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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꼭 다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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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꼭 다시 산다"

[기고] 새만금 끝 물막이 공사를 보면서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친구가 있다. 몇 년 전, 새만금 간척 사업을 취재할 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다니는 건설회사가 새만금 방조제의 한 공구를 맡고 있기도 했다.

좋은 내부자료 없냐고 했는데, 친구가 약속 장소에 들고 온 것은, 흔해빠진 대외용 문건이었다. 고향 친구의 부탁인데 너무 성의가 없네, 하고 나는 못마땅했다. 그런데 친구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넌 왜 되지도 않을 일에 힘을 쓰고 사냐.

우리는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논쟁을 벌였다. 친구는 말했다. 대학 졸업반 때 시화 방조제에 견학 갔다, 난 전율했다, 망망대해에 저 거대한 방조제, 우리나라 토목기술에 경탄했다,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감동했다.

마을에서 같이 뛰놀며 자랐는데, 언제부턴가 생각이 달라져 갔겠지만, 같은 것을 보고 이리 다르게 느끼다니!

그 놀라운 방조제 때문에 시화호가 썩어버리지 않았냐고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자들은 잘못이 없다, 안산공단 쪽과 관할 공무원들이 오폐수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그렇다, 토목공학자들은 맡은 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친구의 아주 얄미운 대답이었다.

***다른 이유로 새만금에 '전율'한 두 사람**

세월이 지나, 친구가 해준 여러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전율 운운이다. 언젠가 새만금 전시관의 한 모퉁이에서 바다와 방조제를 바라보고 섰을 때,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도 비슷한 당혹감을 느꼈다. 방조제의 규모에 하나같이 놀라면서 "저렇게 큰 게 이미 들어앉았는데, 어떻게 공사를 중단하느냐" 하던 것이다.

참 이상하다. 새만금 갯벌에 처음 갔을 때, 나도 전율했었다. 그런데 방조제가 아니라, 방조제 완공 후 안쪽의 엄청난 갯벌을 어떻게 흙으로 덮고 논을 만든다는 말이냐, 하고 갯벌의 방대한 규모에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이 감각적 인식의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친구와 나의 경우, 둘 다 시골 출신이고, 논과 강과 들을 보며 자랐지만, 사회에서 맡은 바 일이 달라지며 차이가 생겨났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나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글을 쓸 거야' 작정하고 부안에 갔기 때문에 방조제보다 갯벌만이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친구는, 시화호에 갔을 때 대학 졸업반이었고, 토목공학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제 곧 자신도 선배들이 성취한 것과 같은 과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였으니 눈앞의 방조제는 토목공학의 놀라운 상징이자 자기한테는 손에 잡힐 듯한 가능성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문학과 문학의 자리에 있는 내게는 방조제가 직접 경험할 일이 없는 다른 세계의 기술과 노동이었다.

친구와의 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2~3년 전 건설회사에 사표를 냈다. 다른 작은 업체로 옮겼다. 거대 조직에서는 일의 보람을 느끼기 힘들고, 또 애써 일해 봤자 현장 인근 주민들한테 좋은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전공 분야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도래할 생태사회에도 토목인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다. 복원을 위해서도 그들이 팔을 걷고 나서야 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현격한 감각의 차이가 있고, 친구와 가까워지는 일이 쉽지 않다. 감각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생활이 달라져야 하고 인생 전체가 달라져야 한다. 생활과 인생이 달라지려면, 뜻있는 인연과 사건을 경험하고 스스로 의식을 바꾸려는 개인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와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 이 얼마나 난망한 일인가.

***아, 대법관들이 조금만 미래를 밝게 내다봤더라면!**

세상이 달라지는 일은 그러나 의외로 쉽게 올 수 있지 않을까. 동시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충격을 받는 대규모의 환경재앙이 발생할 때다. 사실 그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환경재앙은, 말 그대로 충격적인 재앙이 되려면, 상당한 인명 피해도 수반하기 마련인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그랬겠지만,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내가 집착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대법관 13명이, 말이 대법관이지 어쨌거나 한 사람 한 사람, 즉 '사람 13명'이 조금만 미래를 밝게 내다보며 뜻을 모으기만 했다면!

나는 정부가 나서는 것보다 대법원이 '사고를 치는 것'이 훨씬 쉬운 일로 보였다. 정부의 의사결정은 방향 전환의 초기부터 밖에 알려질 테다. 수많은 보수언론과 관련 업계에서 절대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반면 재판은 한순간 판결문을 내놓고 바로 그 순간 끝인 것이다. 그 한순간의 판결문 낭독 전에는 누구도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다. 대법원이 가진 상징이 있고, 그들이 새만금간척사업의 어리석음을 백일하에 드러낸다면, 그 충격과 여파는 엄청날 것이었다.

대통령과 국회가 통과시킨 행정수도 특별법을 위헌이라고 판시한 헌법재판소의 기개(?)를 나는 이미 보았었다. 아무리 기득권 세력의 행위를 거의 언제나 추인하는 보수적인 대법원이라 하더라도, 늙은 그들도 손자 손녀가 있을 테고 그 아이들이 한국 땅에서 먹고 자라고 살아야 하니, 최소한의 건강한 상식만 가지고도 옳은 판결을 내놓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판결문이 낭독된 2006년 3월 16일 오후 2시를 잊지 못한다. 재판 날이 다가올수록, 13명의 대법관은 내 마음 속에서 거인이 되어갔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존재들, 그들은 나의 주관적인 희망 속에 새만금 갯벌보다 더 거대해졌다. 그런데 내 마음 속의 거인들은 일시에 주먹만 한 크기의 못난이 늙은 인형이 되었고, 점점 더 작아지더니 곧 먼지 열세 톨이 되고는 휙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들이 남기고간 종이 한 장, 나는 불태워 버렸다.

