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는 천하의 현명한 선비이니, 나 같은 것은 도저히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소진) "저는 분명 소진에 미치지 못하오."(장의)
"일개 사기꾼에 불과한 소진을 통해 천하를 경영하고 제후들을 합종하려고 했으니 실패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소진은 제후들을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장의)
열전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귀곡 선생에게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장의가 소진보다 약간 늦게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1972년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발굴된 <전국종횡가서>라는 자료에 따르면소진과 장의는 같은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 아니고, 장의가 소진 보다 대략 25년 정도 앞선 인물이다. 발굴 자료를 기초로 열전의 내용을 의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 사마천이 발굴된 자료를 과연 보지 못했는지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분명한 것은 장의가 소진보다 '성공적'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성공한 장의와 실패한 소진?
일단 장의는 역사의 승리자인 진나라에서 두 번에 걸쳐 재상을 11년 동안이나 했고, 다시 고향 위나라로 돌아가서도 역시 재상의 지위에 두 번 올랐다. 한 번은 4년, 또 한 번은 1년 정도인데 현직 재상인 상태에서 죽었다. 한때 6국의 재상의 인수를 허리에 차기도 했지만 나중에 진나라에 멸망한 연나라의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거열형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마친 소진과 대비가 된다.
'장의열전'은 전국시대 종횡가들의 정치적 주장과 책략을 기록한 <전국책>에서 관련 내용을 선별해서 적절히 가공 배치한 것이다. 소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국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장의가 소진보다 높다. 소진의 기록은 14편, 장의는 40편이다. 소진이 합종을 발전시키고 충실히 하였다면 장의는 연횡의 구상을 구체화시켜 진나라 외교 전략의 현실로 만들었다. 전국시대에 활약한 많은 유세가들 중에서 두 사람을 종횡가의 대표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장의의 공헌
장의도 소진처럼 6국의 제후에게 모두 유세하지만 그가 진나라의 최후의 승리를 위해 이룩한 공헌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나라와 제나라의 동맹을 파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파괴한 것이다. 후자가 보다 중요하다. 먼저 위나라의 자연적, 지정학적 지리의 약점에 착안해서 진나라와 동맹을 맺도록 위양왕을 위협한 장면을 보자.
"위나라는 땅이 사방 천리가 못되고 병졸도 30만에 불과합니다. 땅은 사방이 평평하여 제후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올 수 있고, 높은 산이나 큰 하천의 장애가 없습니다. 신정(新鄭)에서 대량(大梁)까지는 200여 리에 불과해서 마차든 보병이든 지치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조나라,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사방을 군대가 지켜야 하는데, 변방을 지키는 부대가 10만을 넘습니다. 위나라의 지세는 정말이지 전쟁터입니다. 위나라가 남쪽의 초나라와 잘 지내면서 제나라와 잘 지내지 못하면 제나라가 (위나라의) 동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동쪽의 제나라와 잘 지내면서 조나라와 불화하면 조나라가 그 북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한나라와 불화하면 한나라가 그 서쪽을 칠 것이며, 초나라와 친하지 못하면 초나라가 그 남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분오열의 형세라는 것입니다."
소진이 위왕에게 유세할 때는 위나라가 초나라에 못지않는 강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장의는 위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사분오열될 형세에 놓여있는 취약한 나라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나라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다른 전략적 안목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점이 흥미롭다.
또 하나는 초나라를 속여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괴한 것이다. 중원의 진(晉)나라가 분열되어 생겨난 한, 위, 조 즉 삼진(三晋)이 점차 약화되자 진나라의 전략의 칼끝은 초나라를 겨누게 된다. 장의는 일찍이 초나라에서 미관말직에 있을 때 옥을 훔친 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른 악연이 있기도 하다.
"제나라와 맺은 합종의 약속을 깬다면 상과 오 일대의 땅 600리를 초나라에 바치고, 진나라 공주를 왕의 첩이 되게 할 것이며, 진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며느리를 맞아 오고 딸을 시집보내는 사이가 되어, 영원히 사돈의 나라가 되게 하겠습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이롭게 하는 계책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상오의 땅은 초나라의 발상지인 동시에 진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전진기지이다. 상오의 땅은 제나라와 동맹을 깰 정도로 초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땅이다. 장의의 제안은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유혹이었다. 물론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여 제나라와 동맹을 깬 대가는 참혹한 재앙이었다. 멸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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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가와 전국 칠웅
군사적 압력과 외교적 기만을 동원한 장의의 유세술을 보고 있노라면 모 대국의 국무부 장관이 떠오른다. 이 나라는 외교정책도 국무부 장관(Secretary of State)이 처리하니 천하가 다 자기 나라인 꼴이다. 아예 외무부 장관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전국시대 칠웅을 현대국가와 비교 대응시켜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진나라는 이미 언급했으니 차치하고, 러시아는 조나라, 중국은 초나라, 제나라는 일본, 한나라와 위나라는 유럽연합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연나라는 커다란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생략한다.
춘추시대의 중원의 강국 진(晉)나라에서 분열된 나라 중에 조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라는 전통적 대국을 제외하고는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국가였으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점에서 EU에 비견할 수 있다. 제나라는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항상 진나라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겠다. 중국을 초나라에 대응시킨 것은 중원의 국가에게 늘 타자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비교는 정확한 것은 아니고 정확할 수도 없지만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시켜보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압력과 진보
'장의열전'을 읽고 마오쩌둥은 "사람은 압력이 없으면 진보할 수 없다"는 독특한 소감을 남겼다. 마오도 아마도 한때 중앙에서 밀려나 역경을 겪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장의가 진나라가 가서 출세하게 된 계기도 바로 소진의 의도된 모욕이었다. 마치 소진이 가족들에게 냉대 받은 것을 계기로 분투노력하여 성공의 길로 나갔던 것처럼 장의도 이미 조나라에서 출세한 동창 소진을 찾아갔다가 모욕적 대접을 받고 분발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만약 조나라의 재상의 지위에 올랐던 소진이 자신을 찾아온 동창을 잘 대접해주었다면? 아마도 장의는 친구 덕에 조나라의 '과장' 정도에 안주했을 것이고, 따라서 격분해서 진나라에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재상이 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라는 것. 인간에게 압력이 있어야 함은 기름을 짜는 것과 같은 이치. 압력이 없으면 기름이 나오지 않는 법. 장의의 '기름'을 짜낸 것은 소진의 모욕. 그것이 호의에서 나왔든 악의에서 나왔든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남의 비판을 받아들여야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평가
소진이 여러 약자를 규합하여 하나의 강국 진나라에 대항하였다면 장의는 진나라의 강력한 실력에 의지해서 기만적 수단을 동원해 초나라를 약화시킨 것이다. 사마천도 장의를 평가하면서 "(장의는) 소진보다 심한 데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것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두 사람 다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사람(傾危之士)라고 하면서도 소진에 동정적이고 장의에 비판적이었다. 성공이나 성패가 물론 중요하지만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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