹독한 인내심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가사가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성인동요'는 이뿐만이 아니다. 인디 신에도 인디라는 경로와 소박하다는 방식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없지 않다.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 '라이브 밴드'의 부정적인 경우가 이른바 '행사용 밴드'로 연주는 잘하는데 남는 게 없는 팀들이다. 라이브 클럽 밴드라서 가질 수 있는 강점과, 바로 그렇기에 생기는 강박이 있다. 충실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띄우기에 대한 강박이 그런 팀들을 2류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여성 보컬을 전면에 배치하고 친숙한 멜로디와 노랫말을 조합하는, 이른바 한국형 모던 록 밴드들 중에서 한 때 '체리필터'와 함께 실력과 대중성을 겸한 밴드로 불렸던 '럼블피쉬'도 기성복을 입더니 무기력해졌다.
계급성에서 출발한 힙합이 한국에 이식되어 발전하면서 근래에 주류 가요를 추종하거나 클래식이 된 팝송의 재활용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성장한 힙합 음악인들 중 다수가 오버그라운드 성향으로 변화를 꾀하는 흐름이 거세다. 누구는 '시즌용' 노래들과 일부 착실한 힙합트랙이 어지러이 동거하는 앨범을 발표하고, 누구는 유행에 투항을 선언하는 예능힙합마저 낳았다. 반어와 풍자라고? 우린 독심술사가 아니다. 번화가를 '건들건들'이 아니라 '산들산들'한 걸음을 걷게 된 것이다. 감정과잉과 가요화된 랩의 극단에게 서정성, 대중성, 완성도는 무엇인지 묻게 된다. 물론 (일부라고 하기엔 규모가 큰) 일부이다.
걸러낸 것인지, 걸러낼 게 없었는지 모를 음악들이 많아졌다. 한 번만 들어도 여러 번 들어본 듯한 노래들은 누구에게는 성공이겠지만 누구에겐 고행이다. 비슷비슷하게 성형해서 개성을 잃어버린 배우들을 볼 때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음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장르들도 얼굴을 바꾸곤 한다. 한 면이 전체인양 오해받게 된 장르들이 있다. 사상이 표백된 '뉴에이지'가 그렇고, 가장 흔해지고 가장 보수적이 된 '일렉트로닉'이 그렇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중성 강박 때문에 대중성 획득에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쉽고 익숙함'이 대중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실은 시장의 요구이며, 시장의 요구를 대중의 (욕구를 합리화한) 욕망으로 내면화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대중이 장르음악에 가지는 가장 큰 불만은 '대중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일 테다. 그 불만을 대형자본은 영민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어느새 '대중성'은 자본과 등치된다. ⓒ뉴시스 |
쉬움에 대한 강박
"자기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당신이 말을 평이하게 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요구이다. 마치 그들이 당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그들 이외에는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듯한 태도이다. 그건 소가 알아듣는 '이러'나 '워'가 가장 훌륭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엊그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150년 전,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탄식이다. 어린이 교재와 스마트폰 매뉴얼, 가정용 요리책이라면 쉬운 단어와 단순한 문장이 유용하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읽는 사람 모두가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좋은 글이고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어야 좋은 음악은 아니다. 가능한 많은 독자를 대상으로 제한된 지면을 활용하는 쉬운 글, 그리고 많이 팔리는 음악을 생산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적인 기준을 최선이나 최고의 표준인양 말한다. 한국 축구선수들의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 "A때문에 B할 것이다"라는 구문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대언론교육이나 이영표·박지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과관계가 없어도 무조건 충실하다. 답답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훌륭한 울타리"라고 정리해준 운율과 문학적인 표현을 외국의 신문기사와 자료에서 찾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불과 수십 년 전에 대중화된 한글에 정립기가 필요하긴 하다. 영어권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과도기의 가치를 절대시해서는 안 되는데도 교육과 도구화가 언어를 획일적으로 재단한다.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 한 시인은 노래가사를 바른 글쓰기에 따라 교정해주는 과잉친절까지 베풀었다. 전통목공예의 짜맞춤기법처럼 글자수와 음절 하나까지 고려해 멜로디와 정교하게 일치시켜야 하고 비문과 무의미한 소리까지 필요한 가사를 말이다. 순우리말을 애용하자는 취지였는데, 풀이만 길어지고 빙빙 돌게 되는 수고가 생기기도 한다.
