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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문제 해결로 '적록 연대' 성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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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에너지 문제 해결로 '적록 연대' 성공하자"

이필렬의 '생태와 인간' <5> 환경-노동운동의 성공적 연대를 위하여

22일 우리나라에서도 '적록 연대'의 깃발이 최초로 올랐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에너지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고 '에너지노동사회 네트워크'를 공식 출범시킨 것이다. 이 연대 모임에는 에너지대안센터, 환경운동연합 등 대표적인 환경단체와 한전ㆍ한국수력원자력노동조합, 한국발전노조 등 민영화 반대 목소리를 높여온 노동운동의 핵심이 참여하고 있어서 그 활동이 더욱더 주목된다.

사실 독일에서는 '적록 연대'를 넘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적록 연정'이 실현된 바 있으며, 북아메리카에서도 캐나다ㆍ미국의 일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새로운 산업 구조를 노동ㆍ환경운동이 공동으로 모색하는 '올바른 전환(Just Transition)'이라는 이름의 양측의 연대('blue-green alliance')가 부분적이나마 시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모두 다 197~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양자의 연대는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역사적인 '적록 연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온 이필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적록 연대'를 위해서 극복해야 할 과제를 <프레시안>에 기고해왔다. 이 글은 22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창립 심포지엄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이 글에서 양측 연대가 '에너지 전환'이라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에 주목하면서 이 연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업 문제, 산업 구조 개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상호 노력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 동안 노동운동과 환경운동 모두 간과해왔던 것이어서 이후 '에너지노동사회 네트워크'의 활동 방향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편집자.

***한국사회의 에너지 전환에서 노동과 환경 공동의 과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거리두기의 연원**

우리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근본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달성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운동도 중요한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해서 거리를 두려 한다.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아마 가장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은 생태주의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노동운동을 꽤 회의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노동운동이 자본과의 '공동 운명체'라는 위상을 벗어던지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권혁범 교수는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계급적인 접근 중심의 진보적 입장에 대하여 "오늘날 환경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제한적인 부의 생산과 확대 재생산의 구조라고 한다면 기존의 진보적 입장이 갖는 한계는 뚜렷하다. 진보적 관점은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에 기초한 거대산업체계가 무제한적으로 만들어내는 부의 재분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체계의 반생태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된다"고 지적하는데, 생태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환경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는, 개발을 통한 부의 확대와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량소비-대량생산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 단지 분배정의의 실현만을 강조한다면, 노동운동도 환경파괴적인 자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운동에서는 환경운동에 대해 계급적인 시각에서 의구심을 가지고 대한다. 환경훼손의 일차적인 주범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산업국가와 부유층인데, 환경운동은 이를 무시하고 환경훼손이 남과 북의 모든 국가, 남과 북의 모든 사람이 유의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환경파괴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적ㆍ구조적인 불평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르주아 계급에게 상대적인 면죄부를 주고, 이는 사회구조의 변혁에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시각이다. 환경운동이 인류전체에 적용되는 보편성을 내세우지만 결국 체제변혁을 가로막는 작용을 한다면 노동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환경운동은 체제유지적인 보수성을 지닌 자본봉사형의 운동일 뿐이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빈곤의 해결이 더 시급한 마당에 환경운동이란 배부른 사람들의 유희인 것이다.

환경운동이 노동운동을 보는 시각과 노동운동이 환경운동을 보는 시각은 모두 타당성이 있다. 환경운동이 세계의 계급적 구조, 한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는 비판이나 노동운동이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통한 부의 확대구조를 지속시키기를 바란다는 비판 모두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사람들끼리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근원적 목표에서 벗어나 자칫 계급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이나 환경파괴적인 양상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적당히 즐겁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자연환경의 보호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무시한다거나, 노동운동이 분배만을 최우선을 삼고 부의 확대과정에서 나타나는 환경파괴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장기적으로 두 운동 모두 목표에 가까이갈 수 없다. 부의 확대를 통해 환경이 극심하게 파괴되어가는 상황에서는 부의 분배가 결코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불평등이 아주 심한 상태에서는 생존을 위한 환경파괴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 최초의 만남**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상대방을 보는 의구심은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리고 개별 사안에 대한 접근 속에서 갈등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러한 갈등의 대표적인 예는 한국정부에서 추진했던 전력산업 사유화를 둘러싼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상반된 입장으로 나타났다. 노동운동은 사유화를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한국정부의 사유화 발표 초기에 환경운동은 전부는 아니지만 사유화도 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들은 노동운동의 사유화 반대에 대해서는 노동자들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행동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환경운동의 일각에서는 사유화를 통해서 한국전력 중심의 에너지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는데, 노동운동은 이러한 판단에 대해 지극히 나이브할 뿐 아니라, 결국 자본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상대를 향한 양쪽의 비판은 타당성이 있지만, 그 타당성은 일면적인 것일 뿐이었다.

