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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랑이 감싼 도시, 이탈리아 볼로냐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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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랑이 감싼 도시, 이탈리아 볼로냐를 가다

[좋은 도시를 위하여] 볼로냐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가 <프레시안>에 '좋은 도시를 위하여'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는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 등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외국어 학습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편집자.
이탈리아는 30년 만이었다. 여행이란 늘 예정에서 어긋난다. 심한 홍수로 피해를 겪고 있는 베네치아 대신 향한 곳은 볼로냐였다.
역사적으로 농업 도시면서 인근 도시들과 교역의 중심지였던 볼로냐는 중세 시절 이미 강력한 힘을 갖춘 곳이다. 16세기 초부터 이탈리아가 통일할 때까지 교황령으로 평화를 누린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대학을 꼽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볼로냐 대학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무려 1088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이미 중세 시대에 과학과 의학 분야 연구의 성지였고, 유럽 초기 대학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이 도시가 부상한 것은 19세기 말 이탈리아 북부가 빠른 속도로 공업화를 이룰 때다. 말하자면 볼로냐는 농업과 공업, 그리고 교역과 대학이라는 얼핏 듣기에 다소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특성들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자신들만의 특징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도시인 셈이다.
비록 베네치아 대신 선택한 도시이긴 했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2018년 현재 도시 인구 39만 명, 나아가 외곽을 포함하면 100만 명에 육박하는, 무엇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도시가 역사의 보존과 도시의 활기 유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2018년 현재 볼로냐의 원 도심 상주인구는 약 5만3000명이다. 옛 도심(centro storico)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인 경관이 남아 있는 역사 보존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 상주인구는 볼로냐 전체 인구로 놓고 볼 때 약 13.5퍼센트를 차지한다. 학생 수가 8만6000명 남짓인 볼로냐 대학의 학생 수가 인구 비중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원 도심 상주인구의 비율이 큰 편이다. 원 도심에 살던 사람들이 새롭게 개발되는 다른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발생하는 도심공동화 현상이 볼로냐에서는 아직까지 심각한 단계로 진입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볼로냐의 대표적 주랑(柱廊). ⓒ로버트 파우저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주랑(柱廊)이다. 인터넷에 볼로냐를 검색하면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가 바로 주랑이 빙 둘러싼 도심의 모습이다. 도로와 인접한 건물의 2층을 연장해 자연스럽게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1층 공간은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로 사용하고 2층의 활용도를 높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지붕이 있는 보행로 주랑, 즉 포르티코(Portico)는 볼로냐 도심을 둘러싸고 약 38여 킬로미터의 커다란 망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주랑을 가진 도시라고 불릴 정도다. 이 주랑이 일종의 차양막 역할을 하고 있어 볼로냐의 옛 시가지는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걷고 싶은 도시로 꼽힌다. 볼로냐에 도착한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숙소에서 챙겨 나간 우산은 거의 펼 일이 없었다. 주랑 덕분이었다.
이 주랑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부족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옥탑방이라면 볼로냐에서는 주랑이었다. 밀집한 도시 공간에서 어떻게든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주랑이 만들어졌다. 볼로냐는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곽 안의 인구 밀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졌고, 그것을 해결할 땅은 한정되어 있었다. 같은 문제를 두고 도시마다 해법은 제각각이었다. 볼로냐처럼 주랑을 도입한 도시는 많지 않았다. 볼로냐의 부자 가문들은 옆으로 늘릴 수 없으니 위로 올리는 탑을 짓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같은 방법을 확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중세 이후로 인구는 계속 늘었고 이 도시의 주랑 역시 갈수록 더 길어졌다.
한편으로 도시의 특징은 조금씩 달라져갔다. 볼로냐는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기까지 농업과 교역으로 번성했으나, 18세기경부터 도입한 보수적인 정책으로 인해 19세기 후반까지 매우 오랫동안 불황이 이어졌다. 이후 이탈리아 북부 도시에서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19세기 후반 철도가 연장되었다. 이로써 볼로냐에도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업 도시로 탈바꿈한 덕택으로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 이 도시에 활기가 돌았다. 볼로냐 대학 역시 학생들이 다시 늘기 시작하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이제 볼로냐는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학생의 도시가 되었고,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1630년경 볼로냐 지의 현재 '옛도심' 지역. ⓒ로버트 파우저

도시는 또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유럽 전역의 피해는 두말할 것 없었다. 공장이 많은데다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 역할을 했던 볼로냐 역시 피해가 매우 컸다. 연합군의 폭격을 많이 받았고, 독일 점령군과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저항도 거셌다.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면서 성곽 안 도심의 주요 건물 중 약 44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성곽 바깥 공장 지대의 피해 역시 막심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주택난이 이어졌다. 피난민이 늘어나면서 1951년에는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다. 주택난 해소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세계 여러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볼로냐가 다른 도시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이른바 경제적 급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개발의 광풍이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하지만 볼로냐는 다른 선택을 했다. 물론 볼로냐 역시 1955년 도시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다만 오래된 건물을 헐고 현대적이고 규모가 큰 건물을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도심을 보존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볼로냐는 1968년에는 주차장이 되어버린 시내의 중앙 광장인 마지오레 광장(Piazza Maggiore)을 보행자 전용으로 변경했다. 1969년 볼로냐가 발표한 도시 계획은 한 발 더 나아간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이미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경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주민들이 살아가는 도시 생태에 적합한 방식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 오늘날 도시 재생은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도시는 거의 없었다. 매우 참신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볼로냐 원 도심에 거주하는 인구는 1961년 9만3000명 내외로 줄어들었는데, 볼로냐는 이 도시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수를 약 7만5000명 정도로 판단, 그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정했다. 볼로냐의 이러한 정책에는 늘 시민이 함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참여’란 형식적이고 수동적인 제스처를 의미하지 않는다.
▲ 서점의 주랑(柱廊). ⓒ로버트 파우저

