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갈등관리기본법'을 입법 예고하는 등 참여정부의 사회 갈등 예방 대책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각종 시민 참여 제도의 본래 취지와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검토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시민 참여 욕구 증가하는 데 반해 참여를 위한 제도적 틀은 없어"**
최근 참여연대에서 독립한 시민과학센터는 14일 오후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사회 갈등 예방을 위한 시민 참여 제도 소개 강좌'를 열었다. 이날 강좌에서는 사회 갈등 예방을 위해 시민 참여의 필요성을 짚고,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시민배심원(citizen jury), 시나리오 워크숍(Scenario workshop), 공론조사(deliberative pall) 등 여러 가지 시민 참여 제도의 구체적인 예를 소개했다.
조현석 서울산업대 교수(행정학과)는 "탈권위주의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에서 사회적 갈등이 급격히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과거의 갈등이 주로 노사 갈등과 같은 분배 문제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었다면 최근의 갈등은 환경, 안전, 위험 등 갈수록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시민들의 참여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이런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이 약하고 제도적 틀이 마련돼 있지 않는 것이 최근 각종 갈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며 "정부가 뒤늦게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기반을 둔 새로운 시민 참여 제도를 갈등관리기본법에 반영한 것도 이런 사정 탓"이라고 설명했다.
‘심의 민주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 숙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정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상태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성찰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에 의사를 반영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이다. 숙의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숙의 민주주의가 보편화되면 시민들이 투표하는 날 거수기 역할만 하는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과 숙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성찰성'이 증가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일반 시민들도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능력 있고, 그 이유도 충분해"**
조현석 교수는 특히 "핵폐기물처리장,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이슈의 경우에는 더욱더 숙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정책의 경우에는 막대한 예산의 재원이 시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나오는데다, 그 결과 역시 시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당수의 과학기술 정책의 경우 개발에 따른 이득은 일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전유되는 반면, 부정적인 결과는 사회적 비용으로 시민들에게 전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조 교수는 "특히 현대 과학기술 시대에는 과학기술의 개발과 이용에 따르는 위험을 줄이고 이런 위험이 사회적으로 취약 계층에게 불평등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들의 통제력이 강화돼야 한다"며 "이런 새로운 '기술 시민권'에 입각해 연구 의제 선정, 연구 예산 배정 등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설명했다.
김동광 박사(고려대 강사)는 흔히 과학기술 정책과 같은 전문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인 시민의 참여는 불필요한 비용만 야기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우려를 꼼꼼히 반박했다.
김 박사는 "일반 시민들이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과학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기존의 통념은 1960년대 이후 계속 반박돼 왔다"며 "요즘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과학 대중화'와 같은 시민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식의 구호는 구미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시민은 단순히 전문가의 의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실생활 경험과 세계관에 비춰보며 그 의견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재구성한다"며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발성과 능동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특히 그들이 환경이나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 받을 때 그들의 능력은 더욱더 극대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민 참여 제도, 갈등 해결보다는 신뢰 회복과 사회적 역량 성숙에 초점 맞춰야"**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갈등관리기본법과 그 안에 포함된 각종 시민 참여 제도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조현석 교수는 "정부가 공청회와 같은 구태의연한 참여 방식만으로 시민들의 참여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른 것은 고무적이지만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전제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숙의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데 현재 행정 정보, 절차가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한계가 명백하다는 지적이다.
김두환 시민과학센터 시민참여연구팀장은 정부의 발상 자체를 문제 삼았다.
김 팀장은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는 갈등을 예방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장하는 데 그 중요한 기능이 있다"며 "즉 갈등을 통해 민주적 절차가 도입되고, 과정이 투명해지며,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고, 서로 간의 이해가 증가하고, 그 결과 형평성이나 상호 신뢰 수준이 높아지는 등 갈등의 순기능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논의되는 시민 참여 제도"라고 지적했다.
김 팀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의욕적으로 시작한 정부의 한탄강 댐 갈등 조정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도 '빠른 갈등 해결'에만 치중하면서 신뢰 회복과 사회 역량의 성숙이라는 갈등의 순기능을 도외시한 데 큰 원인이 있다"며 "갈등관리기본법에서 제시된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 역시 '빠른 갈등 해결'을 위한 기법으로만 활용된다면 그 순기능이 부각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이날 강연회에서는 그 동안 정부와 각종 언론을 통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부정확하게 제시돼 온 합의회의, 시민배심원, 시나리오 워크숍, 공론조사 등이 구체적인 예와 함께 자세하게 소개됐다. 각각의 제도를 시민과학센터의 자문을 얻어 간략히 소개한다.
***합의회의**
합의회의는 선별된 일단의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혹은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여 최종적으로 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하나의 포럼이다.
