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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로도 제국주의로도 설명 안 되는 농업정책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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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로도 제국주의로도 설명 안 되는 농업정책의 딜레마"

희망을 찾는 농업 살리기<12> 한국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1)

<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최근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그 바람직한 개선책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농지법이 일부 개정되면서 농업정책의 미래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레시안>은 이번 농지법 개정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공론화에 불을 지폈던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경제학 박사)의 글을 두 번에 나눠 싣는다. '농지제도 연석회의'와 함께하는 '희망을 찾는 농업 살리기' 기획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편집자>

***한국의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1)**

***농지법 개정 한 주일 만에 허점 찾아낸 투기꾼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공조로 6월 임시국회에서 41건의 법안이 상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0개의 법안이 통과됐다. 사건의 중대함에 비해 별로 시선을 받지 못하던 법안 하나가 이 중에 포함되었는데, 이게 '비농민의 농지소유 허용'의 내용을 담고 있는 농지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은 실질적인 논의가 전개되지 못한 상황에서 1년 정도 국회 근처에서 표류하고 있었고, 발표된 뒤 파주, 포천에서 여주, 이천을 지나 충청도 일대를 건너 이 땅의 끝인 해남과 구례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다섯 배 많게는 열 배 정도 농지 가격을 올려놓았다. 뒤늦게 '농지제도 연석회의'라는 전농과 민주노동당을 포함하는 시민단체 연대회의가 결성돼 이 법안의 저지에 전력투구했는데, 농지법 자체의 통과를 막지는 못하고 보존지역과 도시 인접지역의 농지투기를 어렵게 하는 선에서 법안을 처리되게 만들었다.

이제 농업과 농지를 둘러싼 다음 논의는 농업기반공사가 주체가 될 '농지은행'의 운영방안이다. 농지은행이 실질적으로 농지 트러스트와 같은 선진국 형태가 될지, 아니면 그야말로 비농민이 농사를 짓는다는 법률적 명분만 만들어주는 '농지 세탁'의 기구로 전락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벌써 며칠 사이에 농지투기 세력들은 이 새로운 법률안의 맹점을 벌써 찾았고, 충청권의 비토지거래허가구역인 충북 진천, 음성과 충남 보령, 서천 등이 틈새시장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시작했다. 수도권의 비토지거래허가구연인 가평, 이천, 여주, 양평, 옹진, 양천 같은 곳도 '미래 투자가치'가 충분히 있다면서 투기를 부추기고 있다. 이들 투기세력 앞에선 농림부도 시민단체도 그리고 농민단체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백면서생일 뿐이다.

정부도 약간의 양보를 했고, 시민단체도 워낙 뒤늦게 나서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막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 주일 만에 개정 농지법의 허점을 찾아낸 농지 투기세력들의 전문성은 정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처음 개정안을 낼 때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직접 나서서 앞으로 비농민들도 농지를 소유하게 됐다고 온 국민이 알도록 발표했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전면 개방한 것은 아니라고 할 때에는 정부의 그 누구도 내용을 상세히 발표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농지제도 자체가 갖는 소소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농업이라는 것이 21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그 성격 규정이다. 비농민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자는 정부의 농지법 개정안이 이 시기에 그렇게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쉽게 표현하면 "헬리콥터로 농사를 짓자"는 정부의 농정 기조에 따른 것이다. 비유를 사용하자면 헬기로 농사지을 곳은 얼마 안 되니까 나머지 땅은 아파트를 지어 판다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노무현 정부의 농업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21세기 한반도에서 헬기 농업이라는 것이 옳은 정책일까?

***농업은 생태적 안전망의 보루인가, 마지막 투기처인가**

제주도의 개방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현재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개발시대에 중앙정부는 산업만이 살 길이라고 했다. 물론 제주도에서는 별 산업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군사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1990년대부터 제주도에는 '관광만이 살 길'이라는 궤변이 휩쓸고 갔다.

40개에 달하는 골프장이 제주도로 몰려갔고, 도로를 열심히 놓았고, 제주도에는 해마다 오는 그 태풍 속에서도 유사 이래 한 번도 없던 홍수가 이 도로들로 인해 생겨났다. 이 기간 동안 소위 '외지인'의 토지 보유가 급격히 늘었고, 60% 이상의 토지가 외지인의 소유로 전환됐으며, 그 중 20% 정도가 서울시민의 소유라고 한다. 실제 제주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 기간이 갈등이 기간이고, 발전과 번영이 아니라 상대적 몰락과 해체의 기간에 더욱 가까웠다. 제주 아라중학교에서 시작된 제주도의 친환경급식은 '생명 제주'라는 거대한 질문의 시작이었지만, 이것만으로 문제를 풀기는 여전히 어렵다. 제주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성공할 경우 그 혜택은 대부분이 오히려 지가상승으로 인해 1990년대 이후에 헐값에 제주도 땅을 사들인 외지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고, 제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다.

