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귀가 활짝 열리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있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쌀과 영화'라는 집회에서 선배님이 농민들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인터넷에 오른 동영상과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팔을 뻗으며 노래하는 선배님의 모습은 어색해 보였지만, 단상에서 절을 하는 사진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쌀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경찰의 감정적인 폭력에 목숨을 잃기까지 하면서 정부와 싸울 때, 외면하고 회피한 것을 참회한다며 선배님은 사죄의 큰 절을 하였습니다. 물론 '사정이 급하니까 농민들한테까지 들러붙는구나,' '한낱 쇼일 뿐이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정말 진심일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선배님이 출연한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파이란〉입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주인공 '강재'가 아니라 '인간 최민식'을 보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때 본 '인간 최민식'이라면, 하고 선배님의 큰절이 진심의 표현이라고 저는 다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쌀과 영화', 연대는 과연 가능할까?**
〈파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 전에, 전국시사만화협회의 사이트 '뉴스툰'에서 보았던 만평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배님의 절만큼, 감동이 있는 그림입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쌀과 영화'라는 집회가 있기 5일 전에 나온 그림입니다.(그림 속의 시 한 편도 아주 압권이지요?) 저는 손문상 화백의 개인 사이트를 찾아가 댓글까지 썼습니다. "그려진 들은 평택이 아닌가 싶은데, 아니어도 좋습니다. 평택뿐이 아니라 한국 농업 전체가 암울합니다. 그림에는 여러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맞습니다, 한국 영화인들은 농민들과 어서 빨리 만나야 합니다.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사실 영화인들이 근래에 열심히 영화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그 주제 의식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깊은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한국 영화인들도 중국의 〈귀신이 온다〉와 같은 사회적 걸작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과 함께 영화인들도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스크린 쿼터라는 문화적 자산을 지켜낸 자부심으로 한국 영화도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했고, 뒤이어 계속할 것 같은 영화인들이 이 그림을 보고 감동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저 쓸쓸한 그림을 현실에서 다르게 바꿔버렸으면, 싶었습니다. 즉 영화인들이 평택 들에라도 가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준기 씨의 경우처럼, 몇 천 명의 팬들이 같이 평택에 가 절대농지 300만 평을 잃어버리게 된 그곳 농민들과 뜨겁게 만났으면 싶었습니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고자 하는 문화적 자존심이 더 나아가 민족적 자존심, 국가적 자존심으로 상승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소망일 뿐, 저는 손 화백의 그림이 현실에서는 별다른 반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흘 뒤인가, 역시 현실의 반향이 아닌, 그림쟁이들끼리의 반향만이 나왔습니다. 누가 손 화백의 만평을 패러디한 것인데, 그림에 담긴 소망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패러디도 아주 잘된 것 같습니다. 시사만화협회의 한 실무자가 한 패러디인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럼에도 다시 말하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 그림이 소망하는 것이 정말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질까?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저는 회의하였습니다.
***영화인들의 시위에 진정성은 있는가?**
현실과 예술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헛손질의 기억은 제게도, 선배님한테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의 경우, 제 어린 날의 예를 들자면, 시골에서 도시의 극장에 갔을 때, 〈슈퍼맨〉, 〈사형도수〉, 〈백 투 더 퓨처〉 등에 흠뻑 빠졌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부신 햇빛 속에 세상의 풍경들이 낯설어 보일 때, 세상은 영화 같이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고 또 내게 영화의 주인공 같은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런데 나를 홀린 영화를 원망하기보다 세상과 나 자신이 그만 미워지려 할 때, 이처럼 그림과 패러디에 공감하면 할수록, 저는 그만 세상을 미워하게 될지 모릅니다.
