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 권의 그림 에세이를 소개한다. 이미경의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남해의봄날, 2017)과 김은희의 <건물의 초상>(단추, 2019)이다. 이미경 선생의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전국의 도시와 시골에 흩어져 있는, 또는 흩어져 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폐업한 구멍가게를 펜화로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집이다. 김은희 선생의 <건물의 초상>은 본인의 작업실이 자리한 부천시 역곡역 주변의 도회 풍경을 세밀하게 그린 작품집이다. 두 권 모두 아름다운 그림과 글이 담긴 훌륭한 책인데,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므로 오늘은 <건물의 초상>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면서 두 책을 이야기하려 한다.
사람이 노스탤지어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한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구멍가게와 역곡역 인근 도회 풍경에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할 터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제는 없어진 시골의 구멍가게 모습에서는 향수를 느끼지만,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와 경인로가 지나는 상업·공업·주거 복합 지역의 풍경에서는 살풍경함만을 느낄 것이다. 나는 두 풍경 모두에서 애잔함을 느꼈기에 두 책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개성이나 삼남(三南) 지역의 고택·개량한옥만이 진정 보존되어야 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주공아파트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60~80년대의 국민주택이나 속칭 집장사집을 재평가하자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다르므로, 서로 간에 그 다양성을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어떤 사람 또는 세대의 발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사람(들)의 추억 대상이 과도하게 대표된다는 데 있다. 기와집만이 보존·복원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이외의 일식가옥(적산가옥), 집장사집, 주공아파트를 철거대상인 흉물이거나 최소한 보존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 세대의 이러한 정서에 반감을 느끼는 다음 세대는, 자신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주거 형태나 공간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다음 세대가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에는 무심함을 드러낸다.
이미경 선생이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에서 "반세기 동안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낡고 오래된 옛것을 우리의 삶에서 지우고 감추었다. (...)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복원과 보존으로 우리 삶의 근본과 맥락을 찾아야 할 때다."(164쪽)라고 말하고 있는 대상인 구멍가게는, 개량한옥뿐 아니라 일식가옥·판잣집·단독주택·꼬마빌딩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건물에 입주해 있다. 짐작컨대, 현재 한국에서 어떤 건물을 보존·복원할지를 결정할 권한을 지닌 세대에게 일식가옥이나 판잣집에 들어선 구멍가게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 구멍가게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하자는 결정을 내릴 터이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옛 구멍가게가 사라졌다. 전국을 답사하면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남아 있던 옛 건물과 블록이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사라진 사례를 무수하게 접하고 있다.
이미경 선생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에 있던 장자상회가 사라져간 과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2002년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땐 (...) 소박하지만 바위에 그려 놓은 그림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2013년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길이 넓어졌고 은행나무도 사라졌다. 집도 이미 부서져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194-5쪽) 이미경 선생과 비슷한 심정으로 전국 구석구석의 정미소·이발소·시장·구멍가게를 사진으로 남기고 계신 김지연 선생도,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명 대목리에 있던 대목리수퍼가 폐업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 가게는 가게 앞길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외곽도로가 뚫리면서 가게로서의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폐업한 경우지만,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구멍가게의 소멸임에는 다름이 없다. "예전에는 주로 담배, 술, 과자 종류가 팔렸는데 장사가 안 돼서 주막으로 바꿨다가 안주인이 죽고 외곽도로가 뚫리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김지연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114쪽)