이런 문제가 21세기에 한국 농업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의 한 실정이다. 농업을 산업으로 볼 것인가 혹은 "국토생태 보존사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노동력의 버퍼' 역할로 볼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 속에서 현재의 농업은 현실적으로는 농지를 택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마지막 투자처-혹은 투기처-로 전락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이데올로기와 WTO라는 통상의 이데올로기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갈등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인 셈이다. 농지를 개발지로 전환해 토지수용을 받거나 택지로 판매하는 것은 그 어떤 벤처나 특수산업보다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이다. 하루만 미리 알 수 있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증권이나 경마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가정도 필요 없다. 개발이 가능한 농지를 사들이고, 정부와 지방정부에게 개발을 요구해 개발하도록 만드는 것은 적어도 2004~2005년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고소득 사업 방식이고, 증명되고 입증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투기 경제'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발생한 '이윤'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지대'는 토지의 농업생산성에 의해 결정되지만, 우리나라의 농지 가격은 얼마나 농사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가, 즉 정부 표현대로 '한계농지'에 가까울수록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도로가 날 만하거나 기업도시가 생겨날 확률이 높을수록, 달리 말해 '농업진흥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고립되어 있고 또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 더욱 가깝고 농사를 짓기 어려울수록 농지가격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투기를 하면 생활이 나아질 수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국민경제'가 튼튼해지지 않는다는 구성의 오류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관료 사회가 튼튼한 것은, 정치인들은 부패해도 관료들은 부패하지 않았다는 믿음이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금 관료들을 믿기 어려운 것은 실제로 농업정책에 대해 가장 상부기관 격이던 재경부의 부총리를 비롯한 많은 고위 관료들이 선의든 혹은 고의든 농지투기를 했고, 이런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속았다"인 셈이다. 비영농인이 농지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원칙은 비영농인은 '투자'를 위해 농지를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투기'를 위해 보유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추곡수매라는 보조금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도 수익률 1%를 내기 어려운 농업이 '투자'를 유치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들어오는 돈은 그야말로 99% 투기 목적이다. 그래서 농지 보유를 비영농인에게 개방하기에는 더 많은 정책적 안전장치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만으로도, 미 제국주의 이론만으로도 농업은 설명되지 않는다**

농업에 대해 우리나라에는 딱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정부의 이데올로기는 편하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미 제국주의 이론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방향은 다르지만,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는 WTO라는 매우 특별한 국제기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와 관련돼 있다. 정부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나라는 통상 국가이고, 수출을 통한 공산품의 교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이므로, 농업을 개방하고 다른 상품에 대한 수출로 경상수지 흑자를 만드는 길만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규모농'이라는 특별한 장치가 덧붙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농민의 상당수는 WTO를 미국이라는 특별한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일종의 미국의 하부조직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WTO의 농업 개방을 미 제국주의의 명령이라고 이해하고, 따라서 이들로부터 농업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이고 여기에서부터 일종의 '민족 농업'이라는 담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게 되는 이데올로기 구조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농업의 복합성은 신자유주의만으로 혹은 이에 대한 정반대의 민족농업 담론만으로는 잘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농업이 갖고 있는 국토생태에서의 '생태 안전판'으로서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을까? 농지가 아파트로 바뀌었을 때 벌어지는 생태계 교란의 장기적 기능이나 혹은 골프장으로 바뀌었을 때 심지어는 공장 지역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복합적인 효과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벼농사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논이 지역별로 혹은 권역별로 어느 만큼의 생태계 보존기능을 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안전효과를 발생시키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논이 아파트로 바뀐다면 생태계의 종다양성이 심각하게 떨어질까? 아파트에도 쥐와 바퀴벌레가 살고, 또 사람이 살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다양한 곤충과 동물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농약을 심하게 쳐서 벼와 보리 외에는 살고 있지 않은 생태계보다 오히려 아파트가 더 많은 종다양성을 기록할 수도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 농업이 보장해주는 '식품안전'에 대해서도 선험적으로 '우리 것이 안전할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확실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식료안보 혹은 식량안전이라고 표현하는 소위 food security에 대한 지수화도 거의 이뤄져 있지 않다. 잔류 농약란의 최소기준이 과연 적합하게 설정된 것인가, 그리고 가공식품에서의 화학첨가제들의 실제 보건효과는 어떠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웰빙'이라는 상표를 달고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의 식품산업에서의 비율도 잘 파악되고 않은 상황에서 미세 성분의 기능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조금은 과도한 요구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먹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농업과 농업 관련 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어느 정도의 고용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지 혹은 이러한 고용전환이 사회적으로 유리하고 가능할 것인지도 정책적으로 검토된 바 없다. 다만 인구통계에 근거해 농민 고령화가 문제라는 단편적인 평가만이 농업이라는 특별한 산업의 고용구조에 대해 알려진 거의 전부다.

중국에서는 농민에 대해 소득세를 비롯한 국세를 경감해주는 정책 방향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어떻게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물량보조에 더해 새로운 보조금 정책을 시행할 것인지 연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곡수매'라는 형태로 진행되던 농업 부문에 대한 보조금을 어떻게 '농촌지역' 개발에 대한 '건설 보조금'으로 전환할 것인지에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어떻게 농업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것이냐는 문제와 미 제국주의의 민족침탈에 대해 어떻게 농업을 지킬 것이냐는 문제가 대립하는 동안 농업이 갖는 다양한 생태적이며 사회적인 효과들, 그리고 21세기 한국 경제에서 농업이 가질 수 있는 소위 '버퍼'의 역할들에 대한 논의는 숫제 뒷쪽으로 빠져 있는 셈이다. 농업 부문이야말로 지나친 현대와 오래된 현대가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정작 21세기 한국에서의 농업이 가질 수 있는 기능과 위상에 대해서는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한 형국이다.

그 상황에서 '경자유전'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정부의 농지법 개정안이 제기된 셈이고, 이 작은 제도의 변화가 농업에 대한 무관심의 안전핀을 건드린 셈이다. 좋든 싫든 농업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이데올로기만으로 21세기의 한국 농업은 설명되지 않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만으로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에는 '농업정책의 대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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