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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타령하는 기성세대는 답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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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희망' 타령하는 기성세대는 답해 보라"

대선, 삐딱하게 읽기 <5> 이회창은 왜 돌아왔는가?

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했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리라고 본다.

한윤형 씨의 이번 글은 대선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이회창 후보의 출마 선언을 통해 '희망 없는 한국 정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는 "이회창 후보의 등장은 시스템 부재의 한국 정치를 상징하는 일"이라며 "그런 시스템 부재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결코 한 인물에 대한 열광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편집자>

System don't works!

<심슨>의 에피소드 중 하나. 워싱턴에서 열리는 웅변대회 본선에 나가게 된 심슨 가족의 딸 리사는 우연히 하원의원의 비리를 목격하고 준비한 원고를 버린 후 격앙된 어조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썩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시작한다.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청중 중에 섞여 있던 요원이 한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건다. "소녀 한 명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있습니다!" 대경실색한 상원의원은 잇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상원에서, 하원에서 규탄의 결의안에 통과되고 비리의원은 곧바로 체포된다. 리사가 연설을 끝날 때쯤엔 이미 신문에 그 사실이 보도되고 있다. 연설을 끝낸 리사가 신문을 보고 외친다. "System works!"

물론 이 만화에 나오는 미국 정부의 기민한 행동은 과장되어 있고, 설령 실현된다 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정치가 항상 부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시스템의 책략,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시뮬라크르의 저지 전략'이다. 하지만 체제가 그런 저지 전략조차 취하지 않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작동하는 체제가 부럽기만 하다.

언젠가 진중권은 대선 자금 수사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미국에서는 부패를 엄중하게 처단하는 것이 시뮬라크르의 저지 전략이지만 한국에서는 '어차피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냉소적인 인식이 시뮬라크르의 저지 전략인 것 같다고 썼다. 우리는 다들 어차피 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믿고 살고 있다. 그래서 영화 <괴물>에서 그러는 것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 상황에 대응하려 든다.
▲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눅는 무소속 이회창 후보. ⓒ뉴시스

우리 일반인뿐만 아니라 정치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이회창의 출마는 그가 한나라당의 경선 체제를 불신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체제가 이명박같은 후보는 마땅히 걸러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개인 이회창이 직접 나서서 체제가 못한 일을 해야 한다.

문국현과 그 지지자의 처지도 그러하다. 문국현의 지지자는 범여권의 단일 후보로 문국현이 더 적합하다는 사람과 한나라당과 참여정부 이외에 다른 노선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묘하게 섞여 있는 덩어리다. 적어도 전자에게,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체제이며 따라서 자신들이 체제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야 한다.

시스템에 관한 근본적인 불신이 우리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가령 4.19와 5.16 무렵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개인을 조직할 수 있는 중간 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구조에서 강대한 중앙 정치는 아무런 여과없이 개인을 대량으로 동원했다.

오늘날이라고 상황은 달라졌을까? 이전에 비해선 국가와 개인 사이에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중간 단체들이 오히려 소용돌이의 정치를 격려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를 시민의 생활의 개선과 관련된 지향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에 대한 피상적인 지지의 문제로 격하시키는 데 정당과 언론을 포함한 많은 종류의 중간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그 결과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고 언제나 그 동작하지 않는 시스템을 위해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 한국 사회가 걸핏하면 '인물'을 필요로 하고 '인물의 사이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전거의 비유

그런 측면에서 2002년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내건 '생활정치'나 '참여정치'라는 구호는 소용돌이의 정치를 일상의 정치로 복원시킬 수 있는 하나의 구호로 보였다. 그러나 차츰 그 구호가 표현하는 정치 행태는 생활 세계의 이슈를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 정치에 대한 투쟁을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열심히 하자는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런 차원의 참여는 일종의 온라인게임과 같은 중독성을 줄 수는 있으되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실사회주의국가의 시민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지금 우리 시민들의 처지도 그것보다 나을 것은 없다. 정치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386세대들이 20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개탄한다. 20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우려할 만한 일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20대가 소용돌이의 정치의 무력함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20대에게, 더 나아가서 모든 시민에게 소용돌이의 정치가 아닌 다른 종류의 쓸모 있는 정치에 대한 참여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문국현 지지 모임에 갔더니 20대들은 없더라는 식의 개탄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 현재 386들의 정치 참여는 20대들의 정치 냉소보다 그다지 긍정적인 일도 아니다.

