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 총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책임 있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날 의지를 계속 천명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UN 총회에서 "우리의 개발 경험을 개발도상국과 적극적으로 공유할 것이며 공적 개발 원조(ODA)도 2009년까지 현 수준의 2배로 증액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앞서 기조 연설에서도 "빈곤과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책임과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국제 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노 대통령의 국제 사회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ODA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2회에 걸쳐 살펴본 <프레시안>은 현재 ODA에 관한 한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수준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담을 마련했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대담에서 ODA 문제를 꾸준히 고민해 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권율 박사,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손혁상 실행위원,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은 우리나라 ODA 수준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들을 쏟아냈다. <편집자>
***"원조 개혁에 대한 국제사회 요구 높아…늦었지만 ODA 개혁 서둘러야"**
박인규 : <프레시안>에서는 지난 2회에 걸쳐 ODA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살펴봤다. 하지만 왜 지금 ODA가 문제인지, 이것부터 의구심을 가지는 독자들이 꽤 많은 듯하다. 도대체 지금 우리는 왜 ODA에 주목해야 하는가?
손혁상 : 사회주의 자본주의 양대 이념이 경쟁하는 냉전 체제를 지나면서 또 급격한 세계화를 거치면서 점점 세계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싹 트고 있다. 이런 인식의 변화 속에서 ODA에 대한 접근도 달라지고 있다. 20세기에 ODA가 강대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의 형태였다면 이제 인류의 보편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2000년 9월 국제연합(UN)에서 '빈곤 타파' 등을 전 세계가 결의하고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 MDGs)'를 천명한 것 역시 그 흐름에서 나온 것일 테다.
우리나라도 1987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법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법을 만들어 ODA를 본격적으로 추진한지 20여 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국제 사회의 ODA에 대한 변화하는 인식을 못 좇아가고 있다. 도대체 우리가 ODA를 왜 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한국수출입은행, KOICA 등 관련 부처 및 기관은 ODA를 국가적 경제 이익 즉 기업을 해외에 진출시키고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국제 사회의 ODA에 대한 변화된 인식과는 전혀 상반된 시각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ODA를 둘러싸고 대립되는 이런 가치들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ODA는 한 국가의 정체성을 다른 나라에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ODA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권 율 : 그렇다. ODA는 공평한 성장, 국제 연대와 같은 세계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 실현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와 같은 국가적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다. 이와 관련해 먼저 ODA와 관련해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선진국들은 대개 과거 자기네 식민지였던 개발도상국과 ODA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ODA의 뿌리는 제국주의에 닿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좀 다르다. 많은 개발도상국과 동반 성장을 해야 하는 처지였고 단지 지금 우리가 조금 더 상황이 낳아진 것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수원국(受援國)과 상호 의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ODA의 최근 흐름에 우리나라가 더 친화력이 있는 셈이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원조 수혜를 받아온 처지에서 원조 공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된 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것도 이런 특수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박인규 : 국회 안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민주노동당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ODA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떤가?
조승수 : 거의 관심이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진지하게 토론해 본 적이 없다. 사실 그 동안 국회는 정부가 결정하면 거수기 역할만 해왔지 않느냐. 독자적인 입법 방향을 내세우고 토론하는 과정은 17대 국회에 와서야 조금씩 보이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ODA와 같은 문제에 의원들이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ODA는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진행돼 왔다. 미국, 영국, 일본처럼 자국의 철저한 이익을 전제로 수원국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ODA가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편에서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처럼 인권, 평등과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ODA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식으로 ODA에 접근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야말로 앞에서 지적됐듯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성숙도 또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처럼 보인다.
***"ODA 담당 부처 및 기관의 정책 기능 취약이 가장 큰 문제"**
박인규 :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할 만한 능력을 갖췄고 국제 사회에서 요구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제야 ODA에 대한 이런 논의가 시작된 것을 보면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돼 있을 듯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나?
권 율 : 현재 ODA와 관련한 가장 큰 문제는 유ㆍ무상할 것 없이 원조 정책을 담당하는 중앙 부처와 실제 집행 기관의 정책 기능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집행도 주먹구구식이고 집행을 내놓은 후에도 관리가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원조 사업의 효과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현재 연간 4억 달러 규모의 ODA를 2009년까지 10억 달로 규모로 늘린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 네덜란드, 독일 등의 ODA 정책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네덜란드는 우리나라보다 원조 규모가 4배 정도가 되는데 원조 담당자만 800여 명이다.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된다.
손혁상 :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선 시급한 일은 원조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전문 기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해 지금처럼 유상 원조는 재경부, 한국수출입은행이 무상 원조는 외교부, KOICA가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제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유ㆍ무상 원조를 우리나라처럼 이원화된 체계로 나눠서 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처럼 유ㆍ무상 원조를 이원화된 나라들도 통합적으로 조율을 하는 기관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다.
