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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은 '선제적으로' 배려하세요"

[공무원을 위한 FTA 해설·4] 헌법 위에 놓인 '내국민대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이하 '협정문')의 분량은 워낙 방대합니다. 요령 있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민원창구로 찾아와 민원을 제기할 사람에 대한 조항부터 읽으십시오. 바로 투자자 조항(11장)과 서비스업자 조항(12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항들에 대한 두 개의 '유보목록'을 읽으십시오. '유보목록'이란 아시다시피, 협정문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을 분야들의 목록입니다.

두 가지 유보목록 가운데 하나는 '추가규제 금지 유보'(부속서 I)입니다. 이를 '현행유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목록에 제시된 현행 규제 수준을 더 높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추가규제 자유 유보'(부속서 II)로, 새로운 규제를 추가할 수 있어 '미래유보'라고 부릅니다.

어느 목록이든지, 이들 목록에서 빠진 나머지 모든 사항들에 대해서는, 공무원 여러분은 포괄적으로 협정문의 의무를 집니다. 이른바 포괄주의 방식, 또는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이라고 합니다.

유보목록을 다 읽으셨으면, 민원 처리 절차와 관련된 투명성 조항(21장)으로 넘어가십시오. 그러면 어지간한 투자자 민원은 협정문에 맞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인 대우, '한국인보다 불리하지 않게'론 부족합니다"

아마 협정문을 읽다 보면, 눈에 아주 자주 띄는 낱말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내국민 대우(NT, National Treatment)'라는 말인데, 투자와 서비스 관련 조항들 앞에는 빠짐없이 등장하고, 두 유보 목록에도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투자 조항의 내국민 대우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 아래 <표 6>입니다.
<표 6>
각 당사국은 동종 상황에서의 투자의 성립·인수·확장·관리·경영·가동·매각 및 기타 처분과 관련해서 자국의 투자자보다 불리하지 않게 상대 당사국의 투자자를 대우해야 한다. (11.3조)

아마도 많은 공무원들이 이 조항만큼은 잘 지킬 자신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민원실에 들어온 미국인 투자자를 한국인보다 '불리하지 않게' 대우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조항이야말로 공무원 여러분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대표적인 조항입니다.

이 조항은 투자의 성립(설립) 단계에서부터 내국민 대우를 규정합니다. 앞서 말한 '포괄주의'에 따라, 유보목록에 따로 들어가지 않는 한,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투자 진입을 제한할 수 있는 업종이나 영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미국인은 원칙적으로 투자 진입(설립)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투자자의 진입 민원을 처리할 때, 이 점을 먼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여러분에게는 <표 7>의 현행 법률에 따라 외국인에 대한 투자 진입 규제권이 있습니다.
<표 7>
외국인은 국가의 안전과 공공질서 유지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국민의 보건 위생 또는 환경보전에 해를 끼치거나 대한민국의 법령에 위반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식 등의 소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 (외국인투자촉진법 4조)

한미 FTA 협정문은 미국인 투자자에게 포괄적인 투자 진입권을 부여하고 있는 반면 국내법은 '공공질서 유지'나 '보건 위생' 등 사실상 포괄적인 진입 규제 조항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공무원 여러분은 이 둘 중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제는 한국의 법일랑 잊으시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인 투자자의 투자 진입 민원을 한국 법령에 따라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투자 진입 민원이 접수되거든, 한미 FTA 협정문 부속서 I에 따라 처리하십시오. 이 목록에 올라 있는 사업 분야가 아닌 한, 그들의 투자 진입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지침입니다.

"친절한 한미FTA 협정문이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목록에 따라 이제는 외국인이 한국 기업을 통해, 한국통신(KT)과 에스케이텔레콤(SKT)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기간통신사업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표 7>의 한국 법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요? 걱정 마십시오. 친절한 협정문이 공무원 여러분을 위해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한미 FTA 협정문 부속서 II는 한국이 외국인 투자자의 '진입'에 대해 부속서 I에 없는 추가적인 규제를 하려면, 공공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해, 다음의 다섯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표 8>은 그 다섯 가지 요건을 담고 있습니다.
<표 8>
법정 절차 요건을 갖추어, 그 투자가 사회의 근본적 이익에 대하여 진정하고 충분히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자의적이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이 아니게끔, 투자에 대한 위장된 제한이지 않도록, 그리고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과 비례해야 한다. (부속서 II, 1면)

여기서, 공무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표 8>에 나온, '사회의 근본적 이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육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진정하고 충분히 심각한 위협'은 무슨 뜻이라고 하던가요?

