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는 다르게 언론지상에는 성공한 귀농인의 사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통적인 벼농사가 아닌 부가가치가 큰 작물을 재배하는 이들에게서 농업의 나아갈 방향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부농의 뒤편에서 불확실한 소득과 만성 부채를 안고 허덕이는 평범한 귀농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편집자
주경호(가명, 37) 씨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원예를 전공하며 일찌감치 귀농에 뜻을 뒀다. 대학을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지난 2000년 가을 27세의 젊은 나이에 충남 부여의 한 농촌에 자리를 잡았다.
올해로 만 37세가 된 주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을의 최연소자다.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혼자서 땅을 일구는 일도, 농촌사회에 녹아들어 가는 일도 녹녹한 과정이 아니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농사일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성과도 나오고 있지만, 두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경영학과 나온 아내가 '가계부 못 쓰겠다'고 푸념하더라"
도시 출신인 주 씨가 농촌 마을에 적응하는 과정에는 이중의 역경이 있었다. 농업대학을 나온 데다 귀농 전 서울 가락시장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농업경제가 돌아가는 모습도 지켜봤지만 막상 농사일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첫 번째다.
"처음 내려왔을 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땅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간단한 농기계를 다루는 일까지 스스로 알고 깨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근처 마을에 예전에 알고 지내던 형님이 있어 조금씩 해결해가진 했지만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도 상당했죠."
주 씨가 마주친 또 하나의 장벽은 애초에 기대했던 농촌 문화의 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농사일에 대한 희망도 비전도 없이 버티면서 살아온 이들은 주 씨를 '얼마나 버티나 보자'라며 지켜보았다. 훈훈한 인심으로 공동체가 유지되는 농촌 마을의 풍경 역시 십 수년간 붕괴해온 농촌경제 속에서 조금씩 변질했다. 주 씨 역시 이 과정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소득이 얼마냐"는 말에 계면쩍게 웃었다.
"농민들은 숫자에 약해요. 이유가 있죠. 소득이란 게 농작물을 출하해서 들어온 돈인데 그때까지 짧게는 2~3개월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면서 비용을 계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농사일 자체가 너무 바빠서 관리가 안 되는 부분도 있죠. 딸기 출하 철에는 몇 달에 걸쳐 내다 팔지만 끝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주 씨도 처음엔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수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무작정 많이 짓고 보자는 식이었다. 첫해부터 논 1000평·밭 500평에 닥치는 대로 심었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소소한 빚이 늘어가는 과정이 4~5년 차까지 이어졌다.
2005년 결혼을 앞두고 주 씨는 비닐하우스 재배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지금까지 6600㎡(2000평) 면적의 밭에 비닐하우스 7동을 짓고 5동엔 유기농 딸기를, 2동엔 감자를 재배하고 있다. 딸기농사가 잘될 때는 1동에서 700~1000만 원까지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딸기는 작물 중에서도 '고급'에 속한다. 농촌 비닐하우스의 20~30%를 차지하는 수박농사의 1동당 소득은 200만 원 정도다. 작물별로 사육기간과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가격이 갈린다. 딸기는 비닐하우스로 이양하기 전 모종을 키우는 육묘기간까지 포함해 15개월이 소요된다. 무나 배추처럼 철 따라 가격이 널뛰기를 덜 하는 것도 장점이다.
문제는 안정성이다. 지난해 그는 딸기농사로 3000만 원을 벌었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 볕이 잘 들지 않았던 3월을 거치면서 최대 2톤까지 기대했던 생산량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생산량이 줄었다고 비용이 줄어드는 일은 없으니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고랑에 비닐을 깔거나 비닐하우스를 칠 때 들 때만 사람이 5~10명은 필요해요. 게다가 유기농 딸기라 흰가루병이라도 생기면 농약을 쓰지 못해 유황을 태워 없애야 해요. 농약보다 배는 비싸지만 효과는 절반이에요. 그런데 유황을 태우면 비닐이 빨리 삭아서 1년에 한 번꼴로 갈아야 해요. 1동에 비닐 값만 100만 원이 들고, 인건비까지 합치니 350~400만 원이 들어가더라고요."
병충해 등이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비용 계산이 더 힘들다. 그때그때 통장에 남아있던 돈이 빠져나가고 잔액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야 한다. 비닐하우스를 시작한 지 5년이 갓 넘은 주 씨로선 경험 부족 역시 예측을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다. 주 씨는 "아내가 경영학과를 나왔는데 '가계부를 못 쓰겠다'고 푸념해요. 돈 들어올 데는 없는데 나가기만 하니까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농촌의 문제는 문화생활 등이 힘들거나 하는 데 있지 않아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몸이 힘들고 생활이 부대껴도 일정한 소득만 보장되면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진 않았을 거예요. 어느 정도 가계를 꾸릴 수만 있어도 자식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못 얻어 창피해 고향에 내려오지 못하는 일도, 조그마한 직장만 구해도 어른들이 으쓱거리며 자랑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뉴시스(자료사진) |
연 매출 2억 농민 "나 빚이 3억이란 말은 왜 안 할까?"
