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왕이 너무 많아 문제예요. 노무현, 이명박, 이해찬, 박근혜… 이 분들 하는 말 가만히 들어보면, 다 왕들 아닙니까?" 황제골프, 테니스를 일러 문득 내가 비아냥거렸을 때다.
"아니에요. 우리 모두 왕이에요. 노숙자도 왕이에요." 하고 이재심 씨가 바로 반박했다. "교회에서 주일마다 돌아가며 노숙자 점심 한 끼 대접하는 게 있어요. 제가 배식을 하러 갔죠. 기자가 와서 사진을 찍으니까 노숙자 한 명이 발딱 일어나는 거예요. 야, 누가 사진 찍으랬어! 너 죽여 버릴 거야!"
한국사회의 공인된 '왕'이라 해도 기자에게 대놓고 욕설과 명령을 하지 못할 것이다. 왕도 못하는 행위를 노숙자가 한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자존심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은평 뉴타운 재개발지구에 포함돼 마을을 통째 잃을지 모르는 한양주택 주민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재심 씨는 '한양주택 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주민 류동희 씨는 군에서 연대장으로 예편한 사람이다. 올해 70세 노인. 집 마당에는 예술 작품 같은 그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구석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에 계속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을 해주면 좋은데, 근데 사업을 해야 하니까 너희는 나가! 이러고 있어요. 그럼 국가가 왜 있냐고, 국가가 뭣 땜에 있는 거냐고. 국민을 위해 있는 국가인지, 특정계층을 위해 있는 국가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주민을 설득해야 해요.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동의해 달라고. 그런데 설득은 하지 않고 우리가 사업 하는데 너희가 뭔 잔소리야, 하는 식이요. 아주 불쾌해요. 이곳 주민들이 투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조용하게 살던 사람들이거든요."
***생존권만큼 중요한 자존심이 있다**
2년 넘게 골머리를 앓아온 한양주택 주민들은 강북 뉴타운 사업이 '행복추구권'과 '거주ㆍ이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까지 냈다. 그런데 믿었던 인권위도 주민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난 3월 15일, "뉴타운 사업이 '도시개발법'에 의한 공청회, 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도시개발법' 및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한 공고 등 광범위한 주민 의견 수렴 및 동의 절차를 거쳤다"며 주민들의 진정을 기각해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재산이 어디 가서 불법으로 만든 거예요? 등기소에 등기 하고 세금 다 내고 정당하게 산 집이요. 지금도 나는, 지가를 조사하고 얼마 보상해주고 이주 대책은 어떻게 세웠다는 건지, 잘 몰라요. 서울시 공무원들은 공문만 내보내고 앉았어요. 개별 통지를 하는 것이, 물건지조사를 받으시오, 시에 협조하시오, 도장 찍으세요, 하고 겁을 주면서 주민들 뒤통수를 치고 있어요."
인권위는 분명 '광범위한 주민 의견 수렴'이 있었다고 했다. 공청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소상한 설명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1차 공청회는 주민들의 반대로 열리지 못했고, 2차는 단상을 인의 장벽으로 둘러싸고 단 한 명의 주민에게 발언기회를 주고는 공청회를 끝냈다는 것이다. 최근 뉴타운 개발주체인 SH공사(前 도시개발공사) 측에서 (보상금과는 별개로) 합의하면 42평, 계속 거부하면 27평 분양권을 준다고 통고해 왔는데, 이 역시 설득이 아닌 협박에 가깝다.
"재개발 사업에서 관례가 돼 있는 게 싸게 매수해서 비싸게 파는 것이잖아요. 이 지역은, 아파트 입주권을 받아도 전매를 못해요. 전매 이익을 취하면 국가가 환수해요. 너희들 들어와, 빚을 내서라도 우리 아파트에 들어와, 이런 형편이에요. 개발 계획에 동의한 주민들도 있긴 합니다. 근데 저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실사하고 보상하고 우리 좀 나가게 해 달라' 하고 있단 말이지. 내가 '당신 얼마 받기로 했소?' 물었어요. 그건 잘 모른대요. '그것도 모르면서 당신 재산을 남한테 내주는 거요? 자기 재산을 팔면서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제발 팔아줘, 팔아줘,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머리가 이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안 그래요?"
류동희 씨는 인권위의 결정을 매섭게 비판하기도 했다. 인권위의 결정이 어떻게 나올지 다들 기대가 컸을 테다. 마을 중앙에 있는 한양주택 대책위 천막의 분위기는 그러나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아줌마들 수다에는 웃음꽃이 자주 핀다. "기가 하나도 안 죽었네요?" 살짝 물으니까 주민 김소양 씨가 흥 한다. "인권위가 뭐라고요. 무슨 절대적인 판정을 내리는 곳도 아니고요."
