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둘 다 맞다. 한미 FTA 협상이 양국 협상단의 계획대로 4월 2일 전까지 마무리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협상 진척 속도가 더디게 느껴질 것이다. 반면 한미 FTA 협상이 지금이라도 당장 결렬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협상이 척척 진행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최대한 주관을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한미 FTA 협상은 딱 한미 양국 협상단의 계획대로 진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협상 진척도는 한미 양국 정상이 4월 2일께 한미 FTA 협정문에 가(假)서명을 하기에 더 빠르지도, 더 느리지도 않다는 얘기다.
남아 있는 의제는 무엇인가?
사실상 마지막 공식 협상이 될 8차 협상이 약 2주 앞으로 다가온 현재 한미 FTA 협상 테이블에 남아 있는 의제들은 한미 FTA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쟁점들뿐이다. 즉, 지난해 6월에 열린 1차 워싱턴협상 때부터 한미 양국 간에 이견이 있었던 사안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 수십 년 간 양국 사이에 통상마찰을 빚어 왔던 현안들만 남아 있다.
현재 한미 FTA의 '핵심 쟁점'은 이미 수석대표급 협상 테이블로 올라간 무역구제(반덤핑 및 세이프가드) 관련 우리 측 요구사항과 한국의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 및 건강보험 약값 적정화 방안에 대한 미국 측 요구를 맞바꾸는 '빅딜'이다. 이 빅딜은 우리 측과 미국 측이 서로 원하는 것을 맞바꾸는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실은 한국 측이 자동차, 의약품 관련 양보안을 제시하면 미국 측이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 측은 이미 무역구제 관련 우리 측 요구 강도를 크게 낮춘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양국 협상단은 △쌀, 자동차 등 양국 민감품목에 대한 관세철폐 이행기간 (혹은 관세철폐 예외인정 여부) △산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과 우체국 보험 및 택배에 대한 정부 특혜 시비 △기간통신 사업의 외국인 지분 제한(49%) 완화 △방송·시청각서비스 시장의 개방 △개성공단산 상품의 한미 FTA 적용 여부 등 '주요 쟁점'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다. 주요 쟁점은 자동차 관세와 개성공단 문제 외에는 모두 한국 쪽 사정에 대한 미국 측 불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관련 협상에서 수용(expropriation) 관련 소송을 국내구제절차로 해결할지 여부 △경쟁 분과 협정문에서 미국 측이 넣은 재벌 관련 각주 삭제 여부 △정부조달 분과에서 미국 주(州)정부 양허 여부 등 '기타 쟁점'들이 한미 양국 간 이견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 쟁점은 한국 측이 애당초 미국 측에 동조하는 입장이거나, 실제 협상장에서 "제안을 해보는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쌀도, 개성공단도 딜브레이커가 아니다
이같은 쟁점들 가운데 '쌀'은 절대 딜브레이커(Deal Breaker, 협상 결렬 요인)가 아니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2월 협상 개시를 선언했을 때부터 '한국 쌀 시장의 전면 개방은 없다'는 데 기본적인 공감대를 이뤘다. 다만 한국 측은 대내협상용으로 "쌀만은 지키겠다"는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고, 미국 측도 자국 농심(農心)을 의식해 "쌀도 협정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는 것뿐이다.
김종훈 한국 측 대표는 지난 7차 협상 기간 중 한 신문이 "정부가 쌀 품목 중 일부를 개방하려고 한다"고 보도하자 '자청해서' "쌀을 개방하라고 하면, 한미 FTA 협상을 접겠다"는 극언까지 했다. 반면 웬디 커틀러 미국 측 대표는 "한국이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아 문제"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쌀은 어떻게 되느냐'고 기자들이 자꾸 물어보니까 "쌀 시장 개방도 요구할 것"이라는 원칙적인 입장을 확인해 줬을 뿐이다.
개성공단 문제도 딜브레이커도 아니다. 한국 측은 지난 1차 협상 때부터 7차 협상 때까지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개성공단산 상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하지만 미국 측은 한미 FTA의 효력은 한미 양국 영토 안에서 생산된 재화 및 서비스에만 국한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7차 협상 기간 중 베이징에서 6자 회담이 타결된 것도 이런 미국 측 입장에 변화를 주지 못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개성공단 문제를 추후에 논의한다'는 문구가 협정문에 들어가거나, 한미 FTA가 아닌 다른 별도의 협정을 통해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한미 FTA의 공식 의제가 아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분명한 딜브레이커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선 우리 측 양보 의사가 확실해 보인다. 다만, 한국 측 농림부 장관의 '고집'이라는 변수에 의해 쇠고기 시장의 추가 개방 시기나 개방 확대 명분이 한미 FTA 협상의 이면에서 계속 조율될 것이다.
딜브레이커는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딜브레이커는 무엇인가? 딱 세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무역구제-자동차·의약품에 대한 한미 양측 간 빅딜이 잘 안 될 경우다. 하지만 자동차 세제를 변경할 채비를 마치고, 의약품에 대한 미국 측 요구를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는 우리 측 협상단의 태도로 미뤄볼 때, 빅딜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섬유-농업 빅딜에도 눈길이 쏠리고 있지만, 이 역시 협상을 결렬시킬 만큼 '뜨겁게(hot)' 부각될 것 같지는 않다.
둘째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각각 국내의 정치적인 이유로 협상을 접는 것이다. 미국은 상하 양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한미 FTA에서 최대한 자국업계의 이익을 관철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한국 역시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과 연이은 총선으로 인해 한미 FTA를 뒷받침해 줄 강력한 정치적 세력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양국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굳건해, 이렇게 될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셋째는 한미 FTA만은 안 된다고 한국 국민들이 들고 일어서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 대다수는 한미 FTA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먹고 사는 일, 특히 부동산 가격에 쏠려 있다. 물론 이는 우리 국민들의 잘못은 아니다. 한미 FTA에 대한 정부의 융단폭격식 홍보로 인해 상당수의 국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내용도 잘 모른 채 막연히 '자유무역은 좋은 것 또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상태다.
한미 FTA는 '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이미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들의 '최후의 선택'이, 그 입지는 매우 좁지만, 아직 남아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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