혹시 이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모르더라도, 이를 상관이나 상급청에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한국의 그 어떠한 공무원도, 대통령도, 법관도, 헌법재판관도, 그 내용을 권위 있게 밝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 진입이 규제당한 미국인 투자자는 한국을 '내국민 대우' 위반으로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국제중재부에서 '사회의 근본적 이익'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진정하고 충분히 심각한 위협'은 무엇인지 규정합니다.

"한국은 '무죄'를 증명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 <표 8>의 다섯 요건들을 다 충족시켜, 미국인 투자자의 진입을 제한하는 새로운 규제책을 도입하시렵니까? 그러려면 이같은 용기 있는 한국 공무원의 행동에 대응해 한미 FTA 협정문에 특별히 탑재된 별도의 장치에까지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바로 부속서 II에 들어간 '특별한 국제중재 심리 절차'입니다.

이 연재를 첫 회부터 읽은 독자라면 투자자의 '국제중재 회부권'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국제중재 절차에서는 중재를 신청한 미국인 투자자가 한국이 협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러나 투자 진입 규제와 관련된 국제중재에서는 반대입니다. 미국인 투자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이 자신이 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표 8>의 다섯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했다는 사실을 중재판정부가 '만족하도록' 입증할 책임이 바로 한국에 있는 것입니다.

과장된 해석론이라고요? 부속서 II의 해당 구절을 그대로 옮겼을 뿐입니다.
<표 9>
대한민국이 그 조치가 위 다섯 가지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였음을 중재판정부가 만족하도록 입증한 경우 청구인에게 유리한 판정이 내려질 수 없다. (부속서 II 2면)

이래도 용기를 내 투자자의 진입 규제 방안을 새로이 만들겠습니까?

"한국 법 따위, 가급적 빨리 잊으십시오"

이제 투자 진입 단계에서의 내국민 대우 규정의 효력을 정리하겠습니다.

부속서 I에서 제시한 유보 목록이 사실상 한국에게 허용된 진입 규제의 최대치입니다. 장차 한국이 어떤 산업 분야에 대해 '이 분야만큼은 한국인이 주도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그 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 진입을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외국인의 투자 진입 민원을 처리할 때에는 <표 7>에 나온 한국 법 따위는 쳐다보지 마십시오. 부속서 I를 찾아본 후, 외국인의 진입 민원이 부속서에 나온 몇 가지 업종에 해당하면 부속서에 맞춰 처리하십시오.

부속서 I에 들어가지 않은 나머지 모든 업종과 관련된 진입 민원이라면, 이를 한국법에 따라 처리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빨리 한국 법 따위는 잊으십시오. 투자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여러분은 절대로 지역 주민을 염두에 두고 일해서는 안 됩니다.

2001년 서울시 동대문구청이 주변 재래시장 상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대형 할인점인 '삼성 테스코'에 대한 허가를 지연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일 삼성이 아니라 미국인 투자자가 대형 할인점 허가를 신청한다면, 동대문구청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한일 투자협정 해설>(한찬식 외 2인 지음)은 동대문구청의 이같은 행위는 내국민 대우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며,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해 '충분히 승소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외국계 대형 할인 매장이 지방 중소도시에 진출하려 할 때, 그 지역 중소상인들을 돕겠다며 무언가 해보려고 나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다 괜히 국제중재에 회부 당해 애꿎은 세금만 더 쓰게 될지 모릅니다.

<표 6>의 조항처럼, 투자 진입 단계에서부터 내국민 대우를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은, '국민경제에서 외국인의 진입과 지분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것인가'와 관련한 국가 규제권과 국민 통합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인도와 싱가포르가 2005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진입 단계의 투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일본과 말레이시아가 2006년 경제연대협정을 체결하면서 10% 미만의 지분을 보유한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내국민 대우를 하지 않기로 한 것(75.2조)이나 투자자가 내국민 대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국가를 국제중재에 회부하지 못하도록 한 것(85.17조)도 이 때문입니다.