실제로 원조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도 연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 병원을 짓는 사업이 있을 때 이것이 다른 사업에 비해서 우선 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또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유상 원조로 해야 할지 무상 원조로 해야 할지 지금 상황에서는 사전 조율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ㆍ무상 원조 업무가 통합되면 지금보다 원조 정책을 운용하는 게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
***"정부 독점 시대착오적…시민 참여형 원조 정책 구축해야"**
권 율 : 또 다른 문제는 시민 참여형 원조 정책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ODA 규모가 확대되면 될 수록 정부에서 모든 것을 담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조 정책이 발전한 ODA 선진국일수록 원조 관련 비정부단체(NGO)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제 우리나라도 원조 관련 시민단체, 경제단체, 대학들이 중지를 모아 전문적인 원조 정책 역량을 쌓아야 할 때이다.
손혁상 : 원조 정책에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역시 시급한 일이다. ODA 선진국의 경우에는 전체 ODA에서 NGO가 차지하는 비중이 5% 정도 된다. 우리나라는 0.3%에 불과하다. ODA가 상당히 다양하고 전문화돼 있기 때문에 정부가 모든 것을 관장할 수 없는 데도 97.7% 대부분을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시민단체가 정부에서 담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분야조차도 정부가 딱 쥐고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정부 담당자가 원조 정책에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를 해 놀란 적이 있다. "사안에 따라 필요하면 (시민단체를) 부를 수 있다", 이런 게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시민 참여형 원조 정책은 여전히 요원하다.
조승수 : 한 가지 덧붙여 생각해 볼 일도 있다. 현재는 과연 우리가 원조하는 사업이 현지에서 꼭 필요한지 제대로 심사하는 과정이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최근에 <프레시안>을 통해서도 알려진 필리핀 마닐라 인근의 철도 사업과 같은 일이 생기는 거다. 우리나라는 그 나라를 도와준다고 원조를 했는데 정작 그 필리핀 서민들은 그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게 현실이었다. 이런 식의 원조는 안 하느니만 못 하는 것일 텐데…….
사전에 수원국 내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ODA가 집행된 것이다. 앞으로 원조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할 때 수원국 정부 입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입장에서도 원조의 타당성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 역량 강화도 시급한 문제"**
권 율 : 현 정부 들어서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다. 다른 문제는 전문성 있는 단체나 사람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의 개발 NGO는 총 40여 개가 있는데 대부분 종교단체와 연동돼 있거나 긴급 원조 중심이다. 전문화돼 있지 못한 데다 의약품과 같은 긴급 원조가 주종을 이룬다. 좀 심하게 말하면 가서 사진 찍기에 급급하는 단체들도 많다.
시민단체들이 대학과 연계해서 더 많은 개발 전문가를 확보하고 역량을 쌓아야 한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확보되지 않으면 원조 규모가 늘어나도 집행 단계에서는 엉터리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전문성 강화는 원조 사업에 대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단적으로 이렇게 시민사회 개발 전문가가 늘어나야 필리핀 마닐라 철도 사업 원조와 같은 사례도 미리 방지할 수 있다.
손혁상 : 뼈아픈 지적이다. 외국 같은 경우에는 개발도상국 현지에 전문가를 보내서 그 지역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 네트워크에 포함돼 최소한 3년 이상 훈련을 시킨다. 이런 역량이 축적돼야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원조 사업이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개발 NGO들과 연계할 수 있는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역량과 ODA의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ODA에 기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 ODA 개선단 활동에 기대…ODA 패러다임부터 바꿔야"**
박인규 : 결국 ODA에 대한 사회 인식이 달라질 필요성이 또 한번 제기되는 것 같다. 그 얘기는 뒤에 더 자세히 하도록 하고 일단 ODA와 관련된 일관된 정책 및 평가 기능을 갖추는 일을 어디서 주도권을 가지고 추진하는 게 가장 적절한지부터 짚어보자.
