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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이 전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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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방이 전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②·끝]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미중 대결시대, 한국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한겨레출판 펴냄)을 펴낸 중국 전문가 한광수 전 인천대 교수는 미중 관계의 본질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라면서 한국은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은 현재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로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협력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한 최근 6년간 한국이 대중국 수출 1위를 지켜오는 등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이며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한국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막연한 반공의식에 기초한 중국 혐오는 위험하며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수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경제 연구를 시작했다. 1991~96년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현지에서 관찰했고 주중 한국대사관, 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귀국 후 인천대 교수를 지냈으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 <KBS 스페셜> 중국 프로그램 자문 등을 맡았다. 현재는 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한광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연재한다. 1부는 미중 관계 외 중국경제의 발전 과정, 2부는 미중 대결 시대 한국의 진로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 서울의 야경. 한국의 기적적 성장은 지난 수십년 간 이어온 미중 두 나라 사이의 줄타기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어느 나라도 버릴 수 없는 처지다. ⓒ위키백과

2부: 한국의 경제성장, 중국 경제 발전의 모델

프레시안 : 저자는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이 중국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한광수 : 이를 설명하기 위해 '중국 시장 경제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을 거론해야 한다. 그는 개혁개방 선언 전부터 한국 경제를 주목했다. 1978년 가을, 그는 미국의 권유로 일본을 방문했다. 신일본제철 회장 이나야마 요시히로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에 포항제철(포스코)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한국의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느냐"며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이 무렵, 덩샤오핑은 이미 한국 경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3년 동안 한중수교를 극비리에 준비한 사람도 덩샤오핑이었다. 2003년, 중국 국무원의 싱크탱크인 중국발전연구중심은 박태준 회장을 중국 고문으로 위촉했다. 3인의 고문이 헨리 키신저와 리콴유, 그리고 박태준이었다. 나는 박 회장의 요청으로 그의 중국고문을 맡아 그가 서거하기 전까지 그의 광화문 사무실에 8년 간 왕래했다. 학생 때, 반독재 시위로 밤낮을 보낸 나로서는 아이러니였다.

다음은 중국의 경제원로 쉐무차오의 한국 시각 얘기다. 한중수교 이듬해 늦은 봄, 나는 처음으로 자금성 옆의 중난하이를 방문할 수 있었다. 스승인 조순 교수를 모시고 간 자리였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중국 계획경제의 원로이자 위안화를 창안한 쉐무차오였다. 그는 시장경제에도 앞장서서 계획과 시장의 교량을 잇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소련의 개혁 실패와 확실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는 덩샤오핑과는 1904년생 동갑이자 평생 혁명동지였다.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의 책임자인 마홍 주임이었다. 마홍의 스승인 쉐무차오 노인은 그 발전연구중심의 고문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도 한국처럼 발전하고 싶다"고 터놓고 얘기했다. 그 후, 마홍 주임은 한국의 재벌 체제를 벤치마킹하며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의 한국 왕래는 오늘날 수많은 중국 '기업집단'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소탈하기 그지없는 마홍 주임은 한국을 좋아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장쩌민은 한국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중국 국가주석이다. 1995년 당시, 자동차 전문가인 그는 서울 거리를 메운 자동차가 대부분 한국산이라는 데 놀랐다. 한국을 완전히 미국화한 나라로 생각했던 선입견이 깨진 것이다. 장쩌민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한국연구소조'다.

한중 양국은 가정 전형적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ship)' 관계에 있다.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산업구조까지 한국처럼 중국과 밀접한 나라는 과거 침략을 자행했던 일본 정도다. 미국, 일본보다 훨씬 늦게 중국과 수교했지만, 시장규모가 작으면서도 수출은 그들을 압도하는 게 한국이다. 실제, 지난 6년 연속 한국은 중국 수출 1위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국가 부주석 왕치산은 대단한 한류 팬이었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해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소개하며 한국을 향해 "드라마에 영혼이 실려 있는 나라"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회의를 열고 한국 문화를 벤치마킹하려면 제도부터 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도 참석한 회의였다. <인민일보>의 한류에 대한 십여 년에 걸친 일관된 평가는 중국의 한류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다.

우리 기업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하자마자 홍콩을 통해 중국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미수교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우리 섬유제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고전하던 관련 업계에 힘이 되었다. 1990년대 과잉 중복투자로 위기에 직면했던 석유화학공업도 중국 특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 반도체 생산 1위 국가다. 그리고 중국은 반도체 수입 1위 국가다.

