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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펜시티 프로젝트, 유럽 최대 도시재생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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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펜시티 프로젝트, 유럽 최대 도시재생 현장을 가다

[좋은 도시를 위하여] 함부르크

2019년 11월, 사흘 남짓 독일 함부르크에 머물렀다. 인근 도시 브레멘에서 열린 학회에 참가한 뒤 며칠 쉬고 싶어 들른 참이었다. 함부르크는 독일 안에서는 지명도가 높은 도시지만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도시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다. 나 역시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방문은 처음이었다.
독일 도시로 유명한 곳을 꼽자면 역시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다. 하지만 함부르크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180만 명 남짓인 인구수로만 따지면 독일 내에서 베를린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유럽 전체로 보자면 여덟 번째로 크다. 13세기 북해와 발트 해 연안에서 발달한 여러 항구 도시와 함께 한자동맹에 참여한 이래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독일 통일 이전까지 함부르크는 독립된 도시 국가였으며 통일 이후에도 자주권을 지켜왔다. 독일 사회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언론사 <슈피겔>(Der Spiegel)과 <디 차이트>(Die Zeit)의 본사가 이 도시에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함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꽤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리 예약해둔 역 인근의 호텔을 찾아 걸어갔다. 내가 묵은 호텔은 요즘 세계적인 추세인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겉모습은 가급적 그대로 두고 인테리어는 레트로 풍으로 개조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방 안에는 이런 안내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이 방에서는 헬무트 슈미트만 담배를 필 수 있음." (Only Helmut Schmidt was allowed to smoke in this room.)
독일 연방총리를 지낸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1918-2015)는 유명한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폈다고 알려진 그는 심지어 텔레비전 인터뷰를 할 때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호텔 방 금연 안내 문구에서 뜻밖에 만난 그의 이름을 보며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존재가 새삼 떠올랐다.
함부르크는 헬무트 슈미트(1918-2015)의 도시다.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총리를 지낸 그는 인기가 꽤 많았다. 진보적 성향의 현명한 정치인으로 신망을 받았으며 유럽 통합에 기여하기도 한 그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나고 자란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와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디 차이트>의 공동 발행인으로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인데 새로 리모델링한 호텔방 안내 문구에 소환된 이름을 보고 있자니 이 도시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함부르크 공항의 공식 명칭은 함부르크 공항 헬무트 슈미트(Hamburg Airport Helmut Schmidt)다.
▲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슈파이셔슈타트. ⓒ로버트 파우저

함부르크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파이셔슈타트(Speicherstadt) 지역을 가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하펜시티’(Hafen City)를 둘러보고 싶었다.
슈파이셔슈타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세워진 대규모 화물창고 단지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창고 단지로 손꼽힌다. 가까이에는 20세기 표현주의 건축 양식 중 하나인 콘토어하우스(Kontorhausviertel)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당한 건물들이 많은데, 이들 가운데 몇몇 곳은 복원 후 카페나 바 같은 세련된 공간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여전히 창고로 사용하는 곳들도 물론 많다.
슈파이셔슈타트를 둘러본 뒤 서둘러 하펜시티로 향했다. 가장 큰 관심사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 주요 도시들이 그렇듯, 함부르크 역시 도시 재생을 화두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오늘날 눈에 띄게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펜시티 프로젝트'다. 오래된 항구 인근의 창고나 공장들을 사무실이나 호텔, 상점, 사무실과 거주 공간으로 되살려 새로운 친환경도시를 만들어내겠다는 목표를 내세운 이 프로젝트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 재생 사례인 하펜시티. ⓒ로버트 파우저