바로 그럴 때! 최민식 선배님이 농민집회에 가서 사죄의 큰 절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농민과 영화인의 만남'이란 화두를 가지고 안타까워하고 있었기에 저는 더욱 크게 놀란 것입니다. 평택 들뿐 아니라 한국 들판의 수많은 '논둑'에서 영화인들이 1인 시위를 하는 일이 정말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에 해당할, 상상의 나래가 마구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도, 예술인이면서도,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마음의 냉온탕을 오가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시 냉소 모드(mode)의 작동.(언제부턴가 한국 사회는 그 어떤 감동적인 일에도 냉소의 물결이 거칠게 쇄도하는 아주 형편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출연료를 수억 원씩 받아먹는 놈들이 농민들 아픔에 동참한다고? 관객들은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서 외화 안보고 한국 영화 보러 가는데, 저것들은 국산 영화 해서 돈 벌고 외제차 몰고 다니지? 그 차 타고 시위 하러 왔지? 시위의 기본적인 마인드가 있는데, 그 진정성이라는 게 있는데, 외제차부터 좀 처분하시지. 연기로 밥 벌어 먹는 놈들의 눈물을 어떻게 믿니? 쟤들은 연기력이 전술이야. 등의 말들.
이런 말들도 분명 실재하는 복잡한 현실의 반영이고, 그러니 같이 냉소로 응대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귀를 기울여 새길 것은 새겨야 합니다. 반성할 점이 있으면 우리는 끝없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냉소의 말에 해당할 영화인들이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선배님의 절만큼은 저는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파이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선배님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파이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파이란〉에서 '인간 최민식'을 발견하다**
영화에서 선배님은 조직에서 고참 대접도 받지 못하는 어설프고 한심한 깡패 '강재'입니다. '파이란'(장바이쯔)은, 한국에서 쫓겨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류상의 편법을 동원해 강재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강재와 파이란은 영화 내내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합니다. 강재는 돈이 필요해 서류상의 남편이 되었을 뿐입니다. 파이란에게 강재란 존재는, 그녀가 소지한 증명사진 속에서 늘 웃고 있는 희한한 한국남자입니다.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둘 사이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보 같은 파이란은 강재를 향한 마음을 키워갑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부분에서 약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이해하자면 못할 일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자란 다 큰 처녀라고 해도 이국땅에 와 혼자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식과 행동의 수준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파이란의 사회적 정신 연령은 10살 정도라 해야 할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주변의 작은 배려에 한없이 감사해 하는 그녀의 딱한 처지를 알아준다면, 남편이 되어준 사내를 '한없이 친절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 그녀를, 그 사내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강재란 사람이 옆에 있어주길 파이란이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을 강재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못난 자신을 믿고 또 감사해 했던 파이란이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파이란이 죽고 난 뒤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강재는 바다를 보며 통곡합니다. 그것은 파이란에 대한 연민이자 자기연민일 터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참으로 깊고 따뜻한 마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속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깨달음의 때가 늦었다는 것이 또 너무 뼈아파서 (한국 영화사에 유례없는) 격렬한 울음(장면)이 나오는(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선배님. 솔직히 저는 강재의 울음이 너무 격렬하여서, 개인적으로 공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격한 울음이 제게 '비공감'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관객은 파이란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압니다. 영화는 세탁소의 '시다'로 한국 사회에 정착한 파이란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이란의 모습에서 이주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계심과 거부감이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조용히 느꼈을 것입니다. 파이란이 강재를 찾으러 갔을 때, 아슬아슬하게 못 만나는 안타까운 장면도 관객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강재는 사진 속의 파이란, 전해들은 파이란의 뼈대뿐인 사연 말고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강재가 정말 파이란을 생각하며 울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불쌍한 처지 때문에 울었을까요. 기억할 수 있는 한 자기 인생 전체를 다 돌아보며 울었을까요. 