서방은 일찍부터 중국경제가 부상하면, 한국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1980년대 초,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앞장서서 짚어냈다. 같은 맥락에서 2007년 미국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중국시장 활용으로 '2050년에는 1인당 GDP가 9만 달러를 넘어 미국을 이은 세계 2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중관계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으면 서해안 일대를 가보면 된다. 인천 송도에서 평택, 당진, 군산, 새만금, 목포를 거쳐 제주도까지 미국의 군사 기지와 중국을 겨냥한 생산 및 무역 기지가 뒤엉켜 있다.

평택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와, 중국시장을 향하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삼성전자 공장이 있다. 목포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중국 전문 자유무역항이 들어선 곳이다.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인가 하면, 해군기지를 서둘러 만든 강정마을도 있다. 서해안의 이런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딜레마인가, 기회인가? 전쟁인가, 경쟁인가?

▲ 한국은 미중 두 나라 각축의 전시장이다. 미군의 해외 군사 기지 중 최대 규모인 평택 기지. ⓒ연합뉴스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

프레시안 : 이 같은 미중 관계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지금 한국 여론은 반미-반중으로 크게 갈라져 있다. 신중국 건설부터 1972년까지는 미중 대결의 시대였다. 당시 미중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은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중국은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각각 막았다. 한반도 분단의 현상 유지가 그 결과물이다.

이후 미중의 화해와 대립은 한국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1979년 10.26, 1997년 외환위기, 2016년 사드 배치 등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1972년 미중 화해에 대한 남과 북의 대응은 남북 화해가 아닌 독재 강화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박정희 유신독재가 10.26 정변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한광수 : 미중 화해는 남북 화해를 위해 다시없는 절묘한 기회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그 기회를 외면했다. 남북이 내놓은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 화해가 아니라, 각기 독재 권력의 영구화로 이어졌다. 분단을 명분으로 태어난 정권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1972년 가을, 그 야합의 뒷거래 과정을 포착한 미국은 분노했다(6장 참조). 그리고 7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미중 양국이 수교한 1979년 어느 가을 밤, 궁정동 안가에서 현직 대통령의 심장을 겨눈 총성이 울렸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적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참모들의 무지가 대통령을 죽였다." 이런 기사도 나왔다. "1979년 미국외교는 한국에서 빛나고, 이란에서는 실패했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을 지적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업적은 '반공 근대화'의 성공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가 개도국들의 공산화 확산을 막기 위해 채택한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우리의 어두운 근대화 여정은 '식민지 근대화'에서 바로 이 반공 근대화로 이어졌다. 미중 화해 당시 박 대통령은 백악관에 반공 친서를 보내 설득을 꾀하기도 했다. 학생이 스승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반공이 권좌를 보장하는 시대는 '10월 정변'으로 끝났다. 이를 눈치 챈 신군부는 공산권 국가들과 접촉에 열을 올리는 북방정책에 팔을 걷었다. 그들에게도 반공보다는 권력이 중요했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 냉전시대가 가고 미중시대가 불을 뿜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반공 의식은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영화 <공동금지구역 JSA>의 마지막 총격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거리를 쏘다니는 무의식 반공 꼰대들에 대한 경고였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때, 중국에 대한 한국의 거부감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중 시위가 열렸다. 이것이 중국 수출 1위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 국가의 모습이다. 앞으로도 한중교류의 길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 미국과 중국은 '핑퐁외교'로 대표되는 관계 정상화 후 끊임없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왔다. 한국은 두 강대국의 이 같은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chinadaily.com.cn

1997년 외환위기, 미국의 중국 견제가 원인

프레시안 : 1997년 외환위기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정실자본주의 등 국내적 요인에 집중하지만, 저자는 홍콩 반환을 계기로 터진 미중 자본전쟁의 와중에 미국이 한국을 신자유주의 체제로 강제 편입시킨 사건이라고 했다.

