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땅속에서 옛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는 고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한국 고고학자 열전'이다.
외국에는 이런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런 종류의 책 가운데에서는 C.W. 세람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대원사 펴냄, 2002)과 메릴린 존슨 <폐허에 살다 - 발굴해서 역사를 찾는 고고학자들 이야기>(책과함께 펴냄, 2016)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의 <발굴 이야기 - 왕의 무덤에서 쓰레기장까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여정>(대원사 펴냄, 1996)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조유전 선생의 책은 어디까지나 고고학자 본인이 자신과 주변인의 발굴 경험과 발굴된 유적・유물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는 김상운 선생의 <국보를 캐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문화재 및 학술 전문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고학계 바깥에서 쓴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도 더 공감되고 와 닿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을 발굴한 김세기 선생에 대한 묘사를 보자.
그의 첫인상은 다분히 수더분했다. 수많은 학자를 인터뷰해봤지만 그처럼 먹물 냄새를 풍기지 않는 스타일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청년 시절 생활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동안 수원시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했다.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군대를 마치느라 동갑내기보다 6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 농고를 다니면서 측량 기술을 익힌 덕에 그는 발굴 현장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 그는 대구한의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2002년까지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을 지켰다. 고고학자 한 명이 특정한 유적을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발굴한 사레는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다. (323~324쪽)
김세기 선생과 같은 경력은 학술 순수주의가 강한 한국 학계 일반에서는 무시당하나 심지어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현직 기자인 저자에게는 이런 김세기 선생의 삶과 활동이 더욱 세상에 알려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 듯하다. 많은 독자들도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이렇듯 <국보를 캐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유적을 발굴해서 유물을 찾아내고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행적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가 이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숱한 컬러 사진들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제껏 수많은 교과서와 교양서에 사진으로 실린 유적과 유물을 실제로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이 찍힌 수많은 사진들이다.
한반도를 이해하려면 전 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
또한 고대 한반도 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할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남북조 시대에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맞서, 그는 백제의 향로와 비슷한 실물 자료가 중국에서 발굴되지 않았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 전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런 신념을 지니고 있다 보니 박순발 선생은 "한국 학계에서 튀는 연구자로 정평이 나 있다"(216쪽)고 한다. 하지만 그가 튀는 게 아니라, 그런 폭넓은 시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학계가 세계 학계의 기준에서 튀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김상운 선생은 기자의 눈으로 날카롭게 논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젊은 연구자가 스승들의 선행연구와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안정적인 교수 자리를 구해야 하는 소장학자일수록 더 그렇다. 학계에서 '건방 떤다'는 식으로 찍히면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선배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임용 면접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현직 역사학과 교수는 "정년이 보장되는 신임 교수가 한번 들어오면 그와 적어도 20년을 같이 일해야 하는데 사회성 없고 모난 성격이면 무척 피곤해진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결국 튀는 연구보다는 통설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동료 교수들과 융합할 수 있는 '무난한' 연구자가 한국의 대학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216쪽)
무난한 연구자가 교수가 되고 눈에 띄는 연구자는 배척받는 학계의 분위기는, 비단 학계뿐 아니라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비슷한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학계 바깥에 있는 지인들이나 시민 강의에서 만나는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이 "학계는 바깥 사회와는 달리 공명정대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고 답변이 궁해질 때가 있다. 학계 역시 이 사회의 일부이며, 학계의 분위기와 결과물 역시 이 사회에 속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아름답고 공평한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진심으로 배운다
김상운 선생이 '고고학자 열전'이라고 할 이런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15년에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박물관에 갔을 때였다고 한다. 그곳의 전시관에는 홍산문화를 발굴한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사진과 기록이 먼저 전시되어 있었고, 유물 소개는 그 뒤에 시작되고 있었다. 유적과 유물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수천 년의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곧장 전해진 게 아니라, 고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찬바람을 무릅쓰고 땅을 파서 일일이 찾아낸 것임을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김상운 선생은 한국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한국 시민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당시 저지른 숱한 오류 가운데에서도, 홍위병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곳곳의 유적과 유물을 대량으로 파괴하게 한 것은 인류 차원의 큰 손실이었다. 그런 손실을 겪은 뒤에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유적과 유물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고고학 관련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의 현대 한국 시기에도 한국 시민들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파괴했다. 한성 백제 시절의 고분 200여개와 삼성동 토성이 1970~19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때 사라졌고, 서울 사람이 천여 년간 묻힌 은평구 이말산의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5000여개의 무덤이 진관 신도시를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2003년에 울산 대곡댐 수몰 예정지구에서 발굴된 신라 무덤 1100여 기가 물 아래 잠겨버렸다.
이 책에는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다가 발견된 나성리의 백제 지방도시 유적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던 폼페이의 유적이 수십 년 동안 발굴되고 보존되어 로마 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나성리 백제 도시 유적도 그렇게 찬찬히 발굴될 필요가 있었지만 세종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당시 발굴을 맡은 이홍종 교수는, 허가받은 발굴 범위에서 50미터만 더 나아갔으면 백제시대에 배를 대던 선착장 유적이 나왔을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신도시를 만들고 아파트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 한국 시민들은 신도시와 아파트를 가치 판단의 첫 번째 기준이자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 기준을 적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유적과 유물과 마을을 가차없이 밀어내고는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역사가 없는 황무지로 만든 뒤, 한반도에 유적과 유물이 많지 않은 것을 중국・일본의 침략과 육이오 전쟁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시민은 문화혁명 당시의 야만적 파괴 행위를 반성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의 자세를 진심으로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그리고 기대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진심으로 배우듯이, 다른 분야에서 공부한 사람이 내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큰 성과를 거둔 사례가 이 책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학제간 연구', '융합', '통섭'이다.
"오랫동안 정통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140~141쪽) 건축공학적인 지식을 장착한 김동현 선생이 경주 황룡사지의 목탑 터 심초석(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들어 올리자고 주장한 결과 놀라운 발견을 한 사례, 지질학자·식물생리학자 등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천 전곡읍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연구한 사례, 신석기 시대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위치를 통해서 신석기 시대의 해안선 위치를 연구한 지리학자 황상일 선생의 사례 등이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 사례는 특히 흥미로운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바닷물로 도토리의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저장 구덩이를 팠기 때문에 당시의 해안선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영역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남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자세, 나아가 자기 영역에 다른 영역 사람이 관심을 보이면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득세하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나는 앞으로 다가올 한국 사회의 미래에 좀 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 책은 희망과 더불어 기대도 품게 해주었다.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경우가 그렇다. 미륵사지로 유명한 곳은 백제의 마지막 왕궁이 조성된 곳이다. 아직 이 곳에서는 왕궁 부근에 반드시 있는 관청들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최맹식 선생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은 이 일대에서 백제의 행정 기록이 목간(기록이 남겨진 나뭇각)형태로 발굴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에 개성·평양과 함께 남경이라 불리는 중요한 도시였던 서울에서는 아직 고려시대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계에서는 청와대와 경복궁 자리에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옮기려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청와대가 옮겨가고 나면 그 지역을 발굴해서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지지했다.
물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동안 통일되지 않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북쪽 끝인 서울에서 중심인 세종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주인공인 백제와 서울 사대문 안 남경 유적의 주인공인 고려 모두 역사 기록이 참 부족한 나라들이다. 제발 작은 기록이라도 땅속에서 나와주면 좋겠다는 바람과 기대를 품으며 <국보를 캐는 사람들>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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