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3차 협상이 첫날부터 의약품 문제로 삐걱거린다는 소식이다. 미국 측이 싱가포르 협상에서 넌지시 비추기만 했던 '의약품 특허기간 연장' 요구를 이번에 공식으로 제기한 탓이다. 미국 측은 또 한 번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특허기간 연장 요구를 한국 협상단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미국 측에서 3차 협상도 결렬시킬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특허기간 연장…이미 체결된 다른 FTA엔 미국 요구대로 반영돼
한미 FTA 3차 협상에서 미국 측이 '의약품의 특허권 강화'를 요구하리라는 것은 이미 지난 8월 21~22일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별도 협상 때 예고됐다. 한국 정부도 싱가포르 협상 후 공식 발표를 통해 "의약품 관련 특허 문제는 (한미 FTA 3차 협상에서) 지적재산권 분과와의 합동회의를 통해 논의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미국 측이 요구하는 특허권 강화의 핵심은 현재 20년으로 돼 있는 특허기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국 측은 신약에 대한 심사·승인 기간, 특허 신청에 걸리는 기간 등을 특허기간의 연장으로 보상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간을 보상하면 현재 20년인 특허기간이 길게는 3년 더 늘어나게 된다.
이미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FTA를 맺으면서 이와 같은 사항을 관철시켰다. 특허기간이 연장되면 국내의 제약업체들이 복제약(제네릭)을 만들 수 없는 기간이 그만큼 더 늘어나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국내 시장에서 올릴 수 있는 독점적 이윤이 더 커진다. 특허기간이 연장되는 신약의 개수가 10개라고만 해도 연간 1000억 원의 독점이윤이 추가로 보장되는 것이다.
2003년에 특허가 만료된 화이자의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의 예는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특허가 만료된 후 국내 제약업체의 복제약이 쏟아져 나와 이 약의 시장 점유율은 66.5% 수준으로 떨어졌다. 만약 특허기간이 연장된다면 노바스크를 생산하는 화이자는 연간 400억 원의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자료 독점권 요구하면 5년 간 수천억 원 독점이윤 보장
미국이 신약에 대한 다국적 제약업체의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또 다른 요구사항은 의약품에 대한 '자료 독점권'이다. 이미 지적재산권에 대한 국제 조약에서는 새로운 화학물질을 이용한 의약품의 판매 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된 자료를 마음대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한 술 더 떠 이 자료의 이용을 한시적으로 금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가 특허가 만료된 다국적 제약업체 약의 복제약을 생산하기 위해 자료를 열람한 경우 5년 간은 그 자료를 이용해 복제약이나 개량약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복제약의 생산은 다시 5년 늦어지게 된다.
애초에 미국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국제 조약을 맺을 때 이런 요구를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FTA를 맺는 나라들에 쌍무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미국과 FTA를 맺은 바레인,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등은 미국과의 FTA 협상에서 이런 의약품 자료 독점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효과는 특허기간이 연장될 때와 대동소이하다. 국내 제약업체가 값싼 복제약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국민은 수년 간 다국적 제약업체가 공급하는 비싼 수입약을 복용해야 한다. 그동안 다국적 제약업체가 수천억 원의 독점적인 이윤을 보장받게 됨은 물론이다.
의약품 허가-특허 심사 연계, 또 다른 복병
미국이 특허권 강화를 위해 내세우는 또 다른 요구사항은 의약품을 허가하는 것과 특허 심사를 연계하는 것이다. 즉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의약품을 허가하는 과정에서 해당 의약품이 기존의 다른 의약품의 특허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미리 확인한 다음에 허가를 해주라는 것이다.
얼핏 정당해 보이는 이런 요구는 결국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신약에 대한 특허권을 강화하려는 '꼼수'일 뿐이다. 특허권은 '개인의 권리'이기 때문에 다른 의약품이 자사 의약품의 특허권을 침해했는지는 다국적 제약업체가 스스로 비용을 들여 조사해야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특허와 관련한 어떤 국제 조약에도 특허청과 식약청의 업무를 연계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더구나 어느 의약품이 특허권을 침해했는지는 특허청은 물론 법원조차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어려운 사안이다. 식약청이 고유 업무가 아닌 특허권 침해 여부까지 조사해야 한다는 미국 측의 주장은 결국 복제약의 시장진입 장벽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 제도의 문제점은 미국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한 미국에서는 의약품 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이 빈발하고 있는데, 그 소송의 70%가 결과적으로 특허권자의 패배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가 많은 제도를 미국은 그간 FTA를 통해 다른 나라들에 강요해 왔다. 바레인,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칠레는 미국과 FTA를 맺으면서 이런 요구를 수용했다.
비위반 제소…'이레사 전쟁' 일상이 된다
미국이 FTA를 통해 '비위반 제소'의 도입도 요구하고 있다. 이 제도는 한국 정부의 특정 정책이 미국 정부나 기업이 기대했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된다면 일단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 기준은 협정 위반 등이 아니라 순전히 미국 정부나 기업의 판단에 의존한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약값 정책이 미국 제약업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된다면 해당 기업이나 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제도는 국력이 약한 나라의 공공정책을 미국 정부나 미국 기업이 좌지우지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그간 국제 조약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제도는 놀랍게도 한미 FTA 협상 지적재산권 분야의 미국 측 요구사항에 버젓이 들어가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태는 이미 현실로 벌어졌다. 지난 7월 18일 복지부가 8월부터 이레사의 가격을 현행 6만2010원에서 5만5003원으로 인하할 것을 결정ㆍ고시한 뒤 이 약을 판매하는 아스트라제네카가 즉시 반발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행정법원은 결국 7월 28일 아스트라제네카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약값 인하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아스트라제네카의의 소송 때문에 이제 환자와 국민은 지루한 법정 소송이 끝날 때까지 비싼 약값을 계속 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비위반 제소는 바로 이런 상황이 특정제품과 관련한 가처분 신청이 아니라 정책 자체와 관련한 제소를 통해 일상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한국만 예외?…미국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등은 7일 "미국은 의약품 '선별 등재(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을 받아들인다고 해놓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 리스트에 올라 있는 약품을 보호하라는 요구를 하는 등의 태도로 새로 도입될 제도를 정면 거부하고 있다"며 "3차 협상에서도 마치 선별 등재 방식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특허권 강화와 같은 요구를 관철하려 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들은 "웬디 커틀러 미국 측 협상대표는 한미 FTA 협상이 주고받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실제로 FTA 협상이 진행될수록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국민의 건강권을 포기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가장 지혜로운 길은 한미 FTA 협상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강조하고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정부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본질을 흐려도 결국 의약품 협상에서 미국은 특허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요구를 관철하려 할 것"이라며 "미국이 FTA를 체결한 모든 나라에 대해 관철한 것이 한국만 예외로 비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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