한광수 : 한국에 대해 미국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한중 밀착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동맹국인 한국이 중국과 지나치게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강제 편입은 이런 미국의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난 재앙이었다. 한국전쟁을 능가하는 경제 손실을 입었고, 중산층이 통째로 무너졌고, 지금도 그 악취가 살아 숨 쉬는 대재앙이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걸려든 것은 한중수교 5년이 지나는 시점, 1997년이었다. 한중관계가 무역과 투자, 관광 등에서 막혔던 봇물이 터진 것처럼 대성황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냉전 시대의 대결과 단절은 먼 망각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미국인들은 이런 양국의 모습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미국이 이런 한중관계에 급브레이크를 건 시점은 홍콩 반환 전후였다. 2016년 사드 배치 발표가 한중FTA 발효 6개월을 지나는 시점이었다는 점과 비교된다. 공통점은 더 이상의 한중 밀착을 사전에 견제하는 조치였다는 것이다.

IMF 강제 편입의 원인을 두고, 그동안 우리는 내부 취약점들에 집중하면서 천박한 한국 자본주의를 반성하는데 열을 올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반성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 발전의 수혜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한술 더 뜬 사람이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셀 깡드쉬다. 그는 당시 한국 경제를 두고 "정부와 대기업과 은행이 근친상간했다"고 기고만장하게 몰아붙였다.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IMF 강제 편입 협상 당시, 미 재무부의 서머스 부장관은 협상장과 가까운 조선호텔에 진을 치고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마음에 안 들면 불러서 다시 지시하곤 했다. IMF 협상 대표들은 미 재무부와 긴밀하게 연결된 수하 직원들이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정보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주목해온 컬럼비아 대학의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폭로였다. 그는 개발경제학의 대가로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 남미가 아니"라고 외쳤다. 한국인 학자로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미국은 마치 군대가 진주하듯 한국을 몰아붙이는가?" 왜 미국은 이런 따가운 비난이 뻔한 속에서도 IMF를 앞세워 한국의 경제주권을 앗아갔을까?

▲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는 한국의 기본 체제를 바꿨다. 한국은 오랜 기간 부정 부패 등 내부 문제를 되돌아봤지만, 한광수 소장은 큰 틀에서 미중 패권 경쟁의 파편을 한국이 맞은 사태로 외환위기를 해석한다. ⓒ조선일보 지면 캡처.

우선, 당시 IMF 사태에 중대한 외부 요인으로 작용한 미중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중국처럼 중요한 상대는 없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이웃인 한국을 잘 컨트롤하는 것도 중국 전략의 일환이다. 클린턴 미 정부도 그랬다.

1997년 7월 1일로 예정된 홍콩 반환이 가까워지자 미중 양국은 서로 긴장했다. 덩샤오핑이 홍콩 반환을 4개월 앞두고 서거했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이 홍콩 귀속을 완수하라"며 그의 유해를 홍콩 앞바다에 뿌리도록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영국과 중국 간에는 반환 협의가 진작 끝났지만, 미국은 심사가 어지러웠다. 순조로운 홍콩반환이 중국의 부상에 새로운 활주로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홍콩 금융의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홍콩 인근 동남아 지역은 5조 달러 이상의 거대한 화교자본이 축적된 화교경제권이다. 이대로 두면, 서방의 금융센터였던 홍콩이 중국 대륙과 이들 동남아를 잇는 금융 및 투자의 교량으로 엄청난 시너지의 핵심 센터가 될 것이다(최근의 홍콩 사태에 미국이 관심을 갖는 배경도 이런 시각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사춘기 힘센 소년' 같은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헤지펀드들이 팔을 걷었다. 그들은 홍콩 반환 두 달 전인 1997년 5월부터 일제히 홍콩 달러 공격에 착수했다. 조지 소로스가 앞장섰다. 미 재무부는 달러 강세를 내세워 헤지펀드의 공격을 지원했다(과거 아편전쟁 시기, 미국 해군은 청나라를 상대로 한 아편 밀수에 상인들을 지원했었다. 미국 정부, 군대와 기업은 전통적으로 한 몸이다).
이 소식을 접한 중국 부총리 주룽지는 곧바로 로버트 루빈 미 재무 장관을 전화로 찾았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그간 사들인 미 재무부 채권을 모조리 매각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헤지펀드는 공격 대상을 홍콩의 앞마당 격인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로 돌렸다. 홍콩 반환 바로 다음 날인 7월 2일부터 이 공격은 시작됐다. 앞마당을 쓸고 다시 홍콩을 공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자본전쟁을 주도한 이는 당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서머스 부장관, 립튼 차관, 가이스너 차관보 등이었다. 루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파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경제에 대해서도 각종 문제를 제기하며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IMF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한국 금융권은 홍콩에서 단기 외채를 빌려 중남미에서 고금리 장사로 재미를 보는 '금지된 장난'에 빠져 있었다. 황당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홍콩에 주재한 한국 금융사 지점이 78개에 달했다. 홍콩이 반환되면 홍콩에 가기 어렵다는 가짜 뉴스가 우리 관가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홍콩 달러를 빌리는 값은 하늘로 치솟고, 덩달아 한국의 단기 외채도 급증했다. 그래도 원화는 고환율을 지속하며 해외여행 붐의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한국 상황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던 미국 정부와 금융가는 한국 경제 손보기에 착수했다. 먼저 모건스탠리가 바람을 잡았다. '아시아를 떠나라'는 보고서가 나간 후, 뒤 이어 홍콩 페레그린증권이 '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처럼 분명한 신호탄이 나가자 한국에 대출했던 각국의 단기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후 헐값이 된 한국 주식과 부동산을 미국계 자본이 쓸어 담은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당시 스티글리츠 교수는 중남미와 달리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은 재정적자가 아닌데도 IMF가 중남미에 실시했던 살인적인 고금리와 재정 지출 축소 등의 처방을 내린다면 경기 위축으로 한국경제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하준 교수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도 미국식 경제모델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유독 한국에만 신자유주의 모델을 강요하고 한국식 산업정책을 포기토록 압박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재무부가 그걸 몰랐을까?
이른바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는 그 명칭을 '미중 금융전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동남아는 희생양일 뿐이었다(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부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국도 '기획된 재앙'에 얻어 걸렸다. 시간이 흐르자 IMF는 모호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추락한 신용에 대한 상업적 대응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과도한 한중밀착'을 견제해야 했다. 한국이 중국 부상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제는 앞으로도 이름을 바꾸어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드처럼.

