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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대안학교의 길<3> '집으로 가는 길' '학교로 가는 길'

강변버스터미널에서 울진행 버스를 탔다. 꼬박 반년 만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마자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벌써 바다가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는, 언제 보아도 아찔하고 가슴 두근거린다. 버스에서 내려 집이 있는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자주 오지 못한 탓에 방학 때 돌아오면 언제나 낯설게 느껴지는 울진은, 오늘따라 낯선 정도가 더한 듯 했다. 낮고 낡은 건물들과 한산한 2차선 찻길, 낯익은 사람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여름 산은 분당의 복잡한 도심에 비하면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이 조용한 동해의 촌동네를 떠나 이우학교에 입학한 지 2년, 햇수로는 3년이 다 되었으니, 벌써 그렇게 됐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2003년, 원하는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차에 우연히 찾게 된 이우학교. 이우학교는 나에게 '대안학교'의 꿈만 꾸면서 결국은 일반학교를 선택해야 했던 답답한 현실의 도피처이자 '유토피아'였다. 이우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에 나는 들떴고, 뚜렷한 계획도 없으면서 온갖 '제한'과 '타율'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는 먼 이야기 같기만 했던 대안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강제가 없는 곳이라는 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도피처라고 생각한 이우학교는 막상 대하고 보니 '대처'였다. 나는 좁은 골목길에서 넓디넓은 대로로 나온 것이었고, 그 뒤로 한동안 그 길을 헤맨 것 같다.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콘크리트로 덮인 언덕을 파헤쳐 낡은 상수도관을 교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도, 우리 집이 있는 아파트도 겉모습은 바뀐 것이 없었다. 정신없이 길을 찾으며 적지 않은 시간을 도시에서 보냈지만, 그 동안 우리 동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손주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시고, 한 달에 한두 번씩 주말마다 상경해서 이것저것 챙겨주시곤 다시 울진으로 돌아가시는 어머니는 식사 준비 하느라 바쁘셨다. 집에 왔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실에 대자로 누워서 아파트 뒷산에서 베란다를 넘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휴식…'새로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되짚어보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제대로 쉰 기억이 없다. 하는 것도 없이 마음은 초조했고, 바로 해야 할 일 목록을 다시 펴 놓고 허둥댔다. 학교에는 해야 할 일들이 늘 많았다. 입학과 동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과제물들―보고서 작성, 모둠 과제, 발표 준비, 수업 사전조사 등등―은,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면서 문제풀이에 열중했던 탓에 그닥 숙제가 많지 않았던 일반학교에 비하면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 접하는 생경한 인문학 주제들과 도서, 초등학교 이후로는 별로 해 본 기억이 없는 발표 수업과 모둠별 과제는 그 놀라움의 정도를 더했다. 예컨대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 골계미에 대해 구체적 문학 작품을 사례로 들어 하나의 완성된 글로써 설명"하거나 "하나의 재배 작물을 선택하여 그 작물의 재배의 기원·전래 시기·재배 방법·음식물의 형태·관련 설화 등을 조사하고, 30분 정도의 분량으로 수업시간에 프리젠테이션" 하는 식이었다.

수학 시간엔 실제 생활에 쓰이는 수식들을 TI계산기에 입력해서 난해한 직선과 곡선의 의미를 이해하는 수업을 했고, 철학 시간엔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생명공학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사 수업 시간에 심어 놓은 작물을 돌보기 위해 매일 등하교 시간에 학교 입구의 밭에 들러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면서, 비록 흙장난 수준의 농사지만 무언가를 돌보고 기른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매주 한 번씩 토요일에 열린 전체회의 때에는, 학기 초인 탓에 소원한 친구 관계에 대한 자기 생각, 수업에 대한 불만 사항, 선생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 등등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개교 이래 3년째 진행되고 있는 '무감독 시험'의 실시도 이 회의에서 결정됐고, 언젠가 학생회에 대한 무관심과 참여율 저조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학교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학생들의 근본적인 물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변호사, 이라크전쟁의 와중에 인간방패를 자처한 '이라크평화연대'의 임영신 활동가,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씨, '샬롬의 집' 이정호 신부 등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다. '진로간담회'를 열어 경영, 언론, 문학, 영화, 의료, 컴퓨터 등 학생들이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모셔와 그룹별 질의 응답과 토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 담임 선생님 외에 학생들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1명의 선생님을 상담 선생님으로 정해 함께 틈틈이 이야기를 하고, 정보를 얻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시로 열리는 진로 특강에서는 예컨대 '대안에너지와 관련 직업'을 주제로 좀 더 전문적인 정보를 습득할 수도 있고, '학부모 사랑방'이라는 모임에 참가하면 매주 특정 직업에 종사하시는 학부모님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열려 있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적지 않은 활동을 했다. 매학기 한 번씩 충주 복탄리를 찾아가 이틀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밭에 말뚝 박기, 고추 따기, 담뱃잎 솎기, 깨 털기, 닭장 청소에, 운이 좋으면 그나마 좀 수월한 밤 줍기·복숭아 따기 등등 온갖 잡일을 해 드리고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주시는 빵과 음료수 새참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마을 분들도 우리 언제 오나, 하고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NGO 시간에는 직접 일선 단체를 찾아가 일을 돕거나,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식으로 활동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1학년 때 '성남재가노인복지센터', 2학년 때 '용인이주노동자센터', 그리고 3학년이 된 올해에는 '평화박물관'에서 일을 도왔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업이나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찾아 행하고 있는 '시민단체'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가 각별해지는 느낌이었고, 몇몇 친구들은 어느새 자신의 진로를 그 방향으로 정해 놓았다.