인권위 결정문은 '거주ㆍ이전의 자유'는 소상하게 논했지만, '행복추구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지만, 이제 와 따지기도 싫다는 김소양 씨는 이재심 씨의 '노숙자도 왕이다'와 뜻이 통하는 말을 내게 해주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겠다고 하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을만의 특성이 있어 그래요. 주민들이 원래 약삭빠르지 않은 분들이지만, 단독주택이라 해도 띄엄띄엄 들어서 있으면 뭉칠 만한 공통의 것이 없으니까 재개발 한다고 하면 다 나가버리죠. 한양주택은 잘난 집이 하나도 없고 다 1층집이고, 또 개발되는 것보다 마을을 지키는 것이 경제적 이익 면에서도 낫다고 판단을 하는 거예요.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 지정 신청을 하니까 저쪽 사람들(어떤 이유에서든 개발에 동의한 주민 : 필자)이 행패 부리는 거 보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해요. 온갖 욕을 들으며 술 취한 사람들과 싸우다가 대책위 천막에 들어오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 회의가 목까지 차올라요. 그런데도 포기하기 힘든 것은 스스로 세운 자존심 때문이에요. 남아 있는 분들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 싸워온 것이 아깝고, 우리가 너무 옳은데 서울시와 SH공사의 횡포에 뜻을 굽히려 하니까 자존심부터 상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생존권만큼 자존심이 중할 수 있다. 인간의 품위랄까, 인간다움을 유지하게 해주는 '내면의 자유'에서 자존심이란 밑받침을 뺄 수 없다. 이재심 씨가 말한 노숙자의 자존심은 본능적인 것이고, 한양주택 사람들의 자존심은 본능적인 것에 더해 올바른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온 데서 나오는, 보다 귀한 자존심이다.
***한양주택 주민들의 저마다 다른 200가지 '행복'**
주민들은 270일 넘게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해왔는데, 덕분에 한국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한다. 한 아주머니의 말.
"개발하면 이익이 있지 않느냐, 따지듯 말하면, 저는 싸워버려요. 당신이 직접 처해 있지 않으면서 함부로 남의 동네를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말라고. 시청 앞에서 사람들 대하다 보면, 젊은 사람들은 마을이 참 좋다, 하면서 서명을 잘 해줘요. 연세가 있고 서민적인 사람들은 개발하면 돈 받고 좋을 텐데 왜 이러냐고 하고, 연세가 있지만 정치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동네에 개발 왜 하냐고 하고, 지체가 좀 높은 양반들은 나라에서 하는 건데 되겠냐고 해요. 한참 이야기하다가 이상한 데로 빠지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노무현과 어떤 관계에 있고 돈을 받을 게 있는데 내 돈을 누가 가져갔다느니,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죠.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들이 최고예요. 제일 공감을 잘 해줘요."
인권위의 결정문이 '거주ㆍ이전의 자유'를 두고 현행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행복추구권'에 대한 판단을 피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양주택 주민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분명 존재하는 하나의 '행복'이지만, 지금 시대에 다른 압도적인 '행복' 가치관과 비교해야 하니 무척 복잡하고 곤란한 일이다. '행복'은 대단히 주관적인 가치인 면이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주장, 즉 '우리는 아파트에서 못 산다'라는 말에 한양마을 주민들이 추구해 온 남다른 '행복'이 꽤 많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류동희 씨의 집과 나무들은 가친이 물려준 것이다. 한양주택의 집들은 뉴타운 재개발계획에서 개인 택지 분양을 받지 못하는 '70평 이하'에 속한다. 1979년에 일괄적으로 50평 대지를 분양받고 입주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무조건 아파트로 가야 하는 게 지금의 아주 희한한 법, 그런데 류동희 씨의 경우, 설사 여윳돈이 있어 다른 지역의 개인 택지를 구한다 해도 나무를 옮겨 심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빽빽이 자라고 있는 나무는 뿌리끼리 온통 엉켜있을 것이다. 수십 그루의 나무를 통째 옮겨야 하는 일이 가능한가.