▲ 지난 2017년 4월 26일 사드 장비를 실은 차량이 성주골프장으로 진입하는 모습. 미국은 한중 밀착을 견제하기 위해 사드 배치를 추진했다. 사드 논란은 중국의 한한령 보복을 낳았다. ⓒ연합뉴스

한중 FTA와 사드 배치

프레시안 : 미중 관계로 인해 한국이 충격을 받는 사태는 지금도 일어난다. 2016년에 발표한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가 대표적이다.

한광수 : 사드 배치는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이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요즈음 우리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하면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이 풀릴까?'에 쏠리고 있다. 최근, 베이징에서 만난 한중 정상도 사드 얘기를 되풀이했다. 시진핑이 '타당하게 해결되기 바란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비핵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전 정부의 입장이었던 '(사드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는 입장에 아무런 변함이 없다.
사드 배치는 한미동맹과 중국시장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곡예를 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드 배치 발표 직전 황교안 당시 총리가 중국 방문에서 외교적 실례를 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당시 그는 중국 지도부에 사드 배치 계획이 없다고 공개 발언했으나 일주일 후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를 발표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불안한 곡예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어두운 사례다.

실제 사드 배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사드 배치에 대해 미 고위층이 처음 입을 연 것은 2013년 6월이었다. 당시 국무장관이자 차기 대선의 유력한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골드만삭스 임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손에 넣는다면 (...) 우리는 미사일 방어망으로 중국을 에워쌀 것이다." 중국 정부가 즉각 반발했다. "사드의 한국 배치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사드 배치는 기습적으로 강행되었다. 당시 한국 정치는 탄핵과 대선이라는 초비상 상황이었다. 동맹국의 이름으로 미국은 사드 배치를 위해 총력을 집중했다. 백악관과 의회가 앞장서고 이름 있는 정치인, 학자와 군인들이 줄지어 서울로 몰려왔다. 사드로 인해 여론이 극심하게 갈라진 분열 상황에서도 한국 정치계는 사드보다 선거에 집중했다. 사드 반대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이며, 그러면 정권 창출이 어렵다는 소리도 들렸다. 결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사드는 성주의 시골길을 밀고 들어왔다.