권 율 :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원조 정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사업의 계획, 평가, 관리 체제가 구축이 안 된 점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수원국이 아주 신속하게 요구하는 것에 반응하는 식의 원조는 아주 잘 한다. 그런데 사전에 계획을 하고 사후에 관리를 하는 체제가 구축이 안 돼 있다보니 전형적인 한탕주의, 성과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정부도 문제가 되다보니 대외무상원조기본법, ODA 헌장을 추진하는 등 체제를 마련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4월에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5년간 ODA 예산을 두 배로 늘려 2009년에는 국민 총생산(GNI) 대비 0.1%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결의를 했는데 정부도 양적으로 ODA 예산을 증액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ODA 예산의 증가와 함께 원조 사업의 효과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걸 정부 역시 절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7월에는 국무조정실 산하에 ODA 개선단도 만들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자. 우리나라처럼 유ㆍ무상 원조 사업을 추진하는 기관이 분리돼 있는 곳이 독일, 일본이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은행을 통해 기업을 규율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해오면서 은행의 역할이 커졌고 이런 특징이 원조 사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일단 이런 틀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게 어렵다면 정교한 원조 정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원조 사업 평가 등을 위한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투명한 운영과 관련 정보 공개, 시민사회의 감시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손혁상 : 정부에서 ODA 개선단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주 고무적이다. 하지만 원조 정책의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원조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를 정립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원조를 이렇게 바라본다, 이런 걸 목적으로 한다, 이런 데 대한 나름의 답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왜 원조 대상으로 특정 국가와 특정 사업을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도 국제 사회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원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이집트, 러시아에 집중되고 있다. 일본의 원조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식의 원조는 군사ㆍ경제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제 경제 성장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의 원조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최근의 원조가 좀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조를 수혜 받는 수원국 시민의 삶의 조건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여부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런 것들을 고려할 수 있도록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정부에서 원조 정책을 마련하는 분들에게 아쉬운 것도 이런 것이다. 참여연대에서 ODA 헌장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도 이런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방향 제시를 나름대로 해보기 위해서다.
***"정치권 시민들 호응 없이는 원조 개혁 요원하다"**
박인규 : 두 분 얘기를 듣다보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느껴진다. 정부에서 개선안을 만들어도 정치권과 시민들의 호응이 없다면 탄력을 받을 수 없다.
권 율 : 아까 조 의원이 국회에서 ODA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고 했는데 사실 그 동안 ODA 예산을 늘리는데 가장 발목을 잡아왔던 게 국회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도 결식아동이 얼마나 많은데' '지역구 다리는 안 놓고 인도네시아에 다리 복구하는 게 뭐냐',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국회의원들이 해왔으니 ODA 예산이 늘어날 수가 없다. 좀더 넓고 긴 안목으로 ODA 정책을 볼 필요가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그런 수준이 안 되는 것이다.
개선단에서 전반적인 원조 정책의 방향과 제도의 얼개를 짜겠지만 사실 국회와 정부의 관계가 아주 중요하다. 그게 긴밀하게 안 되는 것도 그간 원조 사업이 취약했던 이유 중 하나다. 한 가지 예로 ODA 예산은 다음 해로 이월이 안 된다. 그러다보니 ODA 사업을 신중하게 운용하다보면 연말에 예산이 남아서 담당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외국에서는 4~5년간 원조 프로그램을 짜놓고 그 프로그램에 맞춰서 연간 지출액 한도액을 마련하고 그것을 국회가 승인한다. 그럼 원조 계획과 수원국의 사정에 맞춰서 신축적으로 운용할 여지도 생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년에 급하게 확보된 예산을 써야하니 우리 사정에 따라서 엉터리로 집행하는 경우도 많고 ODA 선진국과 공동으로 원조를 할 때도 좋은 사업인데도 불구하고 지속성이 보장이 안 되니까 1년만 하다 빠지는 경우도 있다.
조승수 : 그런 동네 술판에서나 나올 수 있는 얘기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국회에서 공공연하게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끄러운 일이다. 아까도 공언했지만 최소한 17대 국회는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장은 마련될 수 있다고 자부한다. 큰 걸음은 못 나가더라도 잰 걸음이라도 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국회의원들부터 토론하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시민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하다.
***"국제 사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100% 차관"**
박인규 : ODA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을 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가입을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권 율 : 이제 OECD에 가입한 지도 10년이나 된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했듯이 원조 정책과 관련해서는 준비가 하나도 돼 있지 않다. DAC는 ODA 계획, 실행, 평가까지 모든 면에서 질적 변화를 요구하는 데 이것은 정부가 당장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워낙 ODA 개혁이 지지부진하니까 DAC 가입을 이유로 정부를 압박해 온 측면이 큰데 이제는 좀더 체계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향후 5년 정도 DAC 가입에 필요한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시민단체와 함께 원조 전략이 담긴 ODA 헌장도 마련하고 국회와 협력해 중ㆍ장기 계획을 세우고 개발 NGO들의 역량도 축적하는 등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이런 준비 없이 덜컥 가입했다가는 국제 사회에서 망신만 당할 가능성이 크다.
