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공포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에 이어 캐나다, 호주, 영국 중앙은행이 줄줄이 기준금리 인하 대열에 나선 가운데, 한국은행도 기준금리 인하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핀셋 양적완화' 정책에 한은이 나설 수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13일 오전 한국은행은 기자단에 전격적으로 "12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후 금통위원 간 추가 협의회를 갖고 임시 금통위 개최 필요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임시 금통위 개최가 결정된다면 이를 추가 공지하기로 한은은 밝혔다. 임시 금통위는 금통위 의장(한은 총재)을 비롯한 2명 이상의 금통위원이 요구한다면 열 수 있다.
실제 한은이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를 조정한다면 사상 세 번째 사례가 된다. 앞서 지난 2001년 9월 19일(0.5%포인트 인하), 2008년 10월 27일(0.75%포인트 인하) 한은은 임시 금통위를 가진 바 있다.
임시 금통위를 연다면 그 목적은 기준금리 인하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은 상황인 데다, 사태 장기화로 인해 실물 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물경제는 물론, 금융시장마저 흔들리자 시장에서는 한은이 유동성 공급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날 한국 금융시장은 글로벌 증시 폭락의 영향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한국거래소는 코스피와 코스닥에 20분간 매매를 중단하는 서킷브레이커와 프로그램 매도 호가를 일시 정지하는 사이드카를 동시 발동했다. 한국거래소가 두 시장에서 동시에 서킷 브레이커를 발동한 건 사상 처음이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짐에 따라 원화 가치도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이날 오후 2시 54분 현재 달러-원 환율은 1218.30원을 기록하고 있다. 장중 기준으로는 1225.0원까지 치솟아 2016년 3월 3일(1227.0원)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금융시장 파국보다 심각한 건 실물경제다. 코로나19 감염 확대를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회에 안착하면서 실물 경제가 사실상 멈춘 상황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상황이 이어진다면 자영업은 물론, 중소상공업의 연이은 위기로 파국이 이어지는 건 시간 문제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항상공회의소는 지난 12일 현재 △추경안 규모(11.7조 원)를 크게 뛰어넘는 대규모 추경 편성 △중견기업 유동성 공급 △임시공휴일 지정 △세액 공제 등과 더불어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전달했다. 이제 한은이 나서서 시중에 자금이 유통되도록 물꼬를 열어야 할 때라는 뜻이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미 유동성이 지나치게 시장에 풀린 상황에서, 한은이 단순히 기준금리를 인하한다고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중소상공인에게 지원이 이어질 지는 불투명하고, 되레 넘치는 부동자금을 포함해 부동산 버블 위기만 더 키울 수 있다는 이유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기준 금리를 낮춘다면 외환시장에 악영향이 올 수 있고, 무엇보다 과연 경제 상황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는지 의문인 상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며 "만일 기준금리 인하로 인해 유동성 함정에 빠진다면, 오히려 위기를 빠져나오기가 더 힘들어 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동성 함정이란 시장에는 현금이 넘쳐흐르는 데도 기업의 생산, 투자와 가계 소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아 실물 경제가 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상황을 일컫는다.
지난 10일 금융투자협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달 말 현재 단기자금인 머니마켓펀드(MMF) 설정액은 1월 말보다 15조2000억 원 증가한 143조6000억 원에 달했다. 월말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이미 시장에 돈은 흘러넘치고 있다는 뜻이다.
오랜 기간 한국 경제는 시중 부동자금이 부동산에 일방적으로 몰려 큰 문제가 돼 왔다. 부동산 급등이 이어지자 정부가 관련 대책으로 규제를 강화했으나, 유동자금이 다른 투자처로 흐르는 대신 고여만 있는 상황에 가까워졌다. 자칫 섣부른 기준금리 인하는 실질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위기만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하준경 교수는 "자칫 섣부른 기준금리 인하로 부동산에 돈이 더 몰린다면 한국 경제의 잠재 위험은 더 커질 수 있다"며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단순히 유동성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 교수는 "전 세계가 10년 가까이 실물경기 침체를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유동성 공급으로 버텨오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며 "통화와 환율, 채권 등 전 분야가 동시에 중요한 만큼, 한은은 신중한 행보를 보여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 대신 한계기업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등의 '핀셋 양적완화'에 나설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오창섭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이날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자산버블로만 이어진다는 비판이 큰 상황에서 한은이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거나 한계기업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이 거론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오 연구원은 그 근거로 한은이 이날 임시금통위를 검토한다며 기준금리 인하보다 공개시장조작 여부를 먼저 거론했다는 점을 꼽았다. 한은도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부담감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한은의 유동성 공급보다 일부 지자체가 직접 나선 '재난기금' 등의 직접적 재정 공급이 더 필요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전북 전주시의회는 총 556억5000만 원 규모의 긴급 추경예산안을 증액·의결해 중위소득 80% 이하에 해당하는 일용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직자 등 취약계층 5만여 명에게 1인당 52만7000원을 공급하는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정책을 실시하기로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결정했다. (☞관련기사 :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전국 최초 스타트...1인당 52만 원)
'당장 유동성이 필요한 계층'에 일단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맞춤형 대책이다. 하 교수는 물론, 세계의 적잖은 석학도 동의하는 대책이다. 앞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는 세금 감면 등의 간접적 방식이 아니라, 직접 현금을 지급해 당장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쓰도록 하는 부양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관련기사 : 크루그먼 "코로나19 지원은 현금으로 해야")
한국에서도 여러 지자체장이 이 같은 긴급 현금 투입 정책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현재까지 이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추경 규모 확대에도 정부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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