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미 FTA를 따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대선 이후 한국 사회의 진로가 한미 FTA 비준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미 FTA 저지가 한국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지켜내야만 할 목표라는 점에서 그렇다. 한미 FTA만 놓고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론조사 1위부터 4위까지 후보는 한미 FTA를 찬성한다. 이명박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정동영 후보는 "임기 내에 50개 이상의 FTA를 다발적으로 맺을 것"이라고 말한다. "FTA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반듯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는 이회창 후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문국현 후보도 "FTA는 대세"이고 "피해 대책을 마련한 FTA 추진"이 FTA 입장이다.
이들은 또한 모두 의료 보장의 강화와 약값 절감을 내세운다. 정동영 후보는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말하고, 문국현 후보는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85%(현재는 64%)까지 올려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하겠다고 말한다. 아예 병원을 주식회사로 만들겠다는 이명박 후보조차도 영유아 본인 부담금 면제, 노인 암 의료 보장 80% 강화, 약값 30% 절감 등 선별적 의료 보장 강화를 말한다. 9쪽짜리 20대 공약 외에는 내놓은 것이 없는 이회창 후보까지도 "노인성 만성질환자 약값 국가 부담"이라는 공약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 모든 주장은 한미 FTA 시대에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개인이 부담하는 진료비와 약값은 더 늘어나고 국민건강보험 자체가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약값이 안 오르거나 올라도 얼마 안 오른다?
한미 FTA를 체결한 노무현 정부의 주장은 한미 FTA를 체결해도 약값이 별로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약값 인상은 최대 연 1750억 원 정도이고 이 수치는 연 1000억 원으로 더 줄어들기도 한다. 정부가 최근 약값이 별로 오르지 않는다는 근거로 내놓는 증거 중 하나가 오스트레일리아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와 비슷한 FTA를 체결했지만 호주에서 약값이 별로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몇 가지는 말해야겠다. 우리가 미국과 맺은 FTA는 오스트레일리아보다 훨씬 더 다국적 제약회사와 미국 정부 측의 간섭을 허용하는 것이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의 약가 제도(PBS)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튼튼하게 잘 짜여져 있어 국민 건강을 제대로 보장하면서도 약값을 최대로 절감하는 제도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제야 FTA 때문에 하느니 마느니 논란을 거치면서 일단 의약품 '선별 등재(포지티브리스트)' 제도를 시작은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정도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그대로 비교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의 약가 제도가 드디어 무너지고 있다. 올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입법예고한 호주 약가 제도의 변화는 미국 제약회사의 마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새로운 약의 약값을 책정할 때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 기존의 약값과 비교하여 책정하는 약가 제도를 새로운 신약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Thomas Faunce, Drug price reforms: the new F1–F2 bifurcation, Aust Prescr 2007;30:138-40).
미국-오스트레일리아 FTA에 포함되었고 한국은 이보다 강화된 조항이 들어간 '혁신적 신약의 가치 인정'이라는 규정이 드디어 법제화되는 것이다. 한미 FTA 협정문이나 미국-오스트레일리아 FTA 5장 1절의 신약 가격은 시장 가격(미국 정부 주장) 또는 정부가 정하는 가격(한국 또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주장)으로 정하게 되어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번 PBS 제도 변화는 신약 가격을 시장 가격으로, 즉 미국 정부 주장대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약가가 안 올랐으므로 한국 약가도 안 오를 것이라고? 오스트레일리아 제도 자체가 망가지고 있고 협상 당사자였던 폰스(Thomas Faunce)는 이 제도 변화를 소개하면서 "약가제도의 붕괴?"라는 말까지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폰스는 이 과정을 추적하면서 미국-오스트레일리아 FTA에서 규정한 의약품 워킹 그룹과 고위 FTA 위원회를 통한 미국의 압력을 자세히 추적한다. 한국의 앞날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미 확립된 약가 제도가 무너지는데 한국에서 이제 걸음마를 뗀 포지티브리스트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국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다른 점은 이제 포지티브리스트를 도입했기 때문에 신약만이 아니라 기존 약들을 앞으로 4년 동안 솎아 내서 정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앞서 여러 필자가 역설한 투자자 정부 제소 제도는 바로 여기서도 적용된다. 지금까지 정부가 보험 적용을 해주던 약들을 이제부터 안하겠다고 하면 외국 제약회사의 기대 이익이 사라진다. 당연히 간접 수용이다.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신약 가치 인정이라는 의약품 협정 자체에 어긋난다. 이것뿐인가? 의약품의 '투명성' 조항에는 약가 결정과 보험 적용 모든 과정에 제약회사가 '투명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무슨 재주로 외국 제약회사의 약을 다시 약가를 조정하고 보험 적용을 해주던 약들을 안 하겠다고 할 것인가? 포지티브리스트는 당연히 물 건너가거나 매우 형식적으로만 유지될 것이다.
한국의 포지티브리스트가 무너진다면 국민의 추가 부담액은 얼마일까? 정부는 포지티브리스트를 도입하면서 5년간 6조 5000억 원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이 제도가 무너지거나 그 효과가 작동을 제대로 안 할 때 발생하는 피해액만 5년간 6조5000억 원이라는 것이다. 1년간 1000~1750억원을 이야기하는 정부는 제도 실패에 다른 부담액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한국의 건강보험 약제비는 2006년 8조4000억 원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30%고 다른 나라에 비해 10% 이상 높다. 약제비 증가액은 상상을 초월해 2001년부터 5년간 정확히 101%가 올랐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매출액은 매년 15% 증가한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이고 세금 내고 보험료 내서 제약회사 주머니로 다 들어간다.
