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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델몬트와 카길을 절대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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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델몬트와 카길을 절대 이길 수 없다"

희망을 찾는 농업 살리기<13> 한국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2)

<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최근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그 바람직한 개선책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농지법이 일부 개정되면서 농업정책의 미래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레시안>은 이번 농지법 개정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공론화에 불을 지폈던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경제학 박사)의 글을 두 번에 나눠 싣는다. '농지제도 연석회의'와 함께하는 '희망을 찾는 농업 살리기' 기획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편집자>

***한국의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2)**

***농업정책, 국민적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농업을 살리기 위한 사회적 흐름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논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초점을 잡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농지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 국민들이 동의해야 한다. 농업이 일종의 사회적․생태적 안전판 역할을 한다면, 아직도 '한계농지'부터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현 제도에 대해 다양한 수정과 보호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이건 1990년대 일본의 '리조트법'이 만들어냈던 10년간의 경제 장기공황으로부터 상당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투기도 하고, 또 어떻게든 지역에 시설물을 투자해서 관광으로 한 나라의 국민경제가 좋아질 수 있고, 또 사람들도 만족한다면 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공황을 격발시킨 1929년의 플로리다 해안에 대한 투기에서부터 가깝게는 일본의 리조트와 골프장 러쉬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투기가 국민경제를 안전하고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한 적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는, 농업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조금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일반적인 산업 논리의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지불비용'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수십 헥타르-우리나라의 규모농은 6헥타르를 목표 크기로 하고 있다-에서 헬기로 농사짓는 미국 농민들도 직불제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보조금의 수혜를 받고 있으며, 유럽으로 넘어가면 가격보조, 물량보조, 소득보조 등 WTO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힘껏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정책 방향이다. 신자유주의적 이해방식에 의하면 이 유럽이나 미국의 농민들도 모두 퇴출 대상이지만, 그렇게 함부로 농업에서 철수하는 선진국은 없다. 규모를 줄이거나 약간의 조정은 있지만, 참여정부의 농정처럼 전면적으로 농업에서 철수하고, 심지어 농업에 지급되던 보조금을 '건설산업 보조금'으로 전환하는 예는 없다.

쉽게 말해, 추곡수매에 지급되던 정도의 금액을 생태보조금이나 친환경농업 직불제 같은 방식 혹은 도시빈민 귀농프로그램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한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도 21세기의 세계적 흐름인 생태농업 방식으로 전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WTO 내에서 농업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유로 7만 호의 규모농을 제외하면, '각자 알아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농업 부문의 보조금을 농촌지역 도로와 아파트 건설에 지원하는 참여정부의 농정은 야만에 가깝다. 이 상태에서 음식 생산과 유통을 잘못하면 일벌백계를 하겠다는 '식품안전기본법' 논의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농업 정책과 괴리된 식품 정책은 뿌리가 없고, 세계적인 통합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의 친환경농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쌀의 경우는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경우 농약으로 농사짓는 관행농에 비해 생산성 하락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유기농 논쟁은, 유기농이 경제적으로는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지만 생산성이 줄어 국민을 전부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수입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에 의해 주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한 쌀에 관한 한 생산성의 급격한 하락과 같은 기술적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 1> 쌀 재배 유형별 경영 성과 비교

***농업 전략을 새로 수립하자**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에게 집중돼 있다. 물론 이 때의 관료란, 이미 정부에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지고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농협과 또 다른 자기이익 그룹인 농업기반공사와 같은 국가 기관들을 포함해서 일컫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IMF 신봉자에 가까운 재경부, 왜 농업이 어려운지를 설명하기에 급급한 농림부와 산하기관들, 그리고 대규모 관행농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농후계자 그룹의 이해관계만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농업은 잘 설명되지 않고, 또 사회적 논의를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새로운 이해단체로 지역개발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앞 다퉈 세우고 있는 지역의 개발공사들도 문제다. 물론 이들의 뒤에는 지역의 대규모 토지보유자와 외지의 비농민 토지소유자들이 숨어 있다. 농림부 관료들이 토지투기를 목적으로 정책을 수립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내기 시작한 지역 정부와 그 뒤에 숨은 토호들의 이해는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와 궤를 달리하고 있다.

적어도 친환경농업을 뒷받침하고 있는 20만의 도시 생활협동조합원들은 소비자로서 농정에 참여할 수 있는 훌륭한 파트너이고, 이들은 실제 오랫동안 훈련된 소비의 안전판들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족농업론자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한 개방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 통로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토생태라는 국가의 또 다른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그룹이다. 국민일 수도 있고, 시민일 수도 있고 혹은 다음 세대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변할 수 있는 그룹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이렇게 다른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논의구도와 정책구도가 필요하다. 답이 없는가? 물론 지금처럼 '규모농만이 살 길이다'라고 무조건 6헥타르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다면 정말 농업에는 답이 없다. 모든 농촌이 관광으로 잘 살 수 있다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는 보조금의 여력을 전부 도로 만들고 번듯한 건물 몇 개 짓는데 사용해서는 정말 농민은 물론 농촌지역에 대해 답이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외국 모델을 참고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국민투표를 통해 '친환경농업' 원칙을 수립한 스위스가 한 가지 참고대상이 될 수 있고, 우리 식으로는 식약청을 중심으로 환경부와 농림부를 통합해 광우병 파동을 친환경농업 전환으로 극복한 영국의 데프라(DERFA: Department of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도 또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위스형이나 영국형 혹은 덴마크형 모두 국민의 의지가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적인 대전환을 만든 기본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이 농림부와 재경부 사이의 닫힌 논의구조만으로는 국민의 의사가 정책에 반영되거나 국가적 지혜를 모을 길이 없다.