이곳에는 주거와 상업 시설만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 관련 시설도 자리를 잡아 눈길을 끈다. 가장 주목을 받는 곳은 엘프필하르모니(Elbphilharmonie)라는 콘서트홀로, 오늘날까지 함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꼽힌다. 이 건물 안에는 사람이 산다. 쇼핑도 할 수 있으며, 문화생활까지 가능하다. 주거와 상업 기능을 함께 하는 공간을 흔히 주상복합건물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주거와 상업, 문화 활동까지 함께 할 수 있어 말하자면 ‘주상문복합’(주거 상업 문화 복합) 건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프로젝트는 1997년에 시작했으니 이미 오래되었다. 2025년 완공 예정이라는데 상주인구 1만 2천 명, 고용 인원 4만 5천 명을 목표하고 있다. 2012년 지하철까지 이미 개통함으로써 원도심에서 곧장 접근 가능한 인프라를 구축해뒀다. 현재 함부르크 원도심 거주 인구가 1만 4천 명 정도이니 하펜시티 완공 후 목표치에 이르면 도시 거주 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내가 하펜시티를 주목한 이유는 뭘까. 세계 곳곳에 오래된 공간을 재생하는 프로젝트는 너무 많아 하나씩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하펜시티를 일부러 찾은 것은 이곳만의 뚜렷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예산은 함부르크에서 거의 충당하고 있다. 개발 대상지 전체 면적의 97퍼센트가 함부르크 시 소유였다. 이를 민간 개발사에 매각한 자금으로 공공시설의 예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연방으로부터는 지하철 공사에 필요한 예산만 일부 지원 받았고, 프로젝트를 위해서 따로 유럽 연방의 예산은 전혀 유입되지 않았다. 즉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지역의 자체 능력으로 진행하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다. 지원이 없으니 모든 집행 역시 매우 독립적이다.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이 프로젝트의 계획과 진행에서 작동하는 공공의 역할이다. 이 프로젝트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바로 공공성의 확보다. 앞서 말했듯 하펜시티 프로젝트의 총괄 계획과 진행은 함부르크 시 주도 아래 이루어진다. 모든 예산을 함부르크 시에서 지불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이 프로젝트 관련 비용은 당연하게도 전액 세금으로만 집행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건물들은 민간 자본으로 지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의 주도권은 철저히 함부르크 시가 쥐고 있다. 중앙 정부로부터도 자유롭지만 민간과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이 차이는 매우 명백하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개발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경험했다. 그 시작과 끝에는 거의 예외 없이 거센 저항과 날선 비판이 따라붙는다. 내용은 너무 많고 복잡하지만 단순화하자면 개발 이익을 다수가 아닌 일부의 사람들이 불공평하게 차지한다는 비판이 가장 많다. 살던 사람은 쫓겨 나가고, 급등하는 가격으로 어지간한 사람은 넘볼 수조차 없게 되기 일쑤다. 여기에 공공성의 가치와 공공의 이익은 고려 대상으로 거론조차 되기 어렵다.
하펜시티 프로젝트는 이 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끝없이 반복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부르크 시는 처음 거주 공간 구상 단계부터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함께 계획했다. 또한 건축주 20명이 모이면 누구라도 아파트와 유사한 공동주택을 지을 수 있게 함으로써 일반적인 시세보다 저렴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방안을 제도화하기도 했다.
극단적인 부동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발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고심했다. 민간에서 건물을 지어도 녹지 확보는 물론 도로의 넓이, 인도와 자전거 길의 조화를 의무화했으며, 대부분의 건물 1층에는 카페나 식당을 비롯한 상업 공간 배치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건축물 심사 요건에는 미학적인 부분을 비중 있게 포함했다. 여러 조건을 아우르되 도시 경관을 고려해야 한다는 방침에서 비롯한 조항이었다. 한편 시가 개발 업체를 위해 대지 매입 완료 전에 1년 동안 투자금 확보와 건축 허가와 심사를 완료할 기간을 마련하기 때문에 개발 업체의 리스크를 줄이기도 했다.
개발 전 이 지역에 사람이 사는 주택은 거의 없고, 창고와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개발 이후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 지역 밖으로 내몰리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우려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개발 이후 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이곳이 개발된 이후 함부르크 원도심에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오히려 촉진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그렇지만 함부르크 시는 여러 측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기획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도시 안팎으로부터 하펜시티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지점이며 내 눈으로 그 현장을 보고 싶어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 하펜시티 프로젝트는 공공 이익 추구를 우선으로 했다. ⓒ로버트 파우저

함부르크 시는 하펜시티 프로젝트 개발 목적에서 ‘공익의 추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문장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공익의 추구가 없는 도시의 개발은 일부 계층만을 위한 고립된 섬을 만들 뿐이며, 결코 함부르크 시민을 위한 좋은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순진한 이상만을 나열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시는 민간의 이익을 배제한다면 도시의 개발 자체가 무산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나는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좋은 도시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제안했다. 좋은 도시의 나아갈 바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공익과 사익의 적절한 균형이 아닐까. 말하자면 함부르크 시의 이러한 모색은 도시 개발이라는 과제 앞에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유의미한 참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하펜시티 프로젝트가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모범 사례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정작 함부르크 시민은 이 지역에 썩 호의적이지 않다. 어딘지 인공적으로 보이고, 아직은 삭막해보여 굳이 들어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들 한다. 새롭게 들어선 대규모 거주 단지가 처음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도시 재생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 지역이 거듭날 지야말로 하펜시티 프로젝트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지구상에 숱하게 펼쳐지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 중에, 이미 심각한 현상으로 드러난 부작용을 일찍부터 고민해온 프로젝트가 곧 완성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하펜시티 프로젝트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이곳이 어쩌면 새로운 도시 재생의 긍정적인 사례로 남을 수 있겠다는 기대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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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가 <프레시안>에 '좋은 도시를 위하여'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는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 <외국어 전파담>과 <외국어 전파담 개정판>,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 <외국어 학습담> 등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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