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보살핌 노동'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보살핌 노동'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4, 끝)

여성노동자들의 지위가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없는 주된 이유는 성별 노동분업의 유지에 있다. 이것이 바로 낸시 포브르(Nancy Folbre)가 저서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The Invisible Heart)》에서 주장한 바다.
  
  늘 저평가되는 보살핌 노동의 가치
  
  포브르에 따르면 성별 노동분업으로 인해 보살핌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늘 저평가된다. 유급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보살핌 노동이 점점 더 시장의 손에 맡겨졌지만, 여전히 여성이 계속 맡아 하는 무급노동이 시장의 보살핌 노동의 부족분을 상당부분 보완하고 있다. 포브르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의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보살핌 노동은 시장에서 구매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에 비교해 30%에서 60% 사이 어딘가에 해당한다.
  
  포브르는 또한 보살핌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노조를 조직하더라도 결국에는 보살핌 부문이 아닌 다른 비슷한 직종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보다 낮은 급여에 머물게 된다고 주장한다. 보살핌 분야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게 되더라도 업무의 특성 자체가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업을 비롯한 쟁의행위라는 수단을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부류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개인적 역량도 모자라고 노조도 결성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또 교육수준이 높지 않고, 전통적으로 여성이 종사해 온 직업 이외의 다른 직업을 구할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직업은 계산원, 할인점 직원, 식당종업원 등이며, 주로 사회적 힘이 따르지 않는 직종들이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언제든지 쉽게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는 인력으로 취급되며, 이런 분야는 노조조직률도 낮다. 주로 여성이 근무하는 직업들의 노조조직률은 평균적인 노조조직률에 못 미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개인화된 차원의 해결책도 택할 수 없고, 노조결성 같은 집합적 노력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개인화된 차원의 해결책이 지닌 한계
  
  더 나아가 개인화된 차원의 해결책이란 이 부류의 여성들에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핵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월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1950년대에 포드자동차의 생산직으로 일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급료와 기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월마트 계산원과 같은 직업을 '괜찮은 일자리'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직업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집합적 조직화'가 필요하다. 한때 나쁜 일자리로 통했던 자동차 산업의 생산직이 고임금이며 혜택도 많은 일자리로 바뀐 것도 바로 집합적 조직화를 통해서였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여성노동자들이 개별화된 전략보다는 집합적 전략을 통해 보다 많은 혜택을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집합적 접근만으로는 여전히 그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선 단기적으로 볼 때 집합적 전략은 직업의 질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뿐 계급상의 위치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다. 심지어 여성이 주로 일하는 직종 전체에 걸쳐 노조조직률이 높아진다고 해도 우리가 계급경제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고용주로부터 착취를 당할 것이며 자기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아울러 임금과 직업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집합적 접근방법이 일하는 여성들의 실제 삶에 미칠 수 있는 효과 자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접근방법은 노동의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비시장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에 대해서도 집합적 해결의 노력이 요구된다.
  
  시장화 속에서 더욱 개별화된 여성의 삶
  
  여성의 시장진입 가능성을 개선하고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의 질을 높이는 일이 개별 여성에게 혜택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여성들 사이에 보살핌 노동을 단순히 재분배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요한나 브레너(Johanna Brenner)와 바버라 라슬렛(Barbara Laslett)이 주장했던 대로, 권력과 각종 자원뿐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의 조직 전체도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 기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별 노동분업과 같이 사회적 재생산이 구조화된 방식은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수준을 좌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살핌 노동이 시장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는 것은 가사 일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이나 가족에 떠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 노동분업은 이런 책임의 대부분을 여성들이 떠맡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이런 현상은 사회운동의 상태에 좌우되는 가운데 특히 계급과 인종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진보의 시대'로 불리는 1910~1920년대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같은 시기에는 강력한 여성운동이 존재했다. 여성운동은 성별 노동분업에 도전했고, 대부분 중산층인 백인여성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화하고 스스로를 동원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재생산의 대부분이 민영화돼 시장으로 넘어갔고, 부모들은 아이를 돌보는 일을 포함한 보살핌 노동을 직접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됐다. 이런 현상은 여성들의 삶을 더욱 개별화했고, 여성들이 어떤 종류로든 스스로 조직화하고 집합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여지를 차단해버렸다.
  
  물론 이 글에서 우리가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경험들을 묘사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물적 조건들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삶에 있어서 사회적 재생산 구조 외에 '생산'도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대부분 고용주 또는 정부가 여성들을 집 밖의 일터로 적극적으로 끌어낼 때였다. 대표적인 예가 1800년대 초 로웰(Lowell) 섬유공장이 농촌 여성을 대규모로 모집했던 것과 2차 세계대전 때 방위산업체들이 여성을 고용한 것을 들 수 있다. 여성들은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을 자신들이 노동시장에서 겪게 되는 경험에 상당한 변화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아래에서 그런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기존 노동계급 여성운동의 한계
  
  이와 같은 현실은 여성들의 자기 조직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여성들이 앞으로도 계속 작업장의 차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노동계급 여성운동의 한계가 곧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작업장의 차별에만 초점을 맞추는 투쟁은 '시장이 모두에게 생계임금을 보장'할 수 있고 '시장이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보다 인간적인 해법을 보장'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투쟁은 여성노동자들에게 평등한 시장 접근권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성과 노동 문제에 관련된 사안을 다루는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결국 이런 틀을 인정하는 내용의 정책을 촉진할 뿐이다. 이런 단체들은 여성이 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 기회를 늘리는 일과,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아동양육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실현하는 일 등을 추진한다. 이보다 의미 있는 일로서는 고용주가 여성의 '인적자본'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들은 여성이 노동계급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늘려주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최선의 결과는 개별 여성노동자가 자신의 계급을 완전히 등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운동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핵심적인 요소로서 계급 시스템이라는 것이 노동자와 고용주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또 그런 투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지속가능한 생계임금과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생계임금을 제공하는 직업을 놓고 노동자들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와 인종별 억압체계는 그런 직업들이 분배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시장 접근권에 근거를 둔 개별화된 해결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성에게는 계급에 기반을 둔 해결책도 필요하다. 사실 개별화된 해결책은 많은 여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다.
  
  삶의 재구성과 보다 폭넓은 계급적 기반을…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여성들 개개인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여성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확보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기회를 갖고,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소수의, 아니 대부분의 여성이 성공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 일부 여성들이 자신의 계급을 등지고 떠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나머지 여성들이 뒤에 남겨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관리를 받는 사람을 두지 않은 관리자가 있을 수 없고, 패자 없는 승자도 없다. 누가 패자가 되는가?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는 이들은 노동계급과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과 유색인종일 것이다. 게다가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음으로써 '승자'가 된 여성들도 대부분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얻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타인을 보살피거나 스스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승리'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에도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는 패배한 여성들은 물론이고 승리한 여성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새로운 모형'을 추구하며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여성운동일 것이다. (번역=추선영 번역가, 이주명 기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