"문법을 도외시하고 문장구성도 지리멸렬하며 반복이 무쌍해 멋없는 문체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다. 영문학자였고 대학교수였으며 20세기 가장 유명한 저술가들 중 하나인 마샬 맥루한이다. 그는 G. 플로베르에 대해 "문체가 지각의 방법임을 지적했다"며 찬양했고, 들뢰즈는 문법과 복종의 관계를 지적했다. 그런데 신문 서평의 흔한 상투문구, "간결하고 현학적이지 않은…" 식의 칭찬에 익숙해져선지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글에는 투덜대고 보는 태도가 난무한다. 지적 능력과 예술적 이해가 부족한 대상을 상정하고 쓰거나 만드는 것을 그 대상이 된, 주변인자로 취급당한 이들이 지지하는 희비극이다. 일상의 언어 중에는 사실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 많아 일상용법 이상의 의미를 짚어보는 시도가 필요한 경우가 수두룩함에도 수고로움이 싫다고 한글로 쓰인 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버린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걸 관성적으로 어렵게 표현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내용 자체가 깊고 어려운데 교정을 요구한다면 문제가 있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용건만 간단히" 수준에선 마르틴 하이데거의 책을 펼치자마자 번역자부터 탓할 테고 음악의 낯설음을 서툴음으로 몰아세울 것이 뻔하다. 소설에서 주제가 드러난 부분만 잘라낸다면? 소설이 아니다. 필요 없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신뢰하지 못하는 부류가 자신은 일필휘지로 짧은 시간, 단숨에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다. 읽기에 편하지만 읽고나면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는 주제 정도만 남으니 단숨에 쓸 수 있는 건 당연하다. 한 문장을 길게 늘여 쓰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취향의 다양성은 강박적으로 강조하면서 그 출발인 표현의 다양성 앞에 이르러선 시험답안 작성의 기준 앞에 멈춰버린다.
뜬금없어 보였을 잔소리에서 '글' 대신 '음악'을 넣어보자. 문학에 순수 대 현실의 논쟁이 있다면, 음악에는 대중성과 예술성 논쟁이 있다. 어떤 이들의 바람과 달리 엘리트 대 대중의 구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예술의 존재방식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 '쉬움'은 조야한 투박함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트렌드 추종으로 나타나는 익숙함까지 포함한다. 이런 풍조가 표현법과 폭의 축소를 초래한다. 물론 어려워야 깊이 있진 않다. 비극성이 작품의 깊이와 연결되는 시대도 아니다. 쉽게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고 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이 좋은 건가? 아무리 쉽게 만들어도 결국 다르게 이해되긴 마찬가지다. 깊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건 좋은 재주이듯, 쉬운 소재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능력이다.
이런 입장에서 색이 다른 음악을 제시하면 일부는 낯설어하는 것을 넘어 분노한다. 이런 알량함은 소위 생각이 있다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된다. 각 장르의 마니아나 의식 있는 시민이 다른 분야에선 평균치를 밑도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영화마니아지만 음악 쪽에선 시즌용 상업영화 수준의 취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때, 사회의식은 자부하지만 문화수준은 자신이 한탄하는 정치의식의 수준임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 문제가 생긴다. 자기가 듣지 않는(듣지 않게 된) 음악은 없는 걸로 생각하거나 폄하해두고픈 저항심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관심범위를 넘어서거나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격' 자체가 비하되는 듯한 피해의식에 빠지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게 신작로를 지나가는 가능성의 행렬을 외면하기 위해 담장을 쌓고 깊숙이 들어앉아 어렴풋한 웅성거림에 만족하며 뇌와 마음의 용량을 기꺼이 제한해버린다.
특정 직종의 종사자가 아닌 이상,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마음대로('아무렇게'와 다르다) 노래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는 그 선을 멋지게 돌파할 것이다. 폭탄 맞은 머리를 이고 동공 풀린 눈동자를 달고 다니던 한 기타연주자는 당시로선 시끄럽지만 획기적인 소리와 기법을 선보였다. 지금은 당연해진 소리와 연주이다. 세심함과 배려심을 발휘하지 못한 그의 이름은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이다. 대중성이 없는가? 과연 지금은 가능한가?
목적과 수단이 자리를 바꾸다
'쉬움에 대한 강박'의 줄기를 따라가면 만나는 덕목이 있다. '팔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시대정신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그 질서를 묵인함으로써 '현대판 영주들'에게 어떻게 봉사하게 되는가에 대해선 부연이 필요치 않다. 시장의 기준이 대중의 기호가 되면서 누구에게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누구에게는 맹목적으로 나타나는 이 자세교정은 미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남들도 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괜찮다고 안심한다. 결국 소비자가 된 수용자는 낯선 음악을 두고 대중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불평하고, 이해하려는 마음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중성의 주체는 대중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기 몸에서 뽑아낸 실을 남의 팔뚝에 연결하고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고 있는 건 아닐까.
남의 글과 노래를 깊이 읽고 감동받을 자리를 마련해놓는 대신 표준말처럼 기능하는 표준화-표준규격을 받아들이면 개인의 언어는 사라지고, 원하는 답이 뻔한 문장을 완성하라는 문제지처럼 재미없는 표준음악이 탄생한다. 음악이란 목적과 시장이란 수단의 자리바꿈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구구절절 늘어놓느니 마르쿠제의 "효과는 원인을 잠식하고 결과는 수단을 흡수한다"를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대중성을 다시 정의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는 대중음악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라 재설정에 대한 요청이다. 미안하게도 당연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