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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원은 적절하게...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범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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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원은 적절하게...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범저의 삶

[표변하는 삶] 범저

"원한을 덕으로 갚아라(報怨以德)." 공자님 말씀 같다. 하지만 아니다. <노자>에 나오는 말이다. 그럼 공자의 생각은? 원한을 덕으로 갚으면 덕은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원한은 직(直)으로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으라(以直報怨 以德報德)"는 것이 공자의 논리다.

여기서 직(直)이란 정직이 아니라 치(値)로, 고어에서는 직(直)과 치(値)가 서로 통했다(중국어 발음은 같다). 그러니까 직으로 원한을 갚으라는 말은 해코지당한만큼의 값어치로 갚으라는 것이다. 분노에 휩쓸려 지나치게 앙갚음을 한다든가 (위선적으로) 덕을 베풀 것이 아니라, 원한은 공정하게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오한 깊이가 없는 것 같지만 인정에 따른 철학이라고 할 만하다. 이 구절을 보면 밥 한 그릇의 은덕에도 반드시 보답했고, 눈 한 번 치켜뜬 작은 원한도 반드시 갚았던(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 범저(范雎)가 떠오른다.
인재를 방출한 위나라

범저는 '구변(口辯)'으로 진나라에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소(양)왕을 도와 천하에 진나라와 대적할 적수가 없게끔 불세출의 공을 이룬 기재(奇才)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물러날 줄을 알아 천수를 누린 인물이다.

그는 위나라 사람이다. 위나라는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것으로 유명한 나라다. 결국 그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능한 장수이자 정치가인 오기를 초나라로, 변법가 공손앙(상앙)과 연횡책의 장의는 진나라로 '방출' 해버렸으니, 자기 스스로 무덤을 서서히 판 것과 다름없다.

범저도 원래 위나라 왕을 섬기고자 하였지만 유세하러 다닐 노잣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먼저 중대부 수가(須賈)의 문객이 된다. 수가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다가 제나라 왕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크게 상을 내렸다. 시기심에 불탄 수가는 범저가 위나라의 비밀 정보를 누설했다고 의심하고 귀국해서 재상 위제에게 모함한다. 이 때문에 범저는 태형을 당해 초죽음이 되었다가 간수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범저는 정안평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면서 장록으로 개명한다. 정안평은 때마침 위나라에 와서 인재를 구하던 진나라의 사신 왕계의 하인으로 들어가 범저를 추천한다. 범저의 재능을 확인한 왕계는 그를 데리고 진나라에 돌아가 왕에게 그를 천거한다.
왕권강화와 원교근공

진소왕은 처음엔 왕계의 말을 무시했지만 범저가 올린 간곡한 글을 보고 직접 그를 만난다. 알현할 기회를 잡은 범저는 단숨에 진소왕을 사로잡는다.

범저가 진소왕의 마음을 공략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국내적으로 기득권층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한 일이다. 진소왕은 56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 진나라 통일의 기초를 다진 유능한 임금이었지만, 당시 실권은 어머니인 선태후와 외삼촌인 양후(위염)에게 있었다. 범저는 소왕에게 이들의 제거를 대담하게 충언했다.

국외적으로는 삼진(한, 위, 조)을 넘어 멀리 있는 제나라를 치는 양후의 정책을 비난하고, 원교근공책을 펼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진소왕은 국정을 농단한 태후를 폐하고, 부유함과 존귀함이 최고조에 달했던 양후를 함곡관 밖으로 내쫒아 버린다. 그리고 범저를 재상에 임명한다.

애증이 분명한 범저

재상의 지위에 오른 범저는 복수에 착수한다. 먼저 자기를 모함한 수가에게 복수한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많은지 대부분 이 대목을 좋아한다. 나도 좋다. 단순히 통쾌한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온정이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지혜와 교훈이 담긴 이야기여서 더 좋다. <증제포(贈綈袍)>라는 제목의 경극이 있을 정도다.