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먼저 2004년 2월의 '농업․농촌 종합대책'의 골간을 형성하는 '6헥타르 정책'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수십 헥타르에서 헬기로 농사짓는 미국의 규모농과 유전자조작 농산물 앞에서, 6헥타르 정책은 그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골리앗에 맞서기 위해 다윗의 지혜를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몸집을 불려가고자 하는 격이다. 이는 농업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농업의 퇴행만을 가져올 것이다.

10년간 119조 원을 7만 호의 덩치 불리기에 사용하고, 나머지 돈은 농촌지역 도로와 건설에 사용한다는 이 종합대책의 정신이 구현된다면, 농업은 살아날 수가 없고, 농민도 죽을 것이며, 오로지 국토의 투기장화만 촉진될 것이다.

우리나라 농가당 보유토지는 3500평이다. 이 구도는 다행히도 세계적으로 21세기의 농업형태라고 하는 '유기농'에 우연히도 가장 적합한 구조다. 부부가 열심히 농사짓는다고 할 때, 유기농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술적 한계가 3000평 정도로 추정되고, 쌀의 경우는 오리 또는 우렁이 농법 등 비교적 통일화된 방법으로 7000평까지 가능하다고 추정된다.

전략은 간단하다. 현재의 농업구조에서 얼마나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친환경농업' 체계로 전환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이 때 단기적으로 부족한 농가소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전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걸 WTO의 용어로 설명하면, '동일제품(likelihood-product)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유기 재배한 농산물과 그렇지 않은 농산물이 동일한 제품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추세는 점차 동일한 제품이 아니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남은 사회적 과제는 누가 농사지을 것인가의 문제다.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라도 농업이 우리나라에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추진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스위스의 경우 전체 농산물의 10%까지 유기농 전환에 성공했는데, 이 변화가 최근 5년간에 이뤄졌다. 보통의 OECD 국가들이 10% 수준까지 올리는데 보통 5년이 걸렸다. 이 수준이면, 주요 곡물과 주요 축산물은 유기농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고, 일단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점차적으로 50% 이상이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적 여력이 생겨난다. 스위스의 경우 농업이 GDP의 2%를 차지하는데, 농업 및 농업관련 고용은 총고용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제 농업 정책은 '농업 산업' 혹은 '농민' 정책에서 사회정책의 중요한 고리로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드주의를 경과한 사회에서 '더욱 더 산업화'의 기제로는 고용과 사회의 언저리에서 밀려난 빈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계가 대체한 작업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그야말로 '자연'이 감싸 안는 셈이다. 대지의 품이 넓다는 얘기는 문명사적으로 전 자본주의 단계에서 생겨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산업화가 끝까지 간 사회에서 농업을 새롭게 이해하며 생겨난 새로운 철학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압축성장으로 인해 아직 자연과 농업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탈-포드주의로 넘어간 셈이다. 그래서 전도된 농민 정책과 왜곡된 '농촌지역' 정책만 있을 뿐 전체 사회체계 내에서의 21세기 '농업의 버퍼 역할'에는 미처 정책적 목표화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친환경농업으로의 전환이 대세다. 단순히 음식을 안전하게 먹자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자리 나누기(job-sharing)'로도 미처 소화할 수 없는 대량실업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농업 그리고 '노동집약적 농업'인 유기농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국민소득 1만불이면, 충분히 안전한 음식을 먹고, 유기농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국민 10%를 소화할 정도의 경제 여력이 된다. 기술혁신으로 더 고도화를 추진하는 산업 부문과 '전문화'를 추구할 부문 그리고 노동집약적으로 전환할 부문들이 각기 분화돼야 한다. 전 부문에서 노동투입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단조로운' 진화만으로는 너무 많은 국민들이 불행해진다.

그래서 21세기에 '농업'이 OECD 국가들에서 새로운 질문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지난 5년 동안 OECD 국가들에서 현재진형형인 논의다. 하다 못해 중국도 전국토에 걸친 부동산 거품빼기와 함께 농민들에 대한 세금 경감을 논의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농정과 농업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함몰돼 있다.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농업에서는 현재 '안전'이 최고의 경쟁기준이 되어 있다. 이제 우리 농업에서도 화학비료와 살충제 그리고 제초제를 빼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화학품들이 사라진 빈 구석을 사람들의 손이 채우게 되는 것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유기농업으로의 대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튕겨져 나온 신자유주의의 패배자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도피처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농업이다.

제발이지 헬기로 농사지으면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구시대의 아름다운 그림을 제발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한다. 델몬트를 절대로 이길 수 없고, 카길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6헥타르'라는 헬기로 농약 뿌리는 70년대 미국 농업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지우면, 그때부터 우리나라 농업의 새로운 진화가 시작된다. 헬기에 대한 환상 속에서 농업은 끊임없이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가 필요한가 아니면 국민서명이 필요한가? 정부가 명예롭게 '6헥타르' 정책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농부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도시 빈민화된 철거민의 이름으로, 전국의 18% 아토피 아이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20만 생협 조합원의 이름으로 정부가 명예롭게 '친환경농업'에 대해 고민할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투기꾼이 아니고, 또한 공업화와 산업화를 지켜낸 대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지혜롭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에게는 농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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