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를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한 편에 불과 몇 십 년 만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데 대한 선망의 시선이 있다면, 다른 한 편에는 경제 성장에 비례해 의식 수준이 따라가지 못한 데 대한 멸시의 시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공적 개발 원조(ODA) 역시 이런 두 가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제 사회는 ODA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우리나라가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뒤치다꺼리 하느라 갑자기 무상원조 비율 높아져**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ODA 꼬리표를 달고 개발도상국에 대한 유상 원조를 시작한 것은 1987년 대외경제협력기금(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EDCF)을 만들면서부터다. 무상 원조는 이보다 좀 더 늦게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하면서 본격화됐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유ㆍ무상 원조 비율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2002년까지 계속 2~3배 이상 높던 유상 원조 비율이 2003년을 기준으로 갑자기 역전된 것. 비밀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에 있었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들 지역의 복구를 위해 우리나라가 부담한 비용 1억3890만 달러를 포함시키다보니 무상원조 비율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무상 원조보다는 20년 가까이 ODA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EDCF의 집행 내용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1987년~2004년 동안 집행된 EDCF 총액은 1조5949억100만 원이며 그 중 대부분은 댐, 상하수도, 도로, 병원, 환경설비 등 개발도상국의 개발 사업을 위한 차관으로 공여됐다.
총 39개 국에 EDCF가 집행됐는데 아시아 국가들이 60%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이 총액의 11%로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으며 스리랑카(8.5%) 인도네시아(8.2%) 베트남(8.1%) 방글라데시(6.0%) 등이 뒤를 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동남아시아의 마지막 독재 국가로 꼽히는 미얀마가 총액의 3.5%로 역시 주요 EDCF 수혜국이라는 사실이다.
***삼성-대우, 유상원조 집행액 50%를 개발사업 수주로 도로 챙겨와**
EDCF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삼성을 비롯한 일부 재벌 기업이 특혜를 받아 온 사실도 확인됐다. <프레시안>은 지난 1987년~2004년 EDCF를 집행한 뒤 차관을 받은 개발도상국으로부터 각종 개발사업을 수주한 상위 10대 기업의 명단을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실을 통해 입수했다.
여기서도 삼성은 단연 돋보였다. 삼성은 총 28건을 수주해 EDCF 집행액의 31.9%(5088억2900만 원)를 차지했다. 여기에 20건을 수주한 대우의 16.6%(2648억2700만 원)를 더하면 48.5%로 EDCF 집행 액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현대 12.7%(2017억2600만 원)와 LG 9.6%(1530억9900만 원)까지 고려하면 전체 EDCF 집행의 70.8%, 즉 3분의 2 이상이 결국 삼성, 대우, 현대, LG의 재벌 기업으로 돌아간 셈이다.
10대 기업 전체로 확대해서 보면 집중도는 더욱 높아진다.1987~2004년 34개국에 EDCF가 집행됐고 35개 기업이 진출했지만 상위 10대 기업이 전체 EDCF 집행액의 93.3%(1조48881억100만 원)을 다시 챙긴 것이다.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재벌 기업들 외에도 메디슨, SK 건설, 한국과학기술공업협동조합, 시너지비전, 경남기업, 쌍용 등이 포함된다.
***원조 집행, 기업 정보에 크게 의존…최빈국 원조는 '상환 능력' 이유로 취소하기도**
특정 기업에 이렇게 수주가 집중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EDCF 집행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어서 일부 재벌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중장기적인 계획 하에서 체계적으로 EDCF를 집행하는 게 아니다 보니 이미 현지에 진출해 있는 기업이 제공하는 정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개 EDCF 집행 과정에서 특정 기업이 개발도상국의 신청부터 심사ㆍ승인 과정까지 공공연하게 개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원칙적으로 EDCF 집행을 심의ㆍ의결하도록 돼 있는 재경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한 EDCF운용위원회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지난 12월 감사원 감사 결과 이 운용위원회는 지난 2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또 특정 기업에 EDCF 집행에 따른 수주가 집중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했으나 이 역시 현재 구조에서는 바꾸기가 쉽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ODA는 '어려운 지구의 이웃을 돕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사업'이라기보다는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단적으로 현재 집행되는 EDCF의 100%는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그 사용 용도가 사전에 확정돼 우리나라 기업에게 해당 사업의 수주를 강제하는 '구속성 차관(Tied Aid)'이다.
실제로 ODA를 우리 정부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다. 우리나라는 1999년 유럽의 최빈국 몰도바의 통신망 현대화 사업에 EDCF 차관을 지원하기로 한 뒤 결국 채무 상환 능력 악화를 이유로 사업을 취소했다. 이에 대해 감사원 역시 '사업의 취소'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애당초 차관 회수가 어려운 나라에 대해 지원키로 했던 결정 자체를 문제로 지적했던 것.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ODA를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미국, 일본의 길을 좇는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한국식 ODA' 국제 사회에서 '퇴출' 압력**
우리나라와 같은 ODA는 이미 국제 사회에서 '퇴출'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는 지난 2001년 ODA를 제공할 때 일단 최빈국에 대해서는 '구속성 차관'을 강요하는 것을 금지하는 권고를 채택했다. 이 권고는 DAC 회원국들에게 2002년 1월 1일까지 최빈국에 대한 각종 ODA를 비구속성 차관(Untied Aid)로 전환토록 했다.
이런 DAC의 권고는 지난 10여 년간 진행된 국제 사회의 지난한 토론의 결과물이다. 이미 DAC는 1996년 ODA의 주요 과제로 △2015년까지 하루 1달러 미만의 극빈층을 2분의 1로 감축 △무상 초등교육 실시 △여성 평등권 신장 △모자 보건 강화 △환경 파괴 경향 역전 등을 선정했다. 지난 2000년에는 DAC가 선정한 주요 과제를 세계 차원으로 확장한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 MDGs)'를 선정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때문에 OECD 국가들은 DAC의 권고를 사실상 일종의 강제성 있는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정부-시민사회 ODA 개선 위한 잰 걸음…"시민 관심이 중요해"**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국제적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진행하고 있을까?
우리 정부 역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2009년까지 ODA 예산을 9억 달러로 늘려 국민 총소득(GNI) 대비 0.1% 수준(현재는 0.06%)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워 놓았다. ODA 관련 제도 개선을 위해 국무조정실 산하 'ODA 개선 기획단'에서 연말까지 관련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20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지구촌빈곤퇴치시민네트워크'를 결성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연대 단체는 빈곤 국가에 대한 ODA의 양과 질의 개선 운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시민·사회단체의 입장을 담은 대외원조기본법(가칭) 마련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해 재경부, 외교부 등 ODA 관련 부처와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등은 개발도상국 원조와 관련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은 'ODA 헌장'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가장 큰 난관은 ODA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 부재다. 국회에서 ODA 관련 문제를 공론화할 계획을 갖고 있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와 국회는 물론이고 시민들마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ODA 선진국들이 ODA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고 토론하는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MDGs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UN 총회에서 "세계 공동 번영의 질서를 위해 각종 분쟁과 억압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와 차별 해소를 위한 범세계적 프로젝트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와 함께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힘이 좀 생겼다고 미국, 일본 등 강대국들이 그 동안 보여준 ODA 집행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가는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혹시 우리가 경원해 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 대통령도 이번에 힘주어 언급한 '제국주의의 유산'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이제 '우리 안의 제국주의'를 우리 스스로 자가 진단해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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