인간은 자식의 목숨을 구하려 자동차 앞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은 오직 자식에만 국한될까? 귀하다고 믿는 모든 존재가 사랑의 대상이다. 그의 나무들은, 그리고 집은, 작고한 부친이 지금도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듯이 류동희 씨가 느낄 수 있는 하나의 현신체라고 할 수 있다. 그 현신에 대한 그의 애착은, 지금 세상에서도 전혀 비사회적이지 않은 매우 건강한 가치관, 인생관의 표현이다. 존재의 안정감을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토양과 같은 것이다.
마당에 무려 600여 개의 화분을 키우는 마을주민 조경업 씨도 그렇다. 햇빛과 바람, 습도에 민감한 돌단풍 화분을 아파트로 데리고 갈 수 있겠는가. 북한산 자연파괴를 피하기 위해 돌단풍의 씨를 받아와 수백 개의 화분에다 키우는, 참으로 놀라운 자연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그의 삶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고, 그의 행복은 고층 아파트에서 계속되기란 불가능하다.
주민 이점희 씨의 경우도 아주 각별하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결코 무시 못 할 사정이 있다. 그녀는 건선(乾癬)이란 피부병을 앓았었고, 40대 후반부터 신장이 나빠져 투석치료까지 받았다. 그녀는 독실한 신앙인. 몇 년에 걸쳐 기도했고, "응답"이 왔다. 그녀는 집 마당 대추나무 자리에 150m 파이프 우물을 팠다. 그 물을 마시고, 바르고, 씻었다. "22년 동안 한번도 목욕탕을 가지 못했던" 지독한 건선이 1년 만에 나았다.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 식수를 얻어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대책위 사람들이 먹는 식수는 그녀의 파이프 우물에서 받아온다. 2000만 원을 들인 파이프, 양수기 사용으로 한달 전기세 17만 원, 그러나 우물 물은 마을 주민 누구에게나 공짜다. 최근 그녀는 우물과 마을을 지켜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렸다. 근데 천일기도라도 해야 할 판이다. 며칠 전, 마을과 인근 비닐하우스의 관정을 모두 폐쇄하라는 은평구청의 통지문이 날아온 것이다.
한양주택 위치는 도로접근권이 좋아 은평 뉴타운 3지구에서 '노른자위 땅'이라고 주민들은 믿는다. 아파트를 세운다고 하지만, 십여 층, 아니 수십 층 주상복합 상가가 들어설 거라고 주민들은 의심한다. 사업의 수익성 때문에 한양주택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장마 피해가 있었던 지역, 실개천을 복원해야 한다, 이 마을만 남기면 아파트 주민과 계층간 위화감이 생긴다 등등 별별 이유를 대며 주민을 속이려 하고 있는 것에 주민들은 제일 화가 난다고 한다. 공영개발, 개소리라는 것이다. 이재심 씨는 "내가 마지막 한 명이 되어 우리 땅에 어떤 건물을 세우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거야!" 하고 아주 노한 표정이 된다.
***주민 목소리에 귀 막은 국가인권위원회**
앞서 말한 류동희 씨도 독실한 신앙인이다. 그가 내게 들려준 간디 이야기, 아니 인권위 비판이 한양주택 마을의 현재와 미래를 다 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주민들이 인권위에 항의를 하러 간 것으로 아는데, 인권위는 뭐라고 했답니까'라는 그의 질문에,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고 했고, 시정차별위원회의 결정이었기에 인권위 내 다른 위원회에 새로 진정을 낸다면 다시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그에게 전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기자님이 오시기 방금 전까지 제가 간디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있었는데요, 인도의 파리아 계급이라고 있죠?(제5계급 하리잔을 말함 : 필자) 접촉만 해도 아주 큰일이 나는, 동물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잠시 또 침묵.
"잘 아시겠지만, 인도가 300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을 때, 모든 국민이 인도자치, 인도 자치를 외쳤단 말이죠. 그런데 간디는 인도에 파리아 계급이 있는 한 자치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우리가 영국으로부터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남아공이나 캐나다에서 처참한 대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벌이다, 우리가 파리아 계급 문제도 해결 못하고 그 사람들을 천민으로 생각하는데, 어찌 영국한테 사람 대접을 받겠냐고."
류동희 씨의 어조는 이상한 확신감에 차 있었다. 언뜻 목사님 같아 보인다. 그의 목소리가 내내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파리아 마을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데, 그러나 간디는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고 용기를 내라고, 용기를 내라고 했어요. 간디의 사상과 실천에 동참한 귀족 청년들도 파리아 말만 나오면 도망을 가버렸어요! 상류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요. 자기에게 불리하고 자기에게 누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눈앞에서 벌어져도 '난 안 봤소' '난 몰러' '들은 바 없소' 합니다.