그래도 구멍가게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미경 선생이 펜화로, 김지연 선생이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으므로. 한국에는 이 정도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건물과 가게가 숱하게 많다. 역사적 이유에서 20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일식가옥(적산가옥)이 그러하고, 옛 동네에 빼곡히 지어졌던 판잣집과 집장사집이 그러하고, 경인선변의 작은 공장 건물과 꼬마빌딩들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건물들이 없어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어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는 그런 풍토가 아쉬워서 을지로와 영등포를 걸으며 일식가옥을, 재개발 예정지역에서 지역주택조합 관계자들의 눈치를 보며 판잣집과 집장사집을, 영등포에서 부천을 거쳐 인천·시흥·안산까지 끝없이 펼쳐진 공업지역을 헤매며 공장 사진을 찍고 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건물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내가 찍은 사진이 이 건물의 유일한 사진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난 해 11월에 김은희 선생이 <건물의 초상>, 그리고 역곡역 인근 1㎞ 구간을 연속적으로 그린 화보집 <1㎞, 오늘도 삶을 짓는 중입니다>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는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살풍경하게 느껴질 뿐인 경인선·경인로변의 풍경을 애잔하게 여기고 기록하는 사람이 한국에 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1974년 수도권전철이 개통되면서 급격히 인구가 늘어 1987년에는 한국 8대 도시로까지 성장한 부천은 문자 그대로 "경인선이 낳은 도시"(박해천 기획 <확장도시 인천> 101쪽)였다. 부천시에서도 서울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역곡역 인근은 특히 그 변화의 정도가 심했다. 부천시가 막 급성장을 시작한 1980년대에 출판된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한국의 발견 - 경기도>편에는, 당시 역곡역 인근의 풍경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서울하고 가까운 역곡역 언저리나 인천하고 가까운 송내역 언저리는 고속도로 너머의 북쪽 동네들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부천시의 중심지와는 동떨어져 있으며 시골 냄새가 꽤 짙은 곳에 든다고 하겠다. 다만 역곡역이 있는 역곡동은 칠십년 대 후반에 성심여자대학교가 들어옴으로써 새로 개발된 지역이라서 산뜻한 느낌을 주며 아직까지 집들이 듬성듬성한 만큼 앞으로 발전성이 크다고 이곳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아직 역곡역과 부천역의 북쪽을 잇는 소사동의 '탁박골' 도로는 포장조차 안 되어 있다."(<한국의 발견 - 경기도> 1986년 제3판, 213쪽)
김은희 선생이 기록한 역곡역 인근 1㎞의 파노라마 삽화를 보면, <한국의 발견 - 경기도>편이 출판된 후 20~30년 사이에 이 일대는 "시골 냄새가 꽤 짙은 곳"에서 "공장 냄새가 꽤 짙은 곳"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영등포와 인천을 잇는 경인공업지대의 한 가운데 자리한 부천다운 모습이다. 그런 동시에, 서울시와 가까운 경기 지역의 공업지대들이 그러하듯이, 공장을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하고 남겨진 부지에 아파트단지나 오피스텔이 들어서는 변화가 현재진형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예전의 살풍경한 모습이 또 다른 살풍경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라고 느껴질 경인선과 경인로 사이에 낀 역곡역 인근 지역을 그림으로 기록하게 된 계기를 김은희 선생은 이렇게 밝힌다.
괴안동 189-○○번지
어느 해 봄, 부천 역곡역 굴다리 근처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작업실을 얻었다. 경인선과 경인로가 지나가는 건물 꼭대기였다. 경인선 철길에서는 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실 앞쪽으로 난 경인로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88번 버스는 새벽 4시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들을 일터로, 집으로 실어 날랐다. 작업실에서 500미터 떨어진 역곡역은 아침이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가 저녁 7시쯤 다시 동네로 뱉어놓았다. (...) 그런 동네에서 14년을 지냈다. 작은 작업실 창 너머로 공장이 생기고 사라지고 아파트가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동네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 사이 재건축하는 곳이 늘면서 작은 철공소나 철강회사들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생겨났다. 도시는 끝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그 변화과정과 다양한 시기의 모습이 중첩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통근·통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나다녀야 하는 황량한 공간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꾸리는 일터가 있는 무덤덤한 공간일 뿐인 역곡역 인근 1㎞가, 김은희 선생에게는 기록해야 할 대상으로 느껴졌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도 숱한 건물과 가게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역곡이라는 동네가, 부천이라는 도시가, 경인(京仁)이라는 메갈로폴리스가 경험한 과거와 현재가 여러 겹의 시층(時層)을 이루고 있다. 역곡역 인근 1㎞의 시층이 담겨 있는 김은희 선생의 그림은 나에게 노스탤지어를 준다.
어떤 풍경이 사람들에게 노스탤지어를 주는 이유는 그 풍경이 절대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그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그 풍경에 아름다움과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그 풍경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된다. 지금 한국의 문화정책·도시계획을 담당하는 세대에게는 구멍가게이든 역곡역 인근 1㎞ 구간의 풍경이든, 둘 다 별다른 의미도 없고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구멍가게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이번에는 한국의 도시 풍경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세대교체가 반갑다. 복원이라는 명목으로 신축되는 조선시대풍 현대 건축물과 고층아파트단지를 제외한 그 밖의 옛 건물과 블록이 모두 재개발·재건축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들의 발언이 사회적으로 힘을 얻어서, 한국의 도시에서 높고 낮은 건물들의 시층과 다양성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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