사드 배치 다음의 난제는 미 중거리미사일 배치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인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데 군사적 수단과 경제적 수단을 최대한 현란하게 활용한다. 그 틈새에 한국이 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중국의 가장 가까운 경제 파트너다. 반도체를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은 최상의 경제 이웃이다. 골치 아픈 딜레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중국 부상을 지원하는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은 미중 두 강대국 사이에서 군사적 완충 기능과 시장 경쟁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전자가 냉전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중국 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이 두 기능을 염두에 두고 FTA라는 시장 카드를 보자. 한중 FTA는 사드와 어떤 관계일까? 한미 FTA가 한국 국회에서 비준(2011.11)된 다음,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2012.1). 이 때 후진타오는 한중 FTA 협상 개시를 요청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한미 FTA와 한국 시장을 어떻게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당시 한중 FTA 진행에는 우리 기업인들의 요청과 함께 중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 미국을 의식한 우리 정부는 한발 물러나 있었다. 사드 배치 발표는 한중 FTA가 발효(2015.12)되고, 6개월 만에 서둘러 터져 나왔다.

이제 한국은 미중 양국의 FTA 각축장이다. 한미 FTA가 광우병 파동으로 시끄러웠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중 FTA가 발효되자 한중 양국은 장밋빛 미래 협력을 그리며 환호했다. 그것은 한중 협력의 신시대 이정표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중국 CCTV는 한국을 찾는 유커가 향후 5년간 세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 무렵 한중 관료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통상 분야의 중국 관리는 한국 관리에게 "중국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소비재를 다양하게 발굴해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 말하곤 했다. 한국이 질 좋은 소비재를 만들기만 하면 중국이 모두 사주겠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한중 밀착이 가속화하는 시점에 미국이 주도한 견제 카드가 바로 사드다. 사드 배치로 한중 협력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의 첨단 무기가 한중 경제 협력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미국 언론과 정부는 말한다. 한중협력은 이해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밀착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속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들어있다. IMF 강제편입과 사드 배치는 모두 한국과 동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작품이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제대로 된 인식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대응도 가능하다. 사태의 원인 파악도 안 된 채로, 땜질 처방으로 상황이 개선되기만 기다리는 것은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다음 파도는 중거리미사일 배치라는 얘기가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두고 최근 왕이 중국 외교부장도 다녀갔다. 미국도 바쁘게 움직인다. IMF처럼, 사드처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비비고 팔을 걷을 것인가?

프레시안 : 사드 배치로 중국은 한한령 보복을 가했다. 그런데 이 시기 오히려 한중 상품무역량은 증가했다. 저자는 한한령을 두고 '제한적 보복'이라고 했다.

한광수 : 사드가 배치된 해에도 한중 무역량은 증가했다. 한한령은 두 나라 무역의 빠른 증가 추세에 제동을 거는 정도였다. 이처럼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제한적 보복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당시 중국 일각에서 미국의 전략에 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다. 중국에 한국은 예로부터 중요한 국가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언제든지 한국을 더 싸늘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을 향한 중국의 분위기가 얼마나 싸늘한지는 직접 중국을 돌아다녀 보면 안다. 한국에서도 대 중국 인식에 변화가 크다. 한중 사이에 거리가 생기는 것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시장을 멀리하고도, 아니면 한미동맹의 끈을 느슨하게 풀고도 우리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런 불안정한 곡예가 이어지는 동안, 한반도의 미래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느냐를 시험받게 될 시기는 쉼 없이 다가오고 있다.

▲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한광수 지음) ⓒ한겨레출판

한국은 미국도 중국도 버릴 수 없다

프레시안 : 저자는 G2 시대에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문제라면 균형 외교가 가능하겠지만, 현재 한국은 안보 분야에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중간자적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한광수 : 그동안 한국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뼈아픈 사건을 겪으면서도 경제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받아왔다. 앞으로도 저들 거대 국가의 어느 한쪽도 피할 길은 없다.

유의할 점은 두 시장이 서로 독립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파국을 향해서 대결에만 몰두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중은 서로 거대한 보완 잠재력과 깊은 상호 의존으로 이어져있는 시장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지난 80년 미중관계의 얼개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짧은 지면 안에서 최대한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 수출의 상당 부분도 중국에서 한 차례 가공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연결 구조에 들어 있다. 그들의 거친 대립이 불가피한 협력의 부산물임을 잊으면 곤란하다.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보라. 그들은 백악관의 강경파들 위에 군림한다. 결국 권력은 시장의 힘을 벗어나기 어렵다. 말의 잔치에 현혹되면, 가서는 안 될 길을 선택하는 과거 우리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기 쉽다.