주 씨의 사정은 나은 편에 속한다. 유기농이라 일반 딸기보다 단가가 1.5배 정도 높게 형성되고 생활협동조합에 일괄 납품해서 판로도 안정된 편에 속한다. 생협 측과는 출하 이전에 가격을 책정하고 계약을 맺기 때문에 가격이 춤출 이유도 상대적으로 적다.
"고추 농사 같은 경우 작년보다 생산량이 10~20%만 올라가도 가격은 30~50%씩 곤두박질 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 처진 나은 편이지만 올해처럼 작물의 1년 뒤 상황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게 변하진 않아요. 작목을 쉽게 바꿀 수도 없어요. 그건 직장인이 직업을 바꾸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고민도 많이 해야 하고 투자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예측이 어려우니 작목 전환도 마치 로또 번호 찍듯이 해야 하는 거죠"
딸기 농사를 시작하면서 주 씨는 이미 많은 빚을 졌다. 2005년 결혼을 앞두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후계농업자금을 신청했다. 5년 거치에 10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8000만 원을 받아 땅을 매입했다. 이자율은 3%로 월 20만 원 수준이라 처음엔 부담이 없었지만 원금 상환 시기가 멀지 않았다. 여기에 생활비와 집안 사정이 겹치면서 생활비 명목으로 농협에서 3000만 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이자율은 8%로 한 달 이자가 정책자금과 비슷하다.
"정책자금 상환이야 정 어려우면 땅을 되팔아서 갚으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다른 대출은 고스란히 떠 앉아야죠. 처음엔 큰 빚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난이 아닌 거예요. 다들 사정이 비슷해요. 양송이버섯을 재배하는 형님 한 분은 연 매출 2억 원을 올려서 '6시 내고향' 같은 방송 프로그램도 출현했는데 나중에 저한테 그러더군요. '나 빚이 3억이라는 말은 왜 안 할까?'"
고민하던 주 씨는 지난해부터 딸기잼 판매를 시작했다. 마당에서 솥에 불을 지키고 바닥에 잼이 눌어붙지 않도록 한 번에 3시간씩 주걱으로 저어야 했다. 아이를 업은 아내까지 가세해 만든 잼을 개인 인맥으로 알음알음 팔아 1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상당한 소득이지만 한창 바쁠 땐 새벽 3~4시부터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야 하는 주 씨로서는 이를 병행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올해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냉해를 입으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했다.
"요새 여름에 유행하는 아이스 딸기를 만들어 팔아볼 생각도 했어요. 딸기를 급속 냉각해서 보관했다가 여름에 파는 건데 이걸 하려면 냉동고가 필요하거든요. 사려면 또 빚을 져야죠. 끝이 없어요."
"학원? 교육보다는 애 볼 시간이 없어서…"
불안정한 수익과 늘어나는 빚은 주 씨의 생활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루에 버스가 5번 오는 곳에서 아이를 이웃 면 소재 어린이집에 맡기려면 차량은 필수다. 여기에 농작물을 운반하는 트럭도 필요해 차만 2대를 굴려야 한다. 한 달에 50~60만 원이 드는 기름값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주 씨는 지난달 무쏘를 마티즈로 바꿨다.
이제 막 4살이 된 첫째 딸과 돌을 앞둔 둘째에 들어가는 비용은 부모의 도움 등이 있어서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땐 빨아 쓰는 면 기저귀를 샀을 정도다. 젊은 나이에 귀농을 결심한 만큼 아이들 건강 문제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를 낳은 후에는 이마저도 감당이 안 돼 일반 기저귀로 바꿨다.
큰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농어촌 자녀에게 지급되는 육아 보조금 덕에 7~8만 원의 비용만 든다. 아이들 장난감도 주위에서 얻거나 인터넷 장터에서 중고로 매입했다. 하지만 주 씨는 셋째를 낳으려던 계획을 접었다.
"마을에 아이가 없으니 적어도 3명은 낳아서 서로 어울리면서 컸으면 했어요. 주위에서도 '아들 하나 낳아야지'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하지만 형편상 한 명을 더 낳긴 무리더군요. 학원이요? 제가 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런 고민 해본 적 없어요. 저희보다 큰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 학원에 보내긴 하지만 교육보다는 농사일 때문에 애를 못 보니 맡기는 경우가 많아요."
'재테크'란 말을 꺼내자 주 씨는 "아내 생명보험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해지한 상태"라고 답했다.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이들 이름으로 든 3만 원짜리 보험과 자동차 보험, 국민건강보험이 '미래를 위한 대비'의 전부다. 심지어 국민연금도 내지 못한다. 귀농 초기에는 소득과 자산이 거의 없어 대상자가 아니었고, 몇 년 뒤부터 고지서가 날아왔지만 도저히 여유가 되지 않아 뜯지 않은지 꽤 되었다고 한다.