강재의 울음은 자꾸만 커져 가는데, 흡사 자신이 지나온 수많은 전생의 모든 사연마저 알겠다는 듯이 완전히 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강재는 저렇게 울어서는 안 됩니다. 강재는 실체적으로 존재한, 구체적인 파이란을 전혀 모르기에 절대 저렇게 울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바다 앞에서의 울음 장면을 찍기 전, 시나리오가 실제 어떻게 나와 있었는지 저는 한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이러저러하게 강재는 운다' 하고 '이러저러'를 상세하게 요구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그냥 '강재는 운다'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최민식 형의 판단에 따르자. 그날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따라가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강재는 파이란을 모르지만, 관객은 파이란을 안다! 이 미묘한 상황에서 감독이 정확한 연출을 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한 추측이 맞다면('상당히 개연성이 높다'고 충무로의 한 감독이 확인해 주었고, 그리고 그는 '배우 최민식'을 일러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큼은 인정한다고 인물평까지 해주었습니다), 상황이 정말 그랬다면, 이제 격렬한 울음의 비밀이 나옵니다. 마지막 그 울음은, 강재의 울음이 아니라 '인간 최민식'의 울음입니다. 강재와 파이란을 다 알고 있는, 배우 최민식, 아니 인간 최민식의 울음. 사실 그렇게까지 울 정도는 아니지만, 강재도 슬프고, 배우 최민식은 더 슬프고, 인간 최민식은 미쳐버릴 것 같은 슬픔입니다. 울고 있는 강재에게서 저는 결국 '인간 최민식'을 본 것입니다. 나아가 저는 울음 장면의 그 '오버액션'까지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감동'을 주는 '인간 최민식'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왜 선배님은 농민 집회에 가서 다른 배우들과 달리 (바바리코트를 입고) 절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그 돌출행동을 두고 속 보인다, 가식적이다, 못 믿겠다, 하는 네티즌의 덧글을 접한 선배님은 왜 공개토론까지 제안했을까요. 큰 절은, 아무한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과 일가 어른, 처가 어른, 그리고 조상들한테 하는 것이 큰절입니다. 사죄의 큰절은 더욱 드문 일입니다. 아마 선배님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사죄의 큰절을 처음 해봤을 것입니다. 농민 집회에 참석한 어떤 배우도 하지 않았던, 즉석의, 그러나 즉석만은 아닌, 어쩌면 〈파이란〉에서 확인한 '인간 최민식'만이 할 수 있는, 비범하고 진심어린 행동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이제 이 편지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와 문학은 업계가 다른데, 넓게 보아 '예술'의 영역에 같이 속해 있다는 것 하나만 믿고 생면부지의 제가 다짜고짜 '선배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 편지를 읽는 내내 어색하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선배님을 '씨'나 '선생'이라고 부르기는 싫었습니다. 아무튼 여러 말을 했지만, 행여 제가 선배님 보고 평택이나 다른 들의 논둑에 가서 1인 시위를 하라고 권하는 편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선배님의 큰 절 소식이 너무 반갑고, 또 제가 아는 '인간 최민식'다워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만 선배님, 꼭 하나, 농민들 앞에 올린 큰절, 그때 그 자리의 행동으로 끝나지 말고, 그 의미를 선배님 스스로 좀더 깊이 생각해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주변의 많은 영화인들과 나눴으면 합니다. 스크린쿼터를 꼭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간의 일을 '민간인'이 되돌려놓기는 한국사회의 전례를 보아 매우 드문 일에 속합니다. 스크린쿼터는 정부의 발표대로 대폭 축소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를 지키려는 싸움에서 한국의 영화인들이 열심히 참가하고 그 과정에서, 전에는 잘 몰랐던 이 사회의 여러 복잡한 아픔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다 어른스런 영화, 세계만방에 자랑해도 좋은 진정한 한국영화가 될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제작과 출연 자체를 꺼리는, 영화계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할리우드가 주로 생산하는 작위적이고 유치한 스토리의 영화를 태평양 한가운데 빠뜨릴 수 있는 정공법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인 플랜은 그렇지만, 목전의 중요한 시기, 선배님이 이후로도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였으면 합니다. 한국농업, 스크린 쿼터, 미군기지 신설·확장 움직임, 보다 첨예해지는 무한자본의 폭력 등 한국사회를 둘러싼 보다 넓을 맥락에 눈이 밝아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배님, '짧은 시간에 분명한 의미와 맥락을 알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나요' 하고 〈프레시안〉에라도 물어보세요. 쟁쟁한 사람들을 소개해줄 것입니다. 선배님이 그 분들께 전화를 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시간을 내주십시오' 하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 열 분 정도만 만나도, 선배님은 보다 비범한 배우, 비범한 인간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선배님을 알아보는 영화계의 후배들이 선배님을 따라 배울 것입니다.
앞으로 출연할 영화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곳곳에서 선배님이 행하는 감동적인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편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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