원수가 제 발로 찾아오듯이 마침 수가가 진나라에 위나라의 사신으로 온다. 범저는 일부러 허름한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찾아간다. 수가는 그가 이미 진나라의 재상이라는 것도 모르고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측은한 나머지 두꺼운 ‘패딩’을 건네준다.

이 작은 행동 덕분에 수가는 나중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범저가 각 제후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는 고급스런 연회를 연 다음 그 자리에서 수가에게만 콩 섞은 여물을 먹게 하는 모욕을 주는 것으로 복수를 그쳤기 때문이다. 대신 위제의 목을 내놓지 않으면 수도인 대량을 도륙하겠다는 위협의 말을 위왕에게 전하도록 한다. 결국 위제는 조나라로 도망갔다가 궁지에 몰려 자살한다.

범저가 복수만 한 것은 아니다. 진나라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왕계와 정안평을 소왕에게 추천하여 각각 하동태수와 장군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자기 집 재물을 풀어 옛날에 곤궁할 때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일일이 보답했다. 은혜에는 은덕으로 보답한 것이다.

범저와 백기

범저는 원교근공책의 일환으로 먼저 한나라를 치고 나서 다시 조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가 조나라와 장평에서 벌인 전투는 전국시대의 역사적 전환점이 된 가장 중요하면서도 참혹한 전투였다. 진나라는 이 전쟁에서 완승한다.

이 전투 이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조나라의 군대를 장평에서 섬멸하여 사로잡은 병사 45만 명을 생매장한 것은 백기였지만, 조나라로 하여금 명장 염파를 책으로만 병법을 익힌 조괄로 교체하도록 막후에서 이간책을 펼친 것은 범저였다. 범저가 단순히 말재주만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기가 자신의 지위를 대체할 것을 걱정한 범저는 양후와 사이가 좋았던 백기를 모함하여 결국 죽게 만든다. 대신 자기 사람인 정안평을 추천한다. 하지만 정안평이 나중에 조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범저는 궁지에 몰린다. 당시 진나라의 법에 사람을 추천했을 경우 추천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추천한 사람도 같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범저는 삼족을 멸하는 죄에 해당했다. 진소왕은 여전히 그를 신임했지만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다

이 소문을 듣고 연나라 사람 채택이 진나라로 잠입한다. 불안한 범저의 속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범저에서 채택으로 전환되는 이 부분은 유명하다. 두 사람의 전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저가 실권이 없어서 울적한 진소왕의 마음을 읽고 그를 설득하여 일거에 진나라의 중앙무대에 등장한 것처럼, 채택도 부끄럽고 불안한 범저의 마음을 눈치 채고 그에게 용퇴를 권유한다. 삼황오제는 물론 하은주 삼대의 역사와 제자백가의 학설을 알고 있으며 '말빨'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범저가 일개 신인인 채택에게 설복당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특히 별다른 능력도 없으면서 왕도 아닌데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참 좋다. 주옥같은 말이 줄줄이 나온다.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은 그 다음이며, 이름이 욕되었는데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웁니다."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범저가 진소왕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듯이 채택도 범저의 마음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마침내 설복 당한 범저는 이렇게 말한다.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바를 잃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을 모르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는다." 범저는 채택을 추천하고 자신은 물러난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 진나라 재상을 찾아와 물러나기를 권한 사람이나, 그 말을 듣고 전격적으로 물러난 사람이나 모두 범접할 수 없는 일류의 인물들이다. 사마천의 말대로 "이 두 사람에게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곤욕을 참고 오랫동안 발분해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 '내공'이 일순간에 빛을 발한 것이리라. 변방에 치우쳤으며, 제자백가 한 명 배출하지 못했음에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은 범저와 같은 인재를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과감히 등용한 점에 있을 것이다.

추가: 범저를 범수로, 수가를 수고를 표기한 책이 눈에 띄는데, 범저와 수가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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