조승수 :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 1987년부터 EDCF를 집행한 대가로 개발 사업을 수주한 기업들의 명단을 뽑아봤더니 삼성, 대우, 현대, LG가 전체 집행액의 90%를 차지한다. 이 정도면 거의 정경유착 수준 아니냐. 감사원에서도 특정 기업이 수혜를 입는 방식에 대해서 지적이 있었지만 계획, 집행, 평가 단계가 엉망이니 구조적으로 이런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박인규 : 그런 일이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EDCF 차관이 100% '구속성 차관(Tied Aid)'인 데서 비롯되는데 이런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권 율 : 분석 결과를 보면 '비구속성 차관(Untied Aid)'를 하는 ODA 선진국들도 100억 달러를 원조를 하면 70억 달러는 다시 본국으로 환류 된다고 한다. 공정 경쟁을 해도 경쟁력이 있으니까 수주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구속성 차관'을 하는 나라들 사이에서도 원조를 주고 70%가 환류가 되는 게 과연 원조냐 하고 계속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예 100% '구속성 차관'으로만 주니까 국제 사회에서 '인도주의' 이런 말을 꺼내기가 민망한 상황이다. 더구나 그 수혜도 중소기업 등이 받는 게 아니라 특정 재벌 기업에게 집중되니…….
박인규 : 현실적으로 바꿔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조승수 : 한꺼번에 '구속성'을 '비구속성'으로 제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계적으로 목표를 정해서 '비구속성'의 비중을 높여 가는 게 필요하다.
권 율 : 국제적인 논의 수준에서는 2001년에 일단 최빈국에 대해서는 구속성 ODA를 금지하기로 했다. 최빈국은 UN이 정한 네팔, 라오스, 방글라데시와 같은 49개국을 말한다. 이들에게는 원조를 주면서 부담을 주지 말자는 취지로 OECD 국가들이 결의를 한 것이다. 권고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일종의 ODA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다.
한 가지 딜레마는 이러다보니 우리나라 같은 나라들이 이런 최빈국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국가들이 그런 최빈국들인데 그 나라들을 도와주려는 국제 사회의 결의가 오히려 이런 최빈국에 피해가 돼 돌아오는 게 현실이다.
***"시민 교육 전제되지 않으면 '원조 피로' 현상 막을 수 없어"**
박인규 : 가장 중요한 것은 원조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환기하고 의식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권 율 : 사실 개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원조라는 게 오늘, 내일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다. 원조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ㆍ교육이 전제되지 않으면 당장 '많은 원조를 했는데도 왜 아프리카에는 저렇게 굶은 사람이 많은 거냐. 도대체 얼마나 더 쏟아 부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거냐', 라는 식의 문제제기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원조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지속적인 개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당장 198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원조 피로' 현상이 발생한 것도 이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쏟아 붓긴 했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선진국 국민들이 원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 실행, 평가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속에서 원조는 계속 증액되고 그 효과는 제자리걸음이면 국민들이 저항하지 않겠나. 그럼 정부는 더 보수적이 될 테고, 원조 정책은 오히려 뒷걸음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ODA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면 1년에 고작 2~3건 정도다. 이렇게 ODA의 문제점을 짚은 기획 기사는 <프레시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 기회로 분기마다 ODA와 관련된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또 시민들에게 ODA와 관련된 관심을 지속적으로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손혁상 : 사실 원조 사업이 당장은 국내 문제와 분리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국내 문제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성격이 있다. 예를 들어 원조를 통해서 국민들이 나눔의 기쁨을 공유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국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비로소 국내에서도 나눌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가 대개 국내에서도 사회적 연대성이 형편없다. 이런 점에서도 원조에 대한 교육은 꼭 필요할 것이다.
***"신흥 원조국 한국에 거는 기대 커…국제 사회에서 위상 높이는 계기로 삼자"**
박인규 : 지금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짚어봤는데 국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존경 받는 일원이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각 영역별로 과제를 점검해보자.
조승수 : 일단 ODA 개선단의 안이 연말에 나오면 그 개선안을 중심으로 다시 국회,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바람직한 안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경험적으로 보면 정부는 보수적인 기준을 가지고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시민사회가 좀더 원론적인 입장에서 주장을 하고 그것이 국회에서 수렴되는 게 바람직하다. 국회가 이런 사회적 토론이 촉진되는 논의의 장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손혁상 : 아직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원조에 대한 관심의 환기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일단 원조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참여연대 등을 중심으로 준비하고 있는 ODA 헌장도 그런 일환이다. 또 정부에서는 부처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만큼 추진력이 안 생길 수도 있는데 시민단체가 그것을 적절하게 보완하는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권 율 : 사실 국제 사회에서 신흥 원조국인 우리나라에 거는 기대가 굉장히 크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의 경험, 축적된 개발 노하우가 국제 사회에서 상품 가치가 높은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조 정책의 쇄신을 통해 개발도상국이 자조 노력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을 꾸준히 해나간다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조승수 : 졸부는 교양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돈을 쓰는 것도 졸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비웃음을 당하는 거다. 언제까지 '천민 자본주의' 꼬리표를 달고 국제 사회에서 행세할 수 있겠는가? 원조 개혁은 우리가 천민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그 시금석이다.
박인규 : 원조 개혁 이제 시작이다. 연말에 ODA 개선단의 안이 나오면 다시 한번 원조 정책의 방향을 점검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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