"저뿐만 아니다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빚을 가지고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농기계와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이죠. 저만 해도 좀 더 입지가 좋은 곳으로 비닐하우스를 옮기고 싶은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만 5000만 원이 넘어가요. 중고품을 산다고 해도 정책자금이나 농협 대출이 필수죠. 여기에 농사를 한두 번이라도 망치면 상환이 힘들어지는 거죠. 젊은 사람들일수록 의욕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요."
주 씨의 살림에 그나마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거주 문제다. 농사를 망치고 마을을 떠난 이가 내놓은 집을 마을 문중이 경매로 구입해 그에게 내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3년이면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 문중의 산소 몇 장 깎아주는 대가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줘서 고맙다고 돈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고 주 씨가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한 농사'는 권하고 싶지 않아"
귀농을 후회하느냐고 묻자 그는 "2~3번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있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답했다. 처음부터 돈 욕심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무리해서 일을 더 벌일 생각도 없다. 비닐하우스를 2배로 늘린다고 수익이 두 배로 느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년간의 귀농생활에서 얻은 경험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농사"를 권하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고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연고도 없는 곳에서 농촌 문화에 스며드는 일지 쉽지 않을뿐더러, 가진 것 없이 땅만 일궈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귀농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어요. 자기의 노력과 실력에 따라 작물을 잘 선택해 '대박'을 맞는 일도 있지만, 단언컨대 성공한 사람들의 열에 아홉은 정부 보조금을 잘 지원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정부의 농업정책에 걸맞은 사업을 신청하면 잘 밀어주는 편이라 비용의 절반은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융자와 자부담으로 해결하는 식이죠. 성공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많아요."
농업정책, '규모화'의 허상 걷어내야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업 개방이 이루어진 후 정부의 농업정책은 한결같이 '규모화'에 맞춰져 있었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과 경쟁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도입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농산물을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방향은 무리하게 경작지만 늘리다가 부채가 장기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또한 불안정한 수급 구조는 물가 파동이 덮칠 때마다 농민이 논밭을 갈아엎고 서울로 상경투쟁을 떠나는 풍경을 낳았다. 통계청의 농가경제조사결과에 따르면 2006년 가구당 평균 1209만2000원을 기록했던 농업소득은 2009년 969만8000원으로 줄어들었다. 농가의 총수입에서 농업소득 비율을 나타나는 수치는 2005년 44.6%에서 2009년 36.4%까지 떨어졌다. 최근에는 냉해와 구제역, 쌀값 파동 등을 거치면서 농민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지원을 중단하면서 쌀 재고량이 늘어나 쌀값은 20년 전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순수 농업으로 소득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고 이는 농촌의 붕괴현상을 낳았다. 남아 있는 이들도 희망과 목표를 상실하고 부채를 감당해가며 기약 없는 씨를 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가 농업을 산업 관점에서만 바라보면서 '규모화'에 중점을 둔 지원정책을 유지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식량안보의 관점에서 다양한 작물의 자급률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보조금 정책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에 이은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농업 선진국들이 자국 농민들에게 지출하는 막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는데 강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농업생산액 대비 농업보조금 비율은 40%가 넘어가며 유럽연합 전체로 봐도 22%에 이른다. 자유무역협정을 주도하는 미국 역시 보조금 비율은 10%를 넘어서지만 한국은 6.4%에 머문다. 또한 보조금 지급 형태 역시 다르다. 다른 나라들은 농민들의 소득을 직접적으로 보전해주는 정책을 취해 EU의 경우 농가소득의 70% 이상이 지원금이라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WTO 협정 위반을 이유로 대부분이 간접 지원 방식으로 이뤄진다. 혹자는 2004년 한·칠레 FTA 이후 농업에 들어간 지원금만 106조 원에 이른다는 점을 들며 농민들의 '보조금 따먹기' 경쟁이 도덕적 해이를 나았다고 비판하지만 예산 대부분이 기반설비나 농지정비, 유통 인프라 지원에 소요됐을 뿐 농민들 호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16% 수준에 불과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곽길자 정책국장은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도 농업법을 개정하면서 대규모 영농보다는 가족농 중심의 자급구조를 강화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며 "하지만 한국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조하면서도 추세와 맞지 않는 규모화와 친환경 농업론 등을 추진하는 모순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곽 국장은 "농업경제의 해법은 결국 정부가 농업정책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의지를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기금 등을 조성해 농산물 가격 파동의 폭을 조절하고 감산정책보다는 쌀 이외에는 5%로 미치지 못하는 농산물 자급률을 올리기 위해 작물을 전환하는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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