그런데 한미 FTA는 제약회사에 이익이 되는 거의 모든 조항이 강화돼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는 한미 FTA를 "새로운 모범(new template)"이라고까지 평가한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단일 요인으로 의료비 증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약제비 증가는 더 커진다. 이것을 막지 못한 채 무슨 돈으로 의료 보장 강화를 하겠다는 것인가?
건강보험은 예외다?
한미 FTA가 약값만의 문제라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아니다. 건강보험은 예외라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니다. 당장 민간보험의 문제가 있다. 한미 FTA의 금융서비스 협정문은 FTA 발효 후 1년 내 민간보험 상품의 출시를 네거티브리스트로 바꾸는 것을 명시하였다. 신보험상품에 대해 기존의 신고제조차 운영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민간보험 상품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할 수 없게 된다(협정문 13.9).
이 민간보험 상품의 최대 효자 상품은 우리가 TV 광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바로 민간의료보험 상품이다. AIG의 다보장보험이나 프루덴셜, 삼성생명, 교보생명 등의 상품이 그것이다. 이 민간의료보험 상품 매출 규모는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다. 현재 연 매출액이 10조 원이 넘어 공적건강보험 규모의 40%이다. 대부분의 가정이 하나쯤 들어놓는 것이 상식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 민간의료보험 상품에 대한 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린다? 현재도 한국의 민간의료보험 상품은 고령자와 질병이 있는 사람은 아예 가입을 못하게 하거나 보험료를 터무니없이 높이 부르고,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아 보험료를 100원을 내면 돌려주는 돈은 60원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것도 추정이다. 금감원은 국회에 조차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 역시 삼성공화국답다.) 유럽이나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보험료를 100원을 거두면 70~80원을 돌려주도록 법제화되어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이미 민간의료보험의 천국이다. 그런데 아예 규제를 없애겠다고?
민간의료보험의 규모가 이토록 커지고 앞으로 더 커지면 그 사회적 효과는 무엇일까? 하나만 예를 들어 보자.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시민사회의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운동에 대응해서 암 질환에 대해 본인 부담금을 상당히 낮춘 적이 있다. 이때부터 민간의료보험에서는 암 보험을 더 이상 팔기 힘들게 되었다. 즉 현재 민간의료보험이 비대해져있는 상황에서는 공적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강화되면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곧바로 위축되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회사는 공적 건강보험이 커지면 망한다. 사회보장이 잘되어있는 유럽의 민간보험시장 규모는 우리나라 GDP 1.2% 에 비해 4분의 1 수준인 GDP의 0.3%다. 따라서 민간보험회사들은 어떻게든 공적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를 막으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미국민의 70%가 전국민의료보험 도입을 찬성함에도 미국에서 건강보험이 없는 이유다.
FTA가 없는 지금도 삼성공화국이어서 삼성생명에 대한 규제가 없고 이미 노무현 정부부터 이미 건강보험 보장성은 주었던 것을 빼앗아 가고 있다(5세미만 입원 본인부담금 무상에서 10%로 인상 등). FTA 협정으로 민간보험규제는 아예 불가능해지고 AIG부터 미국의 가장 큰 민간보험회사들이 삼성에 가세하면 한국의 건강보험은 어떻게 될까?
이런 사회적 효과 말고 아예 직접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한국은 건강보험 보장성이 51%로 OECD 평균에 약 20%이상 모자란다. 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중병이 생기면 웬만한 집안은 가족이 흔들거릴 수밖에 없다. 이것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정동영 후보나 문국현 후보의 공약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민간보험회사들이 망한다. 건강보험 보장수준을 높이면 민간보험회사들의 기대이익을 침해하게 된다. 투자자 정부 제소 제도는 여기서도 적용가능하다. 일단 정부가 민간의료보험 상품을 팔라고 허용해놓아서 생긴 이익의 영역을 정부 정책(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침범하는 것은 간접수용에 해당한다. 앞으로 FTA가 발효되면 정부는 간접적으로 민간의료보험회사의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보장성 강화조치를 할 때마다 소송에 걸릴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보장성 강화가 앞으로 안 되면 건강보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의료기술은 매년 쏟아져 나온다. 10년 전 CT는 고급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의료 기술일 뿐이다. 건강보험이 보장성 강화가 안 되면 지금의 수준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은 위축된다. 보장성 강화는커녕 건강보험자체가 있으나 마나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괴담이라고? 칠레나 남미에서의 현실이고 미국의 의료 현실이다.
다시 한미 FTA와 대선
약가와 의료비가 대폭 인상되고 건강보험은 위축되는 것, 나아가 건강보험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이 한미 FTA의 결과다. 이것이 단기적으로 나타나든 중장기적으로 나타나든 그 방향은 돌아올 수 없는 의료 공공성의 위축이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캐나다와 멕시코, 그리고 호주에서도 이러한 의료보장의 위축이 나타났고 또 나타나고 있다. FTA를 돌아올 수 없는 편도차편(원웨이티킷)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그래서 대선 때 어쩌라고 물으실 분이 있을 수 있겠다.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한미 FTA를 지지하는 마당에.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대선 이후 한국 사회의 진보를 바란다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키우는 것이 이번 대선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대선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분명한 것은 지금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후보의 충실한 국정동반자가 아닌 한국 사회의 진보를 말할 수 있는 세력은, 한미 FTA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는 정치 집단 밖에 없다. 그리고 두 번째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아직 한미 FTA는, 그리고 한미 FTA 저지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