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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비판하려면 사실관계부터 알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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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부여당, 비판하려면 사실관계부터 알고 하라"

[프레시안 리포트] 6일 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을 만나 보니

6일 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을 시내 모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정부여당이 정 총장을 겨냥해 무차별 융단폭격을 퍼붓고 있던 시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4일 “지난주의 제일 나쁜 뉴스는 대학별로 논술고사를 본고사처럼 되도록 출제하겠다는 뉴스”라는 발언을 신호탄으로, “재정적-행정적 수단 및 국회 차원의 법제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울대 등 대학의 통합교과형 논술을 빙자한 본고사 부활을 막겠다”는 우리당과 교육부간 6일 당정합의, “우리는 (서울대를) ‘초동진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는 정봉주 우리당 의원의 군사정권형 발언, “서울대는 비겁하게 논술 핑계 대지 말고 차라리 대놓고 본고사를 부활하겠다고 하는 편이 떳떳하다. 한마디로 서울대의 행태는 강남 일부 특권층에 기대 뭘 해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의 매도성 발언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 같으면 울분을 참기 힘든 모욕의 연속이었으나, 정 총장은 특유의 여유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어휴, 전북 부안에 학생들 농촌활동 하는 데 격려하러 갔다가 당정합의 발언을 듣고 기자들 20여명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정 총장은 "김진표 교육부총리와는 이미 만나 다 끝난 얘기인데, 왜들 뒤늦게 그러는지…"라며 여권의 뒤늦은 난리법석의 배경에 석연치 않아 하는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국립총장은 임기 전에라도 대통령이 해임할 수 있다"**

정 총장은 이날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양하게 학생을 뽑겠다는 서울대의 계획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대학의 일은 대학에 맡겨야지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곤란하다. 학문과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2008학년도 대입 방침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정 총장은 기자와 만나서도 자신의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한 뒤 "국립대학 총장은 교수들이 선출하기는 하나, 임기 전에라도 대통령이 해임할 수 있다"는 말로, 이번 일로 만에 하나 중도사퇴하는 일이 있더라도 소신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강력 시사했다. 정 총장의 임기는 내년 7월까지다.

오래 전부터 임기가 끝나면 곧바로 강의실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혀온 정 총장은 "촌놈이 서울대교수를 거쳐 서울대총장까지 해봤으면 됐지, 더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여당이 학원 관계자보다도 사실관계를 모르니…"**

정 총장은 이어 정부여당이 퍼붓고 있는 공격의 허구를 하나씩 파헤쳐나갔다.

정 총장은 우선 논술 시험이 특목고 학생등에게만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과 관련, "서울대의 특기생 선발에 특목고가 유리하다고 말한다. 논술을 도입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한다. 특목고 학생들의 성적이 높으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정 총장은 며칠 전 안진훈 MSC영재교육원 대표가 모 신문에 기고한 ‘일반고 출신, 서울대 입학 불리하지 않다’는 글을 예로 들며 "정부여당이 학원 관계자보다도 사실 관계를 모르고 있다"고 탄식했다.

안 대표는 이 글에서 “많은 입시 관계자들은 이번 서울대 입시안이 특목고에 유리하리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으나 2005학년도 서울대 정시모집에서 의예과 합격자 가운데 일반고 출신 비율이 지난해 80%에서 올해 92.8%(64명)로 크게 늘어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고 출신은 지난해 11.4%에서 2.9%(2명)로 크게 감소했다. 법대의 경우도 일반고 출신이 지난해 78.5%에서 올해 81.2%(117명)로 증가한 반면 외고 출신은 지난해 15.3%에서 13.9%(20명)로 줄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일반고 출신이 수능과 내신(1단계 전형)은 물론이고 논술과 면접(2단계 전형)에서 더 강세를 보였다”며 “의예과의 경우, 1단계 전형에서 합격한 과학고 출신 8명 중 2명만이 2단계 전형에 합격했다. 법대의 경우도 1차 전형을 통과한 일반고 출신이 2차 전형에 51.7% 합격한 반면 외고 출신은 43%만 합격했다”고 덧붙였다.

안대표는 이같은 ‘예상밖 결과’와 관련, “올해부터 서울대가 논술에서 단순히 지식을 묻기보다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뒤 “암기한 모범 답안보다 깊이 있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평가하기 위해 글자수와 시험시간을 늘렸다. 점수 격차가 큰 항목 역시 ‘창의력’이었다”는 서울대 관계자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자녀를 일반고에 보내 내신 부담을 덜면서 다양한 책 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입시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 총장은 안 대표의 글을 "서울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글"이라고 평가하면서 "정부여당이 비판을 하려면 사실 관계부터 제대로 파악한 뒤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부, 특목고 왜 만들었나 반성부터 해야"**

정 총장은 이렇듯 정부여권의 '특목고 특혜론'을 일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 '특목고 정책'의 근본적 맹점을 날카롭게 질타하기도 했다.

정 총장은 "몇 해 전부터 해 온 얘기지만, 각종 논란을 빚고 있는 특목고 문제는 정부가 근본부터 바로잡아야 풀린다. 정부가 특목고를 만든 애초 목적이 무엇인가. 외국어고를 만든 것은 국제화시대를 맞아 우수한 외교관, 통역가 등을 배출하기 위한 게 아니었던가. 과학고를 만든 것도 우수한 과학인재를 조기 발굴해 과학중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당초 원칙에 충실하면 되지 않겠나. 외고 출신들이 진학 가능한 학과를 외교 등 연관부문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과학고 출신들은 대덕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등으로 제한해야 옳지 않겠나. 이렇게 하면 지금처럼 특목고 출신들이 의대를 지망하고, 법대를 지망하는 폐단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특목고가 당초 취지와 달리 ‘대입 학원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겠냐"고 정부의 직무유기를 지적했다.