환경운동은 지구화 시대 자본의 움직임 또는 IMF를 앞세운 자본의 음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를 하지 않고, 사유화가 되면 거대 완전 독점 기업 한국전력의 힘이 약화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정말 면밀한 분석을 거치지 않은 수준의-에서 사유화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반면에 노동운동은 그동안 전력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환경파괴에 앞장선 한국전력의 과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이나 언급 없이, 사유화가 어쩌면 그토록 공고한 권력을 지닌 한국전력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게 된다면…하는 '염원'을 '고백'한 환경운동을 나이브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유화 발표 초기에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은 여러 차례의 토론회에서 자기 입장만을 고수했지,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의견접근을 보려는 진지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사유화와 관련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서로 다른 입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사유화에 대한 노동운동의 저항이 2001년 초 수십 일간의 파업으로 전개됨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파업 상태에 돌입한 노동운동은 환경운동을 비롯한 다른 운동진영의 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고, 환경운동 또한 구속, 해고 등의 손해를 감수하며 수십 일간의 파업으로까지 나간 노동운동 진영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어떤 인정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둘을 맺어줄 수 있는 접점을 찾고 이 접점을 향해 나아가면서 조금씩 접근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 접점이 바로 넓은 의미의 공공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공공성',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접점**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접점이 된 넓은 의미의 공공성이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본연의 목표에 대한 상기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환경운동이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운동의 평등한 사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란 동일 세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간의 조화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의 핵심은 다음, 그다음 세대까지도 고려하는 지속가능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지속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사유화에 반대하며, 지속불가능한 에너지 수급체제의 기초인 원자력과 화석연료의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합의가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의 달성을 위해서 확립되어야 할 핵심적인 물질적 기반은 지속가능한 식량생산,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 지속가능한 물 수급일 것이다. 세 가지 모두 정치사회적인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그 중에서도 에너지 수급은 가장 크게 그러한 관련 속에 놓여 있다. 현재 에너지 수급은 전기는 물론이고 동력ㆍ난방원 모두 국가나 거대자본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식량의 경우 한국 국내의 생산에만 한정할 경우, 생산만은 대부분 소농의 지배아래 있고 유통에도 소규모 사업자가 끼어들곤 하는데, 에너지의 경우는 생산과 유통 모두 소규모 사업자가 발 딛을 틈이 없다. 전기나 석유ㆍ가스 모두 전 국민은 거대 공급자가 주는 것만을 돈 주고 받아쓸 수 있을 뿐이다.

구조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에너지수급과 관련해서 환경운동은 국가나 거대기업을 상대로 반환경적인 에너지수급에 대항하여 요구하고 투쟁하는 방식의 운동을 해왔고, 노동운동은 거대 에너지사업체 안에서 강한 노조를 결성해서 자기 이익과 관련된 요구를 관철하려는 방식의 운동을 해왔다. 에너지 수급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 그 지속가능성의 달성을 위한 실천 운동은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전력산업 사유화 발표가 난 후에도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은 주로 사유화가 자기들의 요구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따지고, 사유화가 그들의 이익-일자리 유지-에 얼마나 반하는가를 따졌던 것이다.

전력산업 사유화는 국가에 대한 노동계의 싸움으로 발전하여 노동운동 진영이 크게 피해를 입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환경운동에 대해서는 에너지수급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좀더 깊이 숙고하게 만들고, 노동운동의 경우 폭넓은 의미에서의 에너지 관련 공공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환경운동으로서는 전력산업이란 국가소유 독점기업을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사유화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의 달성을 저해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노동운동은 진정한 공공성이란 노동자의 권익확보를 포함해서 시민전체, 더 나아가서는 인류전체의 보편적인 권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에너지 '전환'에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 모두 에너지 수급에서의 공공성을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 시스템의 확립이라고 하는 데 동의하게 된 마당에, 이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러한 시스템의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일 것이다.

