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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될 뻔했던 체 게바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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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될 뻔했던 체 게바라의 죽음

김영길의 '남미리포트'<213>암매장 30년만에 발굴

중남미의 전설적인 좌파혁명가 체 게바라가 죽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가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그가 최후의 게릴라 전투를 벌인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2부작 '체 게바라의 일생'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최근 쿠바출신 작가 프로일란 곤살레스와 아디스 꾸뿔은 수년 동안 볼리비아 현지와 미국 문서기록보관소 등을 추적, 체 게바라를 체포하기 위해 조직된 볼리비아정부군 수색대의 작전일지와 체에 대한 미국정부의 입장, 제거명령 등의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이 문서들은 곧 책(스페인어)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쿠바의 CMKC 라디오는 서적 출간에 앞서 이 문서내용들을 '체에 대한 CIA의 문건'이라는 타이틀로 현재 인기리에 방송하고 있기도 하다. 이 문건에는 체 게바라가 어떻게 최후를 맞게 됐는지 시간대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번 호는 이 문건에 기초해 그의 최후를 조명한 연속 기사 중 '남미의 성인으로 떠오른 체 게바라', '체 게바라, 이렇게 죽어갔다'에 이은 마지막 편이다. <편집자>
체의 시신이 공개되던 세료르 데 말따 병원의 세탁장. 바졔그란데

1967년 10월9일 오후 2시 평화롭던 이구에라 촌락이 헬기의 굉음에 뒤덮였다. 체의 체포작전을 주도했던 라파스와 바졔그란데 본부로부터 구스타보 삼페라, 훌리오 가르시아 등 미 중앙정보국 요원들과 볼리비아 정부관료들이 헬기로 속속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체의 게릴라 부대에 관한 모든 습득물과 전투상황을 기록한 보고서 등 자료들을 한데 모아 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바졔그란데 임시본부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했다.

이 기간 동안 이구에라 학교 건물 안에 방치된 체와 두 명의 게릴라 시체는 사병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와 툭툭 건드리는가 하면, 어떤 병사들은 체의 시체를 발로 차고 마구 두드리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로저 실러 신부는 체의 시체에 굳어 달라붙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몸에 뚫린 총탄자국을 하나씩 막아주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체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스러웠는가는 "이와 같은 범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신에 의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실러 신부의 절규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체의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고 최후의 기도를 올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 4시 하이메 구스만 소령은 마지막 헬기를 타고 와 체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바졔그란데로 옮긴다. 오후4시30분 바졔그란데에는 체의 사망소식을 접한 <로이터통신>, <가디안> 등 서방언론사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 교전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 거짓 발표

헬기를 통해 바졔그란데로 옮겨진 체의 시체는 대기중이던 구급차에 실려 세료르 데 말따 병원으로 보내졌다. 병원에 도착한 체의 시체는 의사들의 방역절차를 거쳐 이 병원의 세탁장 위에 안치됐다.

모든 작전은 미정보국 요원들의 지시에 의해 진행됐고, 이들은 병원의 간호사들에게 체의 시체를 깨끗하게 보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9일 밤 간호사 수사나 오시나가와 가르시엘라 로드리게스가 체의 시체를 닦아내고, 당직의사였던 호세 마르띠네스와 모이세스 바띠스따는 체의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요원들에게 넘겨주었다.

1967년 10월10일 오전, 체의 시체는 말따 병원의 세탁장 위에 전시되어 기자단에 공개되고 센떼노 아나자 대령 주재로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이 마련됐다.

아나자 대령은 "체가 8일 뻬드로 뻬냐 협곡전투에서 교전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기자단의 의혹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일부 기자들은 이미 이구에라 지역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체가 공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나자 대령은 이를 추궁하는 기자단의 질문공세에 모순된 대답으로 일관해 기자단의 빈축을 샀고, 체가 살해됐다는 의혹을 더욱 부추기게 된 것이다.

체의 사체 처리를 놓고도 미국과 볼리비아는 첨예한 대립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요원들은 체의 머리를 잘라 미국으로 보내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체의 신원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처형한 체가 진짜 체인가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또한 미 정보요원들은 더 이상 기자단의 의혹이 확대되는 것과 혁명잔당들의 시체 회수시도 등을 막기 위해 가급적이면 신속하게 체를 화장해 흔적을 지워버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볼리비아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체의 출생지인 아르헨티나 지문 감식전문가들에게 체의 신원확인을 요청하는 긴급 협조전문을 보냈다.
1997 712일 쿠바 산 안또니오 공항에 도착한 체의 유해. 쿠바정부

11일 라파스 현지에 도착한 아르헨티나 연방경찰 전문감식반은 감식장비 운송 문제와 신변안전 등의 이유를 들어 체의 시체를 라파스로 이송해줄 것을 요구했다. 공개적으로 체의 사인을 밝혀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바졔그란데 본부는 체의 사체를 라파스로 이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체의 손목을 잘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라파스에 도착한 아르헨 지문감식전문가들에게 보내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차단했다.

아르헨 수사전문가들로부터 체의 손목이 확실하다는 감식소견서를 접한 볼리비아 정부는 체의 손목을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보냈으며, 카스트로가 자신의 혁명 동지였던 체 게바라의 손목을 받아 본 건 그 해 10월15일이었다.

당시 볼리비아 군과 관료들은 상부로부터 체의 사체를 더 이상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체의 동생인 로베르또 게바라가 체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또 게바라는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인지도가 아주 높은 변호사였다. 그는 아르헨 군부를 움직여 볼리비아 정부에 체의 시신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말 것 등의 압력을 넣는 한편 자신은 라파스 현지로 날아가 체의 시체해부를 거부하고 정확한 사인을 밝혀줄 것을 볼리비아 정부에 청원한 상태이기도 했다.

'증거인멸' 위해 화장 시도

다른 한편에서는 체의 시신을 최초로 부검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던 세료르 데 말따 병원 의사들을 주축으로 체의 사망 원인에 대한 공개적인 부검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체가 교전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 운동은 중남미 전역의 의사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체의 사인을 정확히 밝히라는 성명서와 항의서가 쇄도했다. 볼리비아 정부로서는 안팎에서 압력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체의 사인을 밝히려는 운동이 사방으로 확대되자 볼리비아 군은 증거인멸을 위해 10월11일 오전 바졔그란데 연대로 체의 사체를 옮겨 민간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때 볼리비아 군부와 미 요원들은 체의 사체를 화장하기 위해 4통의 기름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볼리비아 정부의 외교관료들은 바졔그란데에 모인 서방기자들과 주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화장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거라며 은밀한 매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에 따라 안드레스 셀리츠 대령의 지휘로 다른 게릴라들을 매장하기 위해 바졔그란데 군부대 주변에 파놓은 구덩이에 체를 급히 매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은밀히 매장된 체의 유해가 가까스로 발굴되어 쿠바로 옮겨진 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7년 7월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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