도시 계획의 방향을 수립하고 진행하는 데 시민이 참여하게 된 동력은 볼로냐만의 특수한 정치적 배경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볼로냐는 이미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노동자와 학생의 도시였고, 1940년대 말부터 이들의 지지를 얻은 공산당에서 시장과 시의회 의원을 배출했다. 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공산당 출신의 시장은 '좋은 행정(buona amministrazione)'을 펴나가는 모습을 시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민 참여 제도를 시정에 도입했다. 도시를 일정한 구역으로 나눈 뒤 주민들이 뽑은 각 구역의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인데, 볼로냐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오늘날까지 주민자치위원회는 행정가의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의 요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열어 시민이 주도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주민자치위원들은 주민의 의사를 시의 행정에 직접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정착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때부터 볼로냐 시정은 늘 시민이 함께였다.
1969년 발표한 역사 보존 계획안의 내용 역시 시가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추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시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볼로냐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전시였다. 이 전시에는 유명한 사진가 파올로 몬티(Paolo Monti, 1908-1982)가 찍은 사진이 걸렸다. 도시 계획 자료만을 나열하는 건조한 설명회가 아닌,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전시였던 셈이다. 몬티가 촬영한 거의 모든 사진에 역시 볼로냐의 대표적 이미지인 주랑이 등장한다. 도시의 오래된 모습이 가진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기 위해 몬티는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몬티는 거리의 차량을 통제해 차 없는 거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건물의 외벽에 붙어 있는 온갖 간판들을 모두 떼어낸 뒤 주랑과 역사적인 건축물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구현했다. 전시장에 걸린 이 사진들을 통해 볼로냐 시민은 '현대 이전'의 볼로냐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되새길 계기를 갖게 되었다. 사진 속 볼로냐는 차가 없는, 사람이 중심인 도시였다.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깨달은 시민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를 바탕으로 볼로냐는 일찌감치 원 도심 넓은 지역을 차 없는 거리로 지정했다. 시가 시민의 의견을 직접 들으면서 동의를 구하고, 단단하게 형성된 공감대를 통해 흔들림 없이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 셈이다.
▲ 피자 집의 주랑(柱廊). ⓒ로버트 파우저

1970년대 접어들면서 볼로냐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초기에 이미 이를 위한 정책이 가동되었다. 시민을 위한 주택 정책이 매우 세심하게 마련되었다. 시는 오래된 건물을 매입한 뒤 시민에게 다시 임대하고, 시민이 구성한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경관의 보존과 지나친 상업화를 막기 위해 볼로냐 역 반대편에 신도시를 건설해나갔다. 도시 안에서 대두되는, 무시할 수 없는 개발 압력을 원 도심 바깥으로 이동시킨 셈이다. 볼로냐는 이를 위해 일본 건축가인 단게 겐조(丹下 健三, 1913-2005)에게 신도시 설계를 의뢰하기도 했다. 비록 예산 문제로 계획을 축소했지만, 볼로냐의 이런 노력을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다. 이로써 볼로냐의 도시 경쟁력은 훨씬 높아졌다. 물론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으나, 이런 정책이 아니었다면 볼로냐는 오늘날보다 훨씬 심각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시 행정과 시민이 함께 고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볼로냐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의 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이 도시의 아름다운 주랑을 걸으면서 나는 역사가 오래된 훌륭한 경관을 잘 보존했다는 점에 감탄했다. 하지만 역사적 경관을 더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존, 유지하고 있는 도시들은 세계 곳곳에 놀라울 정도로 많다. 볼로냐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주랑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정책에 늘 시민이 함께했다는 점이야말로 볼로냐를 볼로냐답게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민은 볼로냐의 오늘은 물론, 내일을 만들어나가는 데 참여해왔다. 시민과의 튼튼한 공감대야말로 도시 정책의 동력이었던 셈이다. 처음부터 이런 관계가 익숙했을 리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시와 시민은 서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 결과 소극적이었던 주민들은 참여의식이 확고한 시민으로 성장했고, 그러한 시민의 참여로 인해 볼로냐는 무엇보다 시민이 우선인 도시 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들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경관과 건물, 도심의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보존 노력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과 일부 관심 있는 몇몇 시민의 일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할까. 정책을 만드는 이들과 시민의 건강한 관계 설정만이 더 많은 이가 원하는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제대로 된 길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미래에 마주할 문제를 완전히 피할 도리가 없다면, 적어도 좋은 도시를 위해 좀 더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시민의식을, 나아가 단단한 시민의식을 갖추기 위해 애써보는 건 어떨까? 시민과 행정이 함께 도시를 만들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장차 어떤 미래를 가지고 올 것인가를 볼로냐는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도시든 볼로냐만큼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주랑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도시를 함께 만들어나갈 시민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서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한국 속담에는 이런 게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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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가 <프레시안>에 '좋은 도시를 위하여'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는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 <외국어 전파담>과 <외국어 전파담 개정판>,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 <외국어 학습담> 등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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