언젠가 <서프라이즈>의 논객 김동렬은 최장집의 참여정부 비판을 조소하는 근거로 자전거의 비유를 들었다. 말인즉슨 이렇다. 민주주의는 자전거와 같은 거라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에게 자전거에 대한 이론을 쫑알쫑알 강연해봤자 실천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그토록 단순화시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석양의 어스름 속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다. 다같이 자전거를 끌고 붉은 태양 아래 둑길을 걷던 그들의 공통 체험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것을 소재로 한 아름다운(?) 수필들이 생산된다. 그들은 그 수필이 자전거에 대한 지적으로 탁월한 서술이라고 믿는다. 그 수필의 수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때 노교수가 페달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여유롭게 그들을 앞질러 나간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한다. 그때 김동렬 자전거족(族)이 말한다. "저 이의 두발은 땅을 딛지 않는다. 저 이는 비현실적이다." 이로써 노교수의 자전거는 현존하는 물체가 아니라 이데아 세계의 이념으로 소환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자전거를 끌고 다녔던가?

사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도 욕하지만, 자전거 없이 그냥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을 봐도 욕한다. 걸어 다니는 20대를 만나면 그들은 환경에 관심이 없는 녀석들이라고 나무랄 것이다. 자전거라는 물건이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자전거라는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따진다. 타지도 않고 끌고 다닐 자전거를 사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무엇이 정치 참여인가?
▲2030세대 단체 중 하나인 KYC 행사에 참석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뉴시스

시스템이 동작하지 않는다고 믿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시스템 자체를 작동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무언가'가 시스템이 해야 할 역할을 특정한 인물에게 투사하는 정치 행위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계속해서 시스템이 놀도록 방치하는 짓이다. 이명박이나 이회창이나 정동영뿐만이 아니라 문국현에 대한 지지라도 그런 식으로 하는 한, 그것 자체가 시뮬라크르의 저지 전략이다.

굳이 정치냉소주의를 규탄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 <조선일보>조차 정치적으로 동원하지 못하는 '88만원 세대'들이 있다. 그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보더라도 "내용은 알겠지만 결국 이 책의 내용으로 봐서도 정치에 참여하는 건 실익이 없어. 한 자라도 더 공부하는 게 이득이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 모두가 미래에 대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단적인 증거로, 그들이 '블로깅'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디서 저런 말을 들었겠는가? 부모님의 돈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미약한 희망을 야망으로 치부하고 집단적인 해결은 누군가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종용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아무 것도 없고, 따라서 국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믿는 그들에게 '기권은 나쁘다' 따위의 말을 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88만원 세대>에 나오는 대안처럼 자신의 세대를 지지하고 싶으면 그들이 직접 운영하는 커피숍에 일부러 가서 커피를 마신다든지, 만일 미국산 쇠고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기로 한 라면 회사의 제품을 일부러 사먹는다든지, 비정규직을 심하게 탄압하는 회사가 있으면 블로그 위에 로고를 올려놓고 불매할 것을 천명한다든지, 하는 행위들이 사실 본질적인 정치 행위라는 것을, 적어도 그 시작은 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런 행위들이 모이고 모여 연대성이라는 것을 낳는다. 지금 우리가 주문하는 연대성은, 아예 아무런 재료도 없는데 대놓고 무슨 집단을 만들라고 하는 격이다. 그렇게 허투루 만드니 집단이 모여서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다. "문국현만이 희망이다." 일단 시민들의 정치 행위부터가 존재해야 하며 그 점에서 볼 때는 20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세대도 무능하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선 심지어 토익책을 덮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 수다 떠는 시간, 미드 다운로드 받아보는 시간, 하다못해 '연대성을 말하는 놈들은 사기야'라며 인터넷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을 활용하더라도 충분하다. 열성적으로 중앙 정치에 조직화된 소수의 사람들이 정당을 좌지우지하는 식의 정치참여는 차라리 경멸받아야 한다. 당장은 그 사람들을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는데 어찌할 것인가라는 딜레마가 놓여있지만, 소소한 참여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외에는 놀고 있는 체제를 작동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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