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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무지를 낳고, 무지는 파멸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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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무지를 낳고, 무지는 파멸을 부른다"

홍성태의 '세상 읽기' <23> 대운하에 침묵하는 '진보'

"미래가 안 보이는 데도, 미래를 팔고, 미래를 보라는군."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라는 미국 영화에서 변호사로 행세하는 악마(알 파치노)가 그런 줄 모르고 그 부하 변호사가 된 사람(키아누 리브스)에게 하는 말이다. 둘이 지하철을 타고 법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엄청난 부를 가진 잘 나가는 변호사들이 지하철을 타고 법정으로 가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인간에게 고유한,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관심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다름 아니라 과학의 지배가 그것이다. 근대 이전에 미래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미래에 대해 아는 자는 점술가나 예언자가 아니라면 미치광이였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미래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되었다. 과학은 온갖 자료를 들이대며 미래를 '예측'했다. 예언의 자리를 '예측'이 차지하게 되었다. 나아가 미래학이라는 분과학문마저 나타났다. 그러나 과학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했는가? 이에 대해 막스 더블린이라는 미국의 학자는 <왜곡되는 미래>라는 책에서 과학의 허울을 쓴 미래 예측은 근대 이전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신뢰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에 비해 비윤리적이라는 문제마저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래 예측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점술이나 예언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이명박 당선인과 이재오 의원의 주장을 접하면서, 나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악마가 그 부하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래학의 문제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명박 당선인과 이재오 의원은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상세한 자료를 공개하거나 심층적 토론을 하지는 않고 줄곧 '국운융성'의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만을 부추기는데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의 이재오 의원을 보노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미래가 안 보이는 데도, 미래를 팔고, 미래를 보라는군"일 뿐이다.

나는 '이명박 대운하'가 그야말로 극단적인 토건국가 정책이라고 판단한다. 토건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병적으로 비대한 토건업에 나포된 기형국가이다. 토건국가는 불필요한 대규모 개발 사업을 끊임없이 벌여서 어마어마한 혈세를 탕진하고 소중한 국토를 파괴한다. 토건국가를 개혁하지 않고 복지, 교육, 의료 등을 개선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길은 없다. 노무현 정부는 토건국가 확대 정책을 펴서 지지를 넓히고자 했으며,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여기서 나아가 '원조' 개발주의 세력인 이명박 당선인이 극단적 토건국가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토건국가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2006년 현재,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공공투자 사업(우습게도 '개발 사업'에 '투자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만 무려 766개에 달했다. 전국이 공사장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또한 2007년의 공공 부문 건설 투자는 52억8000억 원이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각종 개발 사업을 벌이고 혈세를 쏟아 붓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 2007년에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해서 지출된 보상금만 무려 25조 원에 달했다. 토건국가는 '개발-투기-부패'의 구조를 확립했고, 이 구조는 계속 커지고 있으며, 대다수 사람들이 이 구조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다.
▲ 경부 운하가 건설될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 ⓒ프레시안

이 나라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토건국가의 개혁은 가장 절박한 과제이다. 정권을 잡은 세력이 지지를 얻기 위해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경제 정책이 바로 파괴적인 토건국가 확대 정책이다. 토건국가를 개혁하지 않고 정권 교체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진보·개혁 세력은 대체로 토건국가라고 하면 환경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토건국가는 무엇보다 먼저 재정 문제이고, 이어서 경제 문제이며 복지 문제이다.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대다수 시민의 일상을 규정하는 이 거대한 구조적 문제에 대한 오해와 무지, 그리고 그로부터 빚어지는 무관심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진보·개혁 세력의 실패는 무엇보다 이러한 비현실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진보·개혁 세력은 왜 토건국가 문제에 무관심할까? 진보나 보수의 개념에는 열중하면서, 정권의 형성과 변천에는 몰두하면서, 현실의 인간관계와 물질관계에는 왜 무관심할까? 옆집 철이네도, 앞집 순이네도, 뒷집 훈이네도, 계급·계층·지역·세대의 차이를 떠나서, 모두 토건국가가 빚어내는 '개발-투기-부패'의 구조 속에서 살면서 당연히 그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 참여하고 있건만, 이 나라의 진보와 개혁에 여념이 없다는 진보·개혁 세력만은 이 냉엄한 세속적 현실에 무관심하다. 너무 고귀하게 살아서 그런 것일까?

나는 토건국가의 개념과 이론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진보·개혁 세력이 이렇듯 무관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개번 매코맥이라는 호주인 일본사 학자가 토건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책을 통해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토건국가의 개념과 이론은 일본의 학계와 언론에서 오래 전에 만든 것이다. 아무튼 만일 서구의 저명한 학자가 토건국가론을 폈더라면, 칸트, 헤겔, 마르크스, 레닌, 프로이트, 그람시, 아도르노, 하버마스, 라캉, 알뛰세,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의 주장을 줄줄 꿰고 있는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토건국가에 대해 이렇듯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토건국가는 서구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만의 현실인 것을. 그러니 서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진보와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면, 토건국가라는 우리의 현실을 천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의 이론을 10년 아니라 100년을 공부해도 토건국가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토건국가는 서구의 현실이 아니니까. 따라서 서구의 이론에서는 결코 토건국가라는 것이 나올 수 없으니까.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은 정치 중심의 사고방식과 함께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을 시급히 철저히 혁파해야 한다. 식민성, 사변성, 그리고 그에 따른 당연한 비현실성을 깨쳐야 한다.

'이명박 대운하'의 화려한 그림이 여기저기 나부끼며 장밋빛 미래를 팔고 있다. 이에 맞서 다수의 시민들이 '이명박 대운하는 망국의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명박 대운하'는 토건국가의 구조적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토건국가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만큼 토건국가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개혁할 수 있는 기회도 커졌다. 진정한 진보·개혁 세력이라면 이러한 중요한 변화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한국사회의 핵심적 특징인 토건국가 문제에 눈을 떠야겠지만.

사족. <섹스 앤 시티(Sex and the City)>라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미국 TV 드라마의 주인공은 잘 나가는 젊은 여성들이지만 한 명도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뉴욕에서는 악마도, 변호사도, 젊은 여성도 '자동차'보다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듯하다. 실제로 서울에서 더 많은 자동차가 운행되고 있다. 그래서 서울보다 뉴욕의 하늘이 더 맑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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