1987년 덴마크에서 처음 도입된 이 모델은 1990년대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 도입된 것을 필두로 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 15개국 이상에서 50차례 이상 시행된 대표적인 숙의적 시민참여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 1999년(생명복제), 2004년(국가 전력 정책의 미래) 세 번에 걸쳐 개최됐다.
합의회의의 첫 번째 단계는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집단들을 대표할 수 있도록 선발된 15명 정도의 시민패널에게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이들이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항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후 3일에 걸쳐 계속되는 본회의 단계에서는 시민패널이 다양한 전문가 의견들을 듣고 이를 취합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시민패널이 자신들이 청취하였던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평가한 기초 위에서 정부가 취해야 할 행동을 권고 형태로 제출하게 된다. 이 권고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태도와 기대 그리고 우려 등을 정치인들과 정책 졀정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시민배심원**
시민배심원 제도는 미국의 제퍼슨 센터에 의해 1970년대 중반 경에 확산된 시민참여 프로그램인데, 이미 독일에서도 1969년부터 '플래닝 셀'이라는 명칭으로 1969년부터 이와 유사한 모델이 시행돼 왔다. 국내에서는 울산광역시 북구에서 음식물 쓰레기 시설 입지를 둘러싼 갈등을 시민배심원 제도를 통해 해결한 바 있다.
시민배심원 제도는 공공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무작위로 선별된 시민들이 4~5일간 만나서 주의 깊게 숙의하는 절차로 구성된다. 하나의 시민배심원단은 일반적으로 12~24명으로 구성되고 보통 시민들을 대표해서 일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심원단에 참여하는 대가로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부여된 과제에 대해 해당 전문가들과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해결책을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숙의 결과 나온 최종 결과는 정책 권고안의 형태로 정책 결정자들과 일반 시민에게 공개된다.
시민배심원 제도는 합의회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시민배심원에서는 다루는 의제를 주관 기관이 미리 몇 개의 핵심 질문으로 정하는 반면, 합의회의는 조정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시민패널이 스스로 의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시민배심원은 최종 보고서 작성 책임이 주관 기관에 있는 반면, 합의회의는 시민패널이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다르다.
***시나리오 워크숍**
시나리오 워크숍은 1990년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새로운 시민 참여 제도이다. 1991년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d이 '환경 관리 해역 설정을 위한 지역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도를 변형해 사용한 예가 있다.
이 제도는 지역의 개발 또는 지속가능한 발전 전망을 수립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참여하는 공동의 토론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수렴해가는 모임이다. 일반적으로 지역 주민, 공무원, 기업, 전문가 등이 균등하게 참여한다.
시나리오 워크숍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특정한 주제를 둘러싸고 미래에 있을 법한 일련의 시나리오들이다. 각각의 시나리오에는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사회적,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서 기술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마련된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은 주민, 공무원, 기업,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참여하는 1박2일의 워크숍 기간 동안 각 그룹별 또 그룹 간 섞여서 토론을 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1993년도에 덴마크에서는 생태친화적 도시 개발을 위한 시나리오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생태친화적 도시 개발의 장애물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다양한 참가들이 함께 논의함으로써 향후 시행할 도시 개발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미리 도출하고자 했다.
***공론조사**
공론조사는 1988년 미국에서 개발된 조사 방법으로, 기존 여론조사와 흡사하게 대표성을 갖는 국민들을 선발한 다음 이들에게 해당 이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하게 한 후 참여자들의 의견을 다시 조사해 표피적인 의견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의견을 수렴해 공공 의사 결정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1994년 영국에서 처음 실시된 이해 세계 각국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실시됐고,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산 관통터널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로 2003년에 처음 제안됐으나 불교계의 거부로 무산된 적이 있다.
공론조사의 첫 번째 단계는 여론조사와 흡사하게 2~3천명 정도의 표본을 대상으로 해당 이슈에 대한 의견 조사를 실시한 다음, 이들 중에서 성, 연령, 지역을 감안해 다시 2~3백명 정도를 선발한다. 이렇게 다시 선발된 2~3백명에게는 해당 이슈에 대한 찬반 주장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참여자들이 스스로 해당 이슈를 숙지하고 참여자들이 무작위 소집단에 참여해 해당 이슈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전체 토론회에서 전문가에게 질문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참여자들이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뒤 다시 2차 의견 조사를 실시해 최종 '공론'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공론조사는 단순 여론조사와는 다르게 1차 의견 조사와 2차 의견 조사의 결과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94년 영국에서 '범죄 대응 방안'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1차 의견 조사 때는 "범죄자 수감이 효과적이라는 방안"을 지지하는 이들이 57%로 나타났으나, 2차 의견 조사 때는 38%로 줄었다. 1996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전력 공급'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에서도 1차 의견 조사에서는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을 위해 매월 1달러 이상의 전기 요금을 인상하는 것"에 대해 58%만 찬성했으나, 2차 의견 조사 때는 81%로 늘었다.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할 기회를 준 결과 해당 이슈에 대한 상이한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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