우리 경제의 지상과제 중 첫째는 미중 양대 시장 활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미중 두 나라를 더 잘 알아야 한다. 시대 인식이 전면적으로 미흡하다. 얼마 전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만나고 온 우리 국회의원들 중에 "미국 의원들은 한국을 잘 모르더라"며 혀를 차는 의원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위험한 태도다. 미중 양국은 초강대국이다. 우리에게 그들이 중요한 만큼, 그들은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국론 분열은 방치되고 있고, 어디에도 국민의 열망을 수렴하여 초당적 대외 전략으로 응집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구한말 이른바 우리 선각자들도 협력보다는 서로 죽일 듯이 대결에 몰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국제적인 분쟁지역이 갖는 고질병인가?

우리는 미중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독일의 중국 외교를 보자. 메르켈 총리는 임기동안 최근까지 중국을 열 번 방문했다. 쉬뢰더나 슈미트 등도 비슷했다. 한국 외교는 어떤가? 마주하는 중국 관리를 보는 시각도 문제다. 한국 고위 관리 중에는 중국 관리를 두고 "단순해서 대화가 안 된다"고 혹평한 사람도 있다. 위키리크스에 뜬 얘기다. 같은 중국 관리를 두고 미국에서는 "그들은 한결같이 우수하다. GM, 포드의 최고경영자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누구 말이 맞겠나?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한국은 외교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나라다. 더구나 오늘날 외교는 외교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과 비전을 미국과 중국 각계각층에 허심탄회하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소극적인 외교, 의존 외교, 외국어가 서툰 외교가 오늘날 우리를 '불안한 곡예'로 몰아넣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가 정말 한반도의 앞날을 주도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외교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프레시안 : 최근 중국 경제가 성장률 둔화를 겪는 등 위험이 커진다는 지적이 대두한다. 국유기업 부실과 부정부패 문제도 고질적이다. 여기에 미국은 무역전쟁을 통해 중국 경제를 계속 압박하고 있다. 과연 중국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한광수 : 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놀라운 발전은 서방의 중국붕괴론이나 중국위협론 같은 폭탄성 전망이 난무하는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국의 발전을 마냥 좋아할 나라가 어디 있겠나?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 정부는 미국과의 무역전쟁보다 국유기업 부실 등 국내 경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유기업 부실은 거대한 난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이 문제에 얼마나 진지하게 대처하는가를 제대로 추적하기보다는, 이를 '중국 때리기'에 더 요긴하게 이용하곤 한다.

중국 경제가 힘겨운 것은 사실이지만 국유기업 개혁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금 중국 정부는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제2의 문화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대응하고 있다. 왕치산을 국가 부주석으로 다시 선출한 것도 "파리건 호랑이건 때려 잡겠다"는, 반부패에 대한 그의 경륜과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중국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갈 때마다 중국 관료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참고로 시진핑도 본래 사정 전문가다. 상하이방을 정리한 그의 능력으로 후진타오의 결정적 신임을 얻었다. 시진핑과 왕치산은 어릴 적부터 친구이기도 하다.

"서방이 전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중국 밖에서 중국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2005년 사스가 유행할 때, 베이징에서 끝까지 공장을 지켜 주목을 받은 LG의 노용학 부회장은 귀국 후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방이 말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우리는 서방 정보를 거를 줄 아는 식견을 단단히 갖출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핵심은 정보 전쟁이다.

중국의 성장률이 6%에서 아슬아슬해지자, 일각에서는 곧바로 중국 경제의 폭락을 점친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방의 예측대로였다면, 그동안 중국은 수십 번 망했어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국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연착륙 중이라고 평가한다. 중국 정부 내에서는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연 5% 성장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6% 이상의 성장을 이어왔다. 박태준 회장은 즐겨 말했다. "왜 이렇게 중국 걱정이 많아요? 우리 일이나 잘하지!"

트럼프가 중국을 관세로 한창 공격하던 2018년 여름에도 세계적인 경제전문기관들은 한결같이 중국의 지속 성장을 전망했다. IMF를 비롯하여, HSBC, 골드만삭스 등이 그랬다. 그들은 일제히 중국의 시장규모가 2030년에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한다. 종합 국력으로 보면, 중국은 아직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시장 규모를 보면, 중국은 2014년에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2018년 현재 구매력 기준으로 중국의 GDP는 23조 달러인 반면 미국은 20조 달러 수준이다(이상 IMF 발표). HSBC는 2030년 중국과 미국 GDP가 각각 26조 달러, 25조2000억 달러로 역전될 것으로 내다봤다(국제환율 기준).

그리고 이들 전문기관들은 일제히 한국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전망한다. 21세기 중반에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필수 기본 전제조건이 있다. 중국 시장 활용과 남북협력이다.