이 와중에 동아리 활동, 수업 준비, 각종 교내 행사 준비를 하다보면 거의 매일 학교에 늦은 시간까지 남기 일쑤였다. 원래 덩치도 작고 체력도 떨어지는 나는 한 해를 마감하는 겨울만 되면 크게 앓았다. 그것이 1년 동안 무리한 탓에 오는 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힘들었지만, 나에게 그 모든 일들은 곧 추억이 되었고 너무나 짜릿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조금 흐렸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무런 부담 없이 거실에 누워 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창문 밖 산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람은 시원하게 솔솔 불고, 곧 냉큼 일어나 할머니가 차려 주신 맛난 밥을 먹었다. 아주 배불리.

***'익숙한 길'과 '새로운 길'이 만나는 곳**

다음날 해가 하늘 한 가운데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잤다. 대충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집 밖으로 나갔다. 평일 오후라 거리에 사람들은 없었다. 친구들은 다들 보충수업 하느라 학교에 있었고, 만날 사람 없는 나는 그냥 발길 닿는 곳으로 이 골목 저 골목 동네를 쏘다녔다. 별로 크지 않은 소도시인 탓에 어느 골목길로 들어가도 곧 큰 길이 나오고 한번 갔던 곳이 다시 나오고, 고작 삼사십 분 정도만 걸어도 시내 한쪽에서 반대쪽 끝까지 갈 수 있엇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다녔던 길이라 걷는 동안 이런저런 추억거리가 떠올라 시간 보내기엔 그만이었다.

십수 년 동안 다녔던 익숙한 길을 벗어나 대처로 나온 나는, 새로운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수업과 무관한 교외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기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 주최로 열렸던 '동서남북 프로젝트'에서는 구 동·서독과 북한 출신의 청소년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친구들은 통일된 후의 조금은 혼란스러운 독일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나처럼 불투명한 장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압록강을 넘은 뒤 몇 년 동안 중국에서 체류하다 남한으로 온 형은, 지금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법학을 공부하고 싶다던 그 형은 원하던 대로 올 봄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지리산 실상사 옆에 사무실을 둔 '지리산생명평화결사'의 '생명평화탁발순례'에 절친한 친구 산하와 함께 참여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생명'과 '평화'라는 말만 흘러넘치고 실제로 아무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손수 실천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방방곡곡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를 찾아다니며 현안을 논의하고 생명과 평화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실상사 도법스님과, '녹색대학'에 다니면서 함께 순례에 참가했던 선이 누나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 주최한 '동북아평화포럼'에서는 국제 문제와 평화에 관심 있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가장 어린데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나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편지도 써준 네덜란드의 세바스찬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바스찬은 북한에 직접 들어가 NGO 활동을 벌이고 싶다고 했다.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학교에 돌아온 후에도 며칠 동안은 행사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더 즐겁게 공부하고 일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그것이 내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끝도 없이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거나 해야 할 일을 미루려는 나에게 긴장의 고삐를 당기도록 해주는 채찍질이 되고 있다.

집으로 가던 길에 보충수업을 끝내고 우르르 몰려나오는 고등학생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와 함께 분식집엘 들러 맛깔나는 수다에 버무린 떡볶이 한 접시를 냉큼 비웠다. 잘 지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문득, 새로운 길 위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은 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울로…"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그렇게 나흘을 푹 쉬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가기 위해 미리 챙겨둔 짐을 집어들자 할머니 는 또 울려고 하신다. 잘 지내고, 더운 여름에 많이많이 밥 잘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하시면서 나를 전송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참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학교생활 하는 것으로 밖엔 보답드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 안에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2년 동안 많은 것을 했지만, 누군가 나를 평가한다면 과연 나는 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 학교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막상 일반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모의고사 점수는 늘 비교의 대상이었다. 어른들을 만나 '공부 열심히 하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이 아직은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가겠다는 선택도 내가 한 것이지만, 대학에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학교생활이란 사람들에게는 곧 '공부'가 전부인 양 인식된다. 곧잘 '공부가 다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학교생활 잘 하고 있니?'가 아닌 '공부 열심히 하니?'라는 질문을 모든 청소년이 듣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질문과 사회적 인식들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많은 것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 그만큼 성실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우학교에 다니면서 지친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에 치여서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다.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친구들과 놀러 다닌 적도 참 많다. 나의 불만과 수치심은 다 그런 것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해준 말이 있다.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이 말을 듣고, 비록 지금 나는 친구들보다 점수가 몇 점 낮을지는 몰라도,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점수를 얻었다면, 나는 그 동안 친구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고 또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점수'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한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지난 2년 동안 배운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이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서울이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들과 가로등, 그리고 높은 건물들과 수많은 자동차들이 보였다. 휘황한 불빛을 자랑하는 서울의 야경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도심지의 풍광이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간의 학교 생활에 대한 작은 결산으로서 쓰고 있는 논문을 빨리 완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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