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연이은 연정 제의와 관련해,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한국일보의 고정컬럼 '손호철의 정치논평' 2005년 9월 6일자 게재분을 확대발전시킨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손 교수는 이 칼럼에서 '연정을 하느니 차라리 한나라당과 합당을 하고 이 보수대연합 거대정당과 민주노동당이 경쟁을 하는 본격적인 진보 대 보수의 정치구도로 나가도록 하라'는 취지의,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독자들이 현재의 정치구도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결국 '화두'는 만들 수 있다**
노 대통령이 결국 일을 저지를 모양이다.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와 이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에 올인 할 것을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노 대통령이 처음 지역주의 타파와 이를 위한 대연정을 제의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그 뜻의 진정성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진정성과는 별개로 그 제안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에서 이에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프레시안 2005년 7월 29일자 기고문 "노대통령, 삼성 구하기에 나섰나?" 참조). 그리고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다수, 나아가 열린우리당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처럼 노 대통령이 외통수를 두고 나서니 당혹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노대통령이 이처럼 배수진을 치고 나선 이상 선거제도 개혁이 앞으로 중심적인 화두로 떠오르게 됐다. 답답한 일이다. 물론 현재의 선거제도는 과거의 전국구 제도 등이 위헌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이 나오자 사표를 줄여 표의 등가성을 확보해 나가면서 기존의 보수정당 체제에서 대표되지 못 됐던 유권자들을 대표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대폭 확대하라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정치권이 타협적으로 수용해 만든 절충적인 제도로 문제가 많다. 또 지역주의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인 만큼 이를 개선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 민주개혁 과제들, 그리고 그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등 시급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해 이 문제로 한나라당과 사생결단식 내공 대결을 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가 든다.
그렇지만 결국 노대토령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 의해 열린우리당이 선거제도 개혁안을 국회에 상정하고 선거제도 개혁 문제가 중심화두로 제기된다면 현재의 절충적인 선거제도를 지역주의, 사표에 따른 비대표성 등 선거제도를 둘러싼 문제들을 전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역주의가 하도 답답해 개인적으로 대구 국회의원은 광주 시민이 뽑고, 광주 국회의원은 부산 시민이 뽑는 식의 교차투표제라는 극약처방을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하도 답답해 생각해본 것일 뿐 결국 여러 면을 고려할 때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많은 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지를 표명해 온 '독일형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의하며 그동안 줄곳 주장해 온 중대선거제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중대선거제는 너무 문제가 많은 시대착오적인 제도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정치권에서 선거제도 개혁이 논의된다면 이번에는 독일식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선거제도를 바꿔서 국회의원 의석이라는 면에서 지역주의가 약화되게 만들더라도 밑바닥의 지역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어 무늬만의 탈지역주의로 끝나고 만다면 문제는 반쪽밖에 해결한 것이 아니다.
***대연정은 오히려 지역주의 자극할 위험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려되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노 대통령이 제의하고 있는 대연정론이 갖고 있는 함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대연정이 오히려 지역주의를 자극할 가능성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역주의는 이를 대신할 강력한 정치적 균열구조가 존재할 때 맥을 쓰지 못 하며, 우리가 지역주의를 아무리 비판해도 이를 대신할 다른 정치적 대치구도가 생기지 않는 한 지역주의는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하고 80년 전두환 일당이 광주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지역정당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민주 대 반민주라는 압도적인 대립구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의가 전면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양김이 분열하고 민주화의 효과로 이 구도가 깨지자 지역주의가 전면화됐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1987년 이후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한국정치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깨졌지만 반공주의, 3김 정치 등으로 인해 서구와 같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정당 간의 이념적 차이가 너무 적어 같은 값이면 우리 지역정당을 뽑자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얼마 전 프레시안이 잘 소개한 바 있듯이(전홍기혜 기자 "노, 무얼 위해 지역구도를 극복하고자 하나?", 2005년 7월 29일자)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가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당간 이념적 거리가 커져서 이념적 차별성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문제는 대연정을 할 경우 가뜩이나 별로 없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이념적 차이가 더욱 없어져 차별성이 지역밖에 남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차라리 합당해 '열린한나라당' 대 '민주노동당'의 구도로 가라**
따라서 연정보다는 차라리 합당을 하는 것이 낫다. 한나라당과 '보수대연합'(가능하다면 민주당까지 포함해)을 해 일본의 자민당과 비슷한 거대보수정당을 만들고 이에 민주노동당이 대립하는, 서구식의 본격적인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로 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두 당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작명을 해준다면 '열린한나라당'이나 '한나라우리당'이 좋을 것이다). 즉 1955년에 만들어져 일본 전후 질서를 대표하는 55년 체제(자민당 대 사회당, 공산당) 처럼 거대보수여당 대 군소진보정당의 경쟁구도로 시작해 서서히 보수 대 진보가 균형을 이루는 유럽형으로 변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실 좌파 정권이라는 냉전세력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진보세력이라기보다는 한나라당의 냉전적 보수에 대립되는 개혁적 보수 내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다. 또 이라크 파병,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 등이 보여주듯이 여러 면에서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다. 이 점에서는 대연정을 제의하며 그 이유로 두 당 간의 차이가 실질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 노대통령의 지적이 맞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가보안법 등 냉전을 둘러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도 그 차이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지만) 신자유주의 등 다른 큰 정책적 노선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도 국회의 주요법안들이 두 당의 타협과 절충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바 이것과 두 세력이 합당해 한 당에서 의원총회를 통해 절충해 타협안을 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어쩡쩡한 연정보다는 합당을 통해 본격적인 보수 대 진보의 정치구도로 나아감으로써 지금처럼 부자건 가난뱅이건, 같은 지역이면 무조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초계급적 지역연합'을 호남이건, 영남이건 부자와 보수세력은 보수정당을, 노동자와 진보세력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초지역적 계급연합'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역주의를 깨는 비결이다. 결국 선거제도의 개혁이라는 그릇만 만들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나 그 그릇을 채울 내용까지도 이처럼 바꿔줄 때 지역주의는 해체될 수 있을 것이다. (허긴 이같은 복잡한 분석이 필요없이 호남과 영남의 지지지반을 갖고 있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나아가 민주당이 한 당이 되는데 무슨 지역주의가 있겠는가?)
***노 대통령의 '마지막 봉사'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한국정치가 안고 있던 딜렘마는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국민들이 지역을 넘어서 자신의 근대적인 계급, 계층적 이해관계와 이념에 의해 투표하는 진보 대 보수로 나가는 것이지만 역으로 한국정치가 진보 대 보수로 나가는 데 가장 큰 장애 역시 계급, 계층적 이익과 이념을 떠나 지역적으로 투표하는 지역주의라는 악순환이었던 바, 노대통령이 합당을 통해 한국정치를 본격적인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만들어준다면 이 같은 악순환을 깨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대통령이 말한 조국과 민족을 위한 노대통령의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곧 있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대연정을 제의하느니 차라리 합당을 제의해야 한다. 문제는 이 같은 제의에 한나라당이 응할 것이냐는 것이지만 이는 연정도 마찬가지다. 노대통령의 마지막 봉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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