▲ "미중 신냉전은 없다. 두 나라는 앞으로도 '할퀴고 끌어안으며' 경쟁의 공존을 이어갈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지난 2017년 7월 8일 G20 회의에 참석해 독일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모습. ⓒAP=연합뉴스

세계 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 '공존'

프레시안 : 중국이 이처럼 성장한다면 결국 미중 두 나라의 패권은 충돌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격화하는 미중 경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활로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한광수 : 동양과 서양이 다르듯이, 중국과 미국의 DNA도 다르다. 군사력이 월등한 미국은 간단하게 중국을 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도 방어에는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한 상태다. 오늘날 전쟁으로 모두가 파멸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은 세계제국인 미국과 갈등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미리 알아서 수그리는 나라는 전혀 아니다. 중국인들이 원하는 바는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다. 이것은 1940년대 마오쩌둥 시대부터 이어져온 중국 지도부의 기본원칙이다. 미국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 장제스는 대륙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중국은 WTO 가입 협상에서 미국에 혹독한 값을 치렀다. 협상이 진행 중인 과정에서 미국은 유고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기도 했다. WTO 협상장에서는 "우리 미국에서 중국 고기는 개도 안 먹는다"는 얘기도 들어야 했다.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이처럼 중국의 발전에는 인내가 무기로 작용한다. 인내가 미국과의 협력을 지켜왔다. 중국이 발전하고 나면 중국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중국편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세계제국은 모두 군사력으로 올라섰다. 로마제국과 대영제국, 그리고 미국이 그랬다. 그러나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천년 동안 중국이 중화제국으로 군림한 배경은 무력이 아니고 무역이었다. 주력 상품은 청화백자였다. 지금 중국이 내세우는 일대일로 전략도 과거 실크로드의 현대판이다. 그것은 상인의 길이었지 군사용 도로가 아니었다. 앞으로 중국으로 일부 시장 주도권이 넘어간다 해도 그것은 패권이 아닌 부분적인 경제력의 이동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같은 권력 이동은 없었다.

중국은 앞으로도 미국과의 군사적, 경제적 충돌을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양국이 공존하는 글로벌 다원화 시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세계 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것이다. '공존' 말이다.

격변기에 부화뇌동은 금물이다.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각종 시행착오를 범하면서도 일관되게 미중 양대 시장을 활용해왔다. 지금은 세계 각 나라마다 실리를 찾는 데 몰두하는 세상이다. 우리와 가까운 동남아 각국도 미중 사이에서 철저히 실리 위주로 움직인다. 냉전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눈 감고 어느 한쪽에 붙는 것은 '금지된 장난'이다.

더구나 우리는 분단국이다. 그것도 적대적 상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힘든 아킬레스건이다. 그 배경에 앞서 말한 미중 밀약이 있다. 앞으로도 북미 양국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아직 동아시아 전략을 안정화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수용하는 데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조하고 힘센 패권국의 모습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립과 협력으로 뒤얽힌 미중관계가 그대로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움직임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중국은 롤러코스터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시장 전략을 줄기차게 이어갈 것이다. 경제발전은 중국의 지상과제다. 미국의 달러 패권을 유지시켜 온 페트로 달러(석유 달러) 시스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세계 원유의 생산과 무역구조가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러와 위안화는 대립보다 협력의 길을 걸을 것이다(5장 참조). 그들은 상호 이익에 섬세하게 행동한다. 이미 그 첫 단추가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개로 안정적으로 꿰어져 있다.

이제부터 미중 양국은 서로의 DNA가 다름을 인식하는 단계로 서서히 접어들 것이다.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의 시행착오를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협력과 갈등이 겹쳐진 이 시대를 새로운 안목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거기서부터 우리 한국의 앞날이 열린다. 우리처럼 동서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하는데 가장 적절한 위상과 경험, 역사, 그리고 역량을 지닌 나라는 없다. 미국에는 2백만 동포가 있고, 중국에도 그에 상응하는 동포가 있다. 남북은 그들과 엇갈린 동맹이자, 엇갈린 적이었다. 손을 맞잡으면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해내야 한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문화대국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거기에 미국과 중국을 함께 끌어들이면, 다원화한 글로벌 문화의 교차로로 거듭 나는 길이 열린다. 행운은 누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친미도, 친중도, 남북의 화해 협력도 그 틀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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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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