정부가 '특목고 특혜' 운운하기에 앞서, 현재 당초 설립 취지에 크게 어긋나 있는 특목고 관리부터 제대로 하라는 지적이었다.

***"<어린 왕자> 같은 식의 논술문제 나와선 안돼"**

정 총장은 서울대가 도입하고자 하는 '논술'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했다.

"몇 해 전 <어린 왕자>에 대해 묻는 논술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은 학생만이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대단히 잘못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99권의 고전을 읽고도 유독 <어린 왕자>만 읽지 못한 학생은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과 대여섯 권만 읽고도 그 중에 운 좋게 <어린 왕자>를 읽은 학생은 붙었을 것이다.

물론 시험에는 어느 정도 운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논술 문제가 이런 식으로 출제돼선 안 된다. 특정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로 당락이 결정되게 해선 안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은 책을 읽고 인간과 사회와 사물, 세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학생에게 유리한 문제가 출제돼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인재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종합적, 창의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인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술 문제를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교수들이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것이며, 이것이 논술의 성패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정 총장은 "요즘 논술학원에 학생과 학부모의 문의가 밀려든다고 들었다. 물론 학원에 다니면 유리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준비중인 논술은 학원 가서 요령을 배운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일축했다. 그는 "현재 준비중인 논술은 통합교과형이다. 한 과목만 잘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과목을 고르게 잘해야 풀 수 있는 문제다. 아울러 교과서뿐 아니라 초등학교 때부터의 다양한 독서가 결정적 작용을 할 것"이라며 "서울대 논술이 교육현장에 보내는 메시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복잡한 생각을 하는 훈련을 쌓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총장은 향후 논술 도입 과정에 서울대가 풀어야 할 난제를 솔직히 밝히기도 했다.

정 총장은 "논술에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주요 과제는 ‘채점’의 공정성이다. 내 경험만 봐도 객관적 채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안다. 오전에 27점이라고 연필로 채점해 놓고 점심식사 하고 돌아와 오후에 다시 보면 21점짜리밖에 안되는 것으로 보여 채점 점수를 고친 적도 있다"고 토로한 뒤 "채점 하는 교수들의 더없이 진지한 접근태도가 요구되며, 필요하다면 외부 전문인력을 양성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대학이 '기술자'를 양산해선 안된다"**

정 총장과는 3년전 총장에 선출된 직후 아직 '당선자' 시절이던 2002년 6월에도 만나 그의 포부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정 총장이 꺼낸 화두가 '논술'이었다.

정 총장은 "요즘 서울대 신입생들을 보면 문과는 문과 지식밖에, 이과는 이과 지식밖에 모른다. 전체를 보는 훈련이 안돼 있다"며 "이런 지식인은 자칫 잘못하면 사회에 해악이 될 위험성이 크다. 법조 기술자, 군수 기술자 등 지식인이 갖춰야 할 가치관이 없는 '기술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어려서부터 두루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한 가치와 시각을 접해 균형감 있는 시각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며 "서울대가 이런 방향의 논술 문제를 내 학생들을 뽑으면 일선 교육현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논술 하면 고등학교에서는 국어선생님 몫으로 돼 있으나 어불성설"이라며 "미술선생님도, 음악선생님도, 과학선생님, 사회선생님도 평소 학생들에게 해당 분야의 양서를 소개하고 모든 현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정 총장은 또 "이렇게 쪼개진 교육을 받다보니 신입생들의 글쓰기, 자기생각 표현하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신입생들에게 글쓰기 교육부터 가르쳐야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후 학내에 글쓰기 센터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6일 "한마디로 서울대의 행태는 강남 일부 특권층에 기대서 뭘 해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매도'에 가까웠다.

정 총장은 총장 취임 후 지역학생할당제를 도입해 서울대에 강남권 학생들이 급증하던 현상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정 총장은 이 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깊은 신뢰 관계를 맺어 온 김종인 전 경제수석, 김정태 당시 국민은행장 등 지인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구했고, "굿 아이디어다. 하려면 몇 % 선발한다는 식으로 찔끔 시늉만 내지 말고 30~40% 화끈하게 도입하라"는 조언에 따라 강남 등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이를 도입했다. 나날이 심화 조짐을 보이던 서울-지방간 '학력 양극화'를 차단하기 위한 혁명적 조처였다.

정 총장은 한국의 대표적 경제석학인 동시에 몇 안되는 '올곧은 지성' 중 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역대 정권은 그에게 한은총재, 금감위원장, 경제부총리 등 각종 직책에의 영입 제안을 했으나 그는 이를 고사했고, 노무현 정부도 출범 직후 그에게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노 정부의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 등에 대한 정 총장의 비판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자, 그를 바라보는 정부여권의 시선을 싸늘해졌고, 급기야 작금의 사태가 발발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정부와 학계는 갈등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갈등을 빚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정 총장에게 가해지는 정부여권의 융단폭격은 정도를 넘어섰다. 예의를 지키며 서로의 이견과 오해를 풀어나가는 노력이 더없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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