나는 주먹을 쥐고 허공에 흔들었다. 대법관 어느 누구라도 내 앞에 한 시간만 앉혀 놓아라! 논리와 판단력을 박살내겠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가 그들 중 한 명을 무명작가 앞에 앉힐 수 있으랴.

새만금 간척 사업에 반대를 한 대법관도 있었지만,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나라면, 선고일에 칭병을 해서라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생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데, 어떻게 배석 추인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새만금 주민들의 활약을 그렇게 바랐건만**

13명의 늙은 인형 같은 건 이제 다 잊어버렸다. 나는 다시 진정한 현실 앞에 선다. 바다가 있고 새만금 갯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진정한 거인들이다.

방조제가 막혀가는 동안, 물이 이상해졌어, 갈수록 힘이 떨어져 가네, 그래도 우리,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합시다, 갯벌 생명붙이들의 변함없는 움직임이 보이고 속삭임이 들려온다.

다시 한 번, 나는 믿을 수 없다. 종이 한 장에 쓰인 단어 몇 개가 갯벌과 생명붙이들을 결정적으로 몰살시킨다는 사실이. 종이 한 장을 읽는 일, 대체 어떤 일인가. 사람들을 끝없이 어리석게 만드는, 잘 고안된 퍼포먼스일 뿐이지 않았을까.

갯벌 지근거리 민중은 그러나 이제라도 어리석지 않은 것도 같았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날, 방조제로 배를 타고 달려간 행동이 그것을 말한다. 가장 똑똑하고, 또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저거 막힌다, 갯벌이 죽는다, 십여 년 동안 들어 왔지만, 정말 막힐 줄이야, 정말 막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다. 집안 어른의 임종을 예상하고 기다리기조차 하지만, 임종이 실현되자 격렬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자식들과 같다. 최후에 임박할수록 마침내 깨닫게 되는 무시무시한 진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었다. 부안 읍내가 분노의 불바다가 되었던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반대 시위만큼 대규모적인 것은 아닐 테지만, 갯벌과 바다를 누구보다 잘 알고, 방조제가 길어질수록 그 앎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 또 앎에 이어 갯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감정마저 생긴 어민들이, 사람 숫자를 넘어서서, 정말 격렬한 저항을 할 것이 틀림없다고. 그 저항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어민들보다 갯벌에 더 절실하고 더 아픈 사랑을 가진 이가 말릴 수 있겠지만, 그런 이는 한국에 없다고. 어민들의 저항에서 우리 모두는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그 저항이, 그러나 새만금 간척 사업을 포기하게 하는 데까지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예측은, 많이 틀렸다. 지역 민심은 추가보상 문제로 돌아섰다는 전언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만금 갯벌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단행됐다.

***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나는 방금 한 석간신문의 만평 하나를 보았다. <부산일보〉 손문상 화백의 그림이었다. 도요새 한 마리가 저 멀리서 "끝났다!" 하고 사람들이 외치는 물막이 현장을 보고 있었다. 말없는 도요는, 울음소리뿐인 도요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도요 한 마리만 보면 그저 평온한 분위기다. 먹을거리가 이 시각, 눈앞에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벗은 새, 벗은 민들레도 하느님이 내일 걱정 없도록 먹인다 하셨지만, 그 말대로라면, 도요는 머잖아 다른 데 다른 먹이를 찾을 것이다. 인간의 짓거리가 있고, 아름다운 자태로 도요는 오늘 갯벌 위에 서 있었다. 정확한 리얼리티에 나는 아프게 감동했다.

물막이는 끝났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보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 중요하다. 진실의 승리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또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의 경우,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지금도 설계를 하는 친구와 내가 진심어린 악수를 하는 일이 간절하다. 가능할까.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 사회가 새만금 갯벌의 의미를 깨우칠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새만금 갯벌의 의미는, 결국 새만금 갯벌이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지금 강물이 오염돼 있으니 새만금 담수호는 썩을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아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물이 맑았을 고려 시대에 하늘에서 33km짜리 자(尺)가 하구에 떨어져 거대한 담수호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썩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을까? 강 하구 갯벌은 산, 들을 지나 흙과 바위를 씻어 온, 영양물질이 많은 물을 정화하는 거대한 필터다. 물의 정화에 하구 갯벌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산호, 시화호가 썩었고, 이제 새만금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선연히 보인다. 담수호가 혼탁해지더라도 물론 공단 측은 모니터링의 수치를 보수적으로 해석하거나 참상 자체를 숨기려 들겠지. 그러나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피할 수 없고, 결국 방조제는 완공되었어도 내부 개발을 중단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한 규모의 갯벌이라 내부 간척사업을 완료하지도 못하고 다시 방조제를 트는 일이 올 것이다. 방조제가 바닷물을 확실히 차단하고 있어야 내부에서 방조제를 더 잘 틀 수 있기에 방조제를 트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그래서 한국 국민이 세계 간척사에 유례없는 이 어리석은 사태를 계속 지켜보고 적시에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뜻있는 사람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낙관한다. 내부 간척사업의 진척보다 환경의식의 성숙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남은 일은 새만금 갯벌 생태계 복원 공사. 그때 토목공학자 집단 일부에서나마 회심이 일어나겠지. 청계천 복원은 서울 사람들만의 축제였지만, 새만금갯벌 복원사업은 온 국민의 축제가 될 것이다. 나는 고향 친구에게 회심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그때 우리는 진심어린 악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다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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