노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국가의 에너지 정책 수립에 어느 정도 관여함으로써 에너지 시스템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설을 설치하고 확대하는 일에 직접 동참하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 수립에의 관여는 환경운동의 경우 에너지 정책에 대해 제안하고, 비판적 견해를 표명하고, 자문위원회 등에 참여하고, 재생가능에너지 이용의 확대를 요구하는 등 어느 정도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운동은 사유화와 같이 노동계와 관련된 중대한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대한 일은 있어도 좀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일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국가의 원자력 확대를 통한 원자력 의존정책, 대규모 화력발전단지 건설 정책에 대해 비판하거나, 효율이 높은 도시형 열병합 발전이나 재생가능에너지 이용의 확대를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확대나 대규모 화력발전단지 건설 등은 전력산업 노동자들의 좁은 의미에서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 시민과 다음 세대에게 반드시 도움을 주는 일은 아니다. 화석연료의 고갈, 기후변화, 핵폐기물의 축적을 고려하면 지속불가능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환경운동 쪽에서 보면 원자력 발전 확대와 대규모 화력발전단지 건설은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자신의 좁은 입장만을 고집할 경우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각각의 입장을 살리면서도 지속가능성을 살리는 방향의 공동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두 진영에 모두 유리하기 때문이다.

환경운동 쪽에서는 원자력발전을 절대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원자력 발전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전기를 사용하고 있고(40% 이상), 원자력발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생계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계에서 원자력 발전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경운동 쪽에서는 원자력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원자력 자체가 악이라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할지 모른다. 원자력과 원자력 산업 종사자를 이렇게 확연히 가를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러나 원자력 종사자가 원자력과 자신을 가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원자력 발전은 절대악이라는 식의 접근은 노동계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접점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뿐인데, 노동계가 빠진 상태에서 환경운동이 추구하는 지속가능성,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의 달성이 어려워질 것은 분명하다.

에너지 산업, 전력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제를 단순화해서 원자력이 위험하고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를 10년 안에 모두 폐쇄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부에서 밀어붙이고 환경운동 진영에서 강하게 지지하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원자력 발전 노동자들은 결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극단적인 반대 투쟁을 벌일 것이고, 전력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할 것이다. 결과는 뻔하다. 결말이 어떻게 나든 서로 엄청난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발생시키는 방식은 지속가능성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가능성이란 경제적, 사회적인 면의 화합도 추구한다. 그렇다면 치유되기 어려운 사회적 갈등을 낳으면서 원자력을 없애는 것은 지속가능성의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원자력 노동자, 전력산업의 노동자를 포괄할 수 있는 방안이어야만 지속가능한 에너지 수급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97%이상을 공급하는 원자력과 화석연료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다. 석유는 5년 안에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고, 원자력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50년 정도 계속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의 확립은 노동계에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도 달성해야 하는 과제이다. 길어야 수십 년간 유지될 현재의 체계, 쇠퇴해가는 이 체계에 매달리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낳을 것이 분명하다. 에너지 산업 관련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계를 고집하는 것은 사회전체에 대단히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석유가 부족하고,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이 크게 올라가고, 일자리가 줄어드는데 혼란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전적으로 원자력과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아니 이것들을 유난히 고집하는 정책이다. 이렇게 가면 노동계, 환경운동, 사회 전체가 커다란 손상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확립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 '윈-윈'의 연대를 위해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공동과제는 지속가능한 에너지체계의 확립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접점을 찾고, 이 공통의 기반위에서 함께 실천을 하는 것이다. 원자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재생가능에너지를 확대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에너지체계의 기초이다. 원자력과 화석연료의 위험과 한계를 인정한다면 노동운동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순조롭게, 갈등의 발생을 가능한 한 적게 하면서 원자력으로부터 벗어나느냐는 것이고, 얼마나 무리 없이 화석연료로부터 재생가능에너지로 넘어가느냐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을 당장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고 1백년, 2백년 동안 원자력 발전을 할 것처럼 마냥 확대하는 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이란 변수가 중요해진다. 원자력 발전을 언제 모두 없앨 것인가 그 시점을 찾아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을 통해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의 확립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이 시점을 공동으로 찾아나가야 한다. 30년 또는 50년 안에 원자력 발전을 없앨 수 있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 기간 안에 햇빛과 바람으로 원자력을 대치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시점이 정해지면 그때는 함께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사업, 재생가능에너지를 널리 퍼뜨리는 사업을 공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의 확립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함께 전개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조직은 이러한 사업을 아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환경운동의 이상은 많은 사람이 이 사업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게 두 운동이 결합해서 에너지전환운동을 벌여나가면 꽤 커다란 상승효과가 얻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지속가능한 에너지수급체계의 확립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성공시점이 빨라질 것이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공동으로 에너지전환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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