이게 실은 오늘 우리나라 현실이요. 인권위가, 대통령 직속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정책과 국회에서 통과한 법으로 뉴타운을 개발한다는데, 국민을 위한 인권위가 아니라 대통령의 명령 지시를 따르는 인권위는, 주민들 소리 좀 들어보고는, 귀를 막고 말겠지요."
류동희 씨의 목소리가 누가 듣고 있다는 듯이 작아졌다. 서울시에서 아름다운 마을 제1호라며 상까지 줬던 마을. 처음에는 214가구 중 단 두 사람이 개발에 동의했는데, SH공사는 '2명의 의견도 의견이다' 하며 마을에 들어왔고, 지금은 재개발업체의 탁월한 '마을 깨기 노하우'에 휘둘려 주민 과반수가 동의해버렸다. 양심에 찔리는지 동의한 주민들은 거의 늘 술에 취해 대책위 천막을 찾아온다고 한다. "참 좋은 동네였는데 뉴타운 하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버려놨어요." 류동희 씨의 탄식에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마치 고개 숙인 나를 위로하려는 듯이.
"그러나, 이대로 모든 게 끝이냐, 그렇진 않아요. 다음에 심판이 와요. 이 정부가 오래 갈 것 같지만, 절대 오래 못 갑니다. 과거에 권력을 누렸던 자들이 지금도 계속 누리면 좋겠지만, 시간이 가면 반드시 뒤집혀요. 다 약자고 죽은 자 같지만, 어떤 이는 살아나옵니다. 이게 역사요. 우리 주민들이 강자의 논리에 밀려서 마을에서 쫓겨난다손 치더라도, 다 죽은 자가 아니고 언젠가는 소생해 나오는 자가 반드시 있소이다."
나는 내가 마치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이 마을과 집, 나무와 류동희 씨가 20년 넘게 맺어 온 정신적 결속이 깊다는 것이리라. 또 그 결속을 끊어버리려 하는 서울시와 SH공사 측의 횡포가 그간 지독하고 교활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류동희 씨의 시대를 초월한 듯한 저 놀라운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정든 집'"**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서울시 뉴타운사업본부에 따지러 갔다. 약속한 시간에 최창식 본부장은 사무실에 없었고, 이건기 반장이 나를 맞았다. 그와 한참 옥신각신했다.
"우리가 적절한 보상과 함께 새 주거용 건물로 아파트를 공급하는데, 조경업 씨는 아파트가 싫다는 것 아닙니까. 그 후는 그분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개발사업이 있었어요. 각 필지에, 건물에 사연이 없는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도시개발법에 따라 구역지정을 하고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공영개발을 하는 것 아닙니까. 한양주택이 속한 3지구뿐 아니라 은평 뉴타운 1, 2지구에도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류동희 씨 사연에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지만, 거기만 빼놓으면 전체 수용건물 8700동을 놓고 볼 때 형평이 맞지가 않습니다."
'한번도 내 재산을 원하는 사람과 계약서를 작성한 적도 없고 흥정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엉터리 거래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합법이라고 한다면, 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류동희 씨는 주장했다.
"신행정수도 사업의 경우처럼, 수용된 토지에서 농사 짓던 사람들, 계속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겠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신행정수도 사업이 중단되었습니까? 분당ㆍ일산도 똑같아요. 다 논밭이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사업은 다 추진되었습니다. 그건 왜냐, 간단히 말해, 사익보다 공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에도 서울시 공무원의 반박이 나온다. 건축인 서윤영 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아무 때고 현관문을 열어둘 수 있는 집'이라고 했다. 이 반장에게 가장 아름다운 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저는 서윤영 씨와 다른 대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정든 집입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이 반장의 말들이 자꾸 생각났다. 어느 순간, 내 입에서, 지면에 담기 힘든,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상금을 받고 아파트가 싫으면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그리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할 수 있는지. SH공사를 찾아가 한 담당 직원에게 "제발 니가 먼저 나를 한 대 쳐라! 그래야 내가 너를 아주 죽여버릴 수 있겠다!"라고 했다는 조경업 씨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집도 그렇고 사람도 정든 사람이 좋은 것을 왜 모르나. 재개발사업으로 한양주택 땅값이 그새 얼마나 올랐는 줄 아느냐고 내게 되묻는, 서울시 공무원의, 한 인간으로서의 참으로 놀라운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언제쯤 서울시와 SH공사도 주민들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한양주택 마을에 사랑과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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