"내국민 대우, 절대로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한 가지만 더 설명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일단 국내로 진입한 미국인 투자자에게는 그 투자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규제들은 특히 삼가는 게 좋습니다. 내국민 대우 조항을 절대로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그저 미국인을 한국인보다 불리하지 않게 대우해주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외국인과 내국인에 대한 대우와 관련된 국제중재 판정의 판례는 ①같은 상황에서 ②외국인 투자자와 내국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고 ③이 차이가 외국인 투자자의 국적으로 인한 것일 경우 내국민 대우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합니다.

2002년 '펠드만 사건'에서 국제중재부는 법률적으로 명백한 내·외국민 차별에 대해서만 내국민 대우 위반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 조항의 효과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아가, 국제중재부는 투자자는 외국인과 내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투자자의 국적으로 인한 결과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을 감내할 수 없으므로, 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판정문 183항)

결국 상황이 ①과 ②의 두 가지 요건만 충족해도, 공무원 여러분은 내국민 대우를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제발 내국민 대우 조항을 한국 헌법에 따라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국민 대우는 헌법의 평등권보다 더 강력한 조항입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평등권을 '합리적 근거가 없는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상대적 평등권'으로 이해합니다. 또 헌법재판소는 정당한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한 차별은 평등권 위반이 아니라고 판정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 헌마5 사건 등)

2000년 '마이어스 사건'은 내국민 대우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사건은 캐나다가 국제환경법에 따라 환경호르몬 함유 폐기물의 해외반출을 금지시킨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이 조치는 국적과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캐나다에는 이 폐기물을 국내에 매립하는 캐나다 회사가 한 곳 있었고, 미국 회사인 마이어스는 캐나다에서 이 폐기물을 미국으로 반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국제중재부는 캐나다 정부의 법령으로 인해 발생한 '실제' 효과를 놓고 볼 때, 캐나다 회사와 마이어스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서 캐나다 정부에 내국민 대우를 위반했으니 605만 캐나다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정했습니다.
▲ 미국계 특송회사 유피에스의 직원이 소포를 나르고 있다. ⓒ연합뉴스

또 다른 예는 캐나다의 특급소포배달 시장에 진출한 미국 특송회사인 유피에스(UPS)가 2000년 캐나다를 국제중재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유피에스가 당시 문제로 삼은 것은, 캐나다의 우편업무를 독점하는 캐나다 우체국이 캐나다 체신공사법에 따라 자회사인 소포배달 회사로 하여금 우체국을 이용해 소포배달 신청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유피에스는 자신과 경쟁하는 우체국 자회사는 우체국을 영업에 이용할 수 있는 반면 자신은 이용할 수 없으므로 내국민대우 위반이라며 캐나다를 국제중재에 회부했습니다.

유피에스는 캐나다 우체국이 캐나다 세관으로부터 우편물 통관 절차 상의 특혜, 인력·설비의 지원, 수수료의 지급, 관세 업무 보조 등 독점적인 지원과 함께 세금 면제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우체국을 소포배달 자회사만이 활용하는 것은 자신은 받지 못한 특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국제중재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내국민 대우를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가 단순한 차별 금지를 넘어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캐나다 우체국이 '내국민 대우를 위반하지 않고도' 자회사로 하여금 모회사인 자신을 영업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결국 미국 회사인 유피에스에도 우체국 이용을 허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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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국민 대우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미국인 투자자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십시오. 혹시라도 결과적으로라도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어떤 차이가 발생할 일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마십시오.

미국인은 '선제적'으로 배려하십시오. 이것이 공무원 여러분께 드리는 저의 조언입니다.

☞ 1회 보기"프랑켄슈타인과의 동거 계약서"-한미FTA로 공무원 업무지침 사라져
☞ 2회 보기"공무원 여러분, 각별히 조심하십시오"-'최소기준대우'에 내던져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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