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PD수첩〉 PD들의 기자회견장에서 영국 〈로이터〉의 한 기자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이언스〉는 세계적 과학 잡지인데 우리가 왜 신뢰가 '0'인 MBC를 믿어야 하는가?"
사실 이런 의문은 〈PD수첩〉의 문제제기에 대해 온 국민이 비슷하게 갖는 의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과학담당 기자라는 사람들이나 과학계에서까지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생뚱맞기까지 하다. 〈네이처〉나 〈사이언스〉의 논문 심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PD수첩〉의 문제제기가 어떤 번짓수에 서는지 그 의미를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와 〈PD수첩〉의 검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황우석 교수의 2005년 〈사이언스〉 발표 논문은 불과 2개월밖에 안 되는 검증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이례적인 경우일 뿐이다. 보통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넘는 검증 과정을 거친다.
이 검증 과정은 실험 방법에 대한 검증, 해석의 오류 가능성, 표절 가능성 등에 초점이 맞춰진다. 논문에 나오는 기본적인 데이터가 가공됐는지 여부는 그 긴 기간 동안의 검증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데이터의 '진실성'은 과학 활동의 '기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국내 대학의 한 생명과학자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연구자가 논문에 들어갈 기본적인 데이터를 조작하거나 혹은 실험을 하지 않고 데이터를 가공으로 만들고자 마음 먹는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며 "이런 일은 과학자로서 '기본'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게재될 논문을 심사하는 전문가들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설명했다.
***〈사이언스〉에 처음부터 '가공·조작된' 데이터가 제공됐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PD수첩〉은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PD수첩〉측이 원래의 시료를 독자적으로 검증한 결과는 황우석 교수가 〈사이언스〉에 제출한 'DNA 지문' 분석 결과와 다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재검증'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황 교수 측은 지금도 계속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사이언스〉의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PD수첩〉의 재검증 요구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본질을 회피한 지적이다.
〈프레시안〉도 몇 차례 보도했다시피, 국과수가 황 교수측의 비공식 의뢰를 받아 처리해줬다는 'DNA 지문' 분석은 시료에서 채취한 DNA만을 가지고 분석하기 때문에 이번 '진위 공방'을 해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더구나 국과수조차 〈PD수첩〉이 얻은 결과가 '유의미하다'고 해석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사이언스〉가 검증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사이언스〉에 애초에 조작됐거나 가공된 'DNA 지문' 분석 결과가 제공됐다면 〈사이언스〉가 심사 과정에서 이런 '기만행위'를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얀 헨드릭 쇤 스캔들' 기억해야**
만약 어떤 과학자가 데이터 자체를 조작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이와 관련해 가장 극적인 사례는 지난 2002년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15개가 일괄 취소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 '얀 헨드릭 쇤 스캔들'이다.
미국 벨 연구소의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 연구원은 2000년대 들어 분자 규모의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연구는 당시 각광을 받던 나노 기술의 미래를 가늠할 최첨단의 연구 성과로 학계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30살이던 쇤 연구원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도 여기저기서 나왔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출판된 후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그의 연구를 재현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년여에 걸쳐 재현이 안 되자 물리학계에서는 '쇤의 데이터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쇤 연구원의 연구를 재현하려 했던 버클리 대학의 리디아 손 교수는 2002년 쇤 연구원이 발표한 상이한 조건에서 실시한 두 가지 실험의 그래프를 정밀 분석한 결과 정확히 같은 노이즈(그래프의 미세한 떨림)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벨 연구소는 제3의 전문가에게 의뢰해 쇤 연구원의 논문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며 몇 개월 뒤 "최소한 16개의 부정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1가지 데이터가 여러 실험의 결과로 재사용됐으며 그래프 중 몇몇은 실제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가공한 것이었다.
결국 〈네이처〉나 〈사이언스〉는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손을 놓고 있다 각각 7개, 8개의 논문을 취소하는 '창피'를 당했다. 당시 쇤 연구원과 공동 저자로 올랐던 다른 동료 과학자들 역시 이런 '기만행위'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 과학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정 기간 전 세계를 속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PD수첩〉이 아니라 과학계가 나서야 한다**
KAIST의 한 과학자는 이런 '기만행위'가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과 돈만 있으면 자신의 가설이 실험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과학자는 데이터 조작과 같은 '기만행위'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특히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처음 개척하는 과학자일수록 이런 유혹에 넘어갈 가능이 높다. 하지만 이런 유혹에 흔들리는 순간 과학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 박사의 뒤를 좇는 것이다. 만약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는 과학계에서는 영원히 추방된다."
실제로 모든 '기만행위'가 사실로 드러난 뒤에도 쇤 연구원은 계속 자신의 실험이 충분히 가능했으며 조만간 그의 가설이 사실로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가설은 입증되지 않고 있다. 그는 결국 2004년 6월 박사 학위까지 박탈당한 뒤 과학계에서 추방됐다. 현재까지는 이번 〈PD수첩〉의 문제제기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황우석 교수의 '기만행위'가 드러나는 것으로 막을 내릴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사이언스〉가 검증했는데 〈PD수첩〉이 나서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를 과학계와 언론이 반복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와 관련된 의혹이 과학계의 '밖'에서 제기된 만큼 이제는 과학계가 움직여야 한다.
만약 〈PD수첩〉에 의해 제기된 의혹이 과학자들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 사실로 확정될 경우 국내 과학계는 세기의 '기만행위'를 방조했다는 세계인의 조롱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계가 주도해 문제를 정리해감으로써 황 교수의 업적까지 사실로서 확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과학계의 자신감을 한층 고양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PD수첩〉과 황 교수 측이 신념과 윤리의 문제와 같이 검증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사실관계를 둘러싸고 벌이는 요령부득의 논란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소모적인 논란을 잠재우는 길은 과학자들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인 잣대로 한시 바삐 개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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