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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시를 채우는 존재는 사람이다

[대담①] 로버트 파우저-김시덕의 도시 재생 이야기

"'넘버 투'라는 의식은 미시간 대학교만이 아니라 대학이 속해 있는 앤아버 전체로 확대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앤아버는 인구가 12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대도시가 갖는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인 자극을 찾기는 어렵다. (...) 이 작고 변방에 있는 도시 앤아버를 언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 평생 이 도시에서 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딘지 모를 '중심'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중심을 향한 앤아버의 집착을 정확하게 발견한 것은 2014년, 그러니까 이 도시를 떠난 지 약 29년 만에 다시 돌아와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 내가 떠났던 것처럼 학창시절 친구들 역시 대부분 자신들의 '중심'을 찾아 앤아버를 떠나 살고 있었다. (...) '변방'일수록, '서열'에 민감한 곳일수록 '명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한국에서 살 때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난 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의 변화를 느끼곤 했다. (...) 결국 고향을 떠나 동생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이사를 결정하며 내 머리를 스친 것은 토머스 울프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었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로버트 파우저, <도시 탐구기>)

도시를 채우는 존재는 사람이다. 허나 오늘날 사람은 결코 도시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개발을 앞세운 자본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서울이 젠트리피케이션에 허덕이는 이유, 한 때 호시절을 보내던 기업도시가 공장이 사라진 후 몰락의 길에 들어서는 이유, 농촌도시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도시는 한국 특유의 역사와 한국인의 특성을 응축해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세계적 현상이 된 신자유주의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의 이 같은 모습은 현재 영국에서, 독일에서, 미국에서, 일본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로, 하지만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서울과 대전, 교토, 뉴욕을 비롯한 세계 14개 도시에서 지내온 독립학자 로버트 파우저(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박사는 <도시 탐구기>(혜화1117 펴냄)에서 그가 겪은 각 도시에서의 일화와 생각을 정리해 도시로 비춘 도시인의 삶을 이야기했다. 도시에 관한 인문교양서이자, 각 도시에 관한 간략한 역사서이자, 무엇보다 도시를 이루는 사람을 이야기한 이 책은 한편 쓸쓸한 기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생생한 우리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 읽을 수 있다. 파우저 박사는 오늘날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떠오른 개량한옥 밀집 지역 서촌 보존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책은 <프레시안>에 서평 시리즈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를 연재하는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가 연재의 첫 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미국 도시를 보며, 한국의 도시재생을 예측한다)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문헌학자 김 교수는 직접 도시 곳곳을 걸어 쓴 <서울 선언>(열린책들 펴냄)에서 오직 사대문 안을 서울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우리 통념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다양한 얼굴을 쪼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 책의 다음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도시를 통해 인연을 맺은 두 저자가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혜화1117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은 오랜 기간 서울에 체류했고, 그밖의 여러 도시에서 생활한 이다. 한 사람은 일본과 한국의 대도시 경험을 한 이다. 두 사람은 도시에 관한 다양한 주제, 곧 젠트리피케이션부터 도시 재생, 도시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중요한 주제는 도시 재생이었다. <도시 탐구기>에서도 언급된, 파우저 박사가 현재 거주하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도시 재생 성공과 실패 사례를 시작으로 두 대담자는 한국의 도시 재생을 다양한 관점에서 비춰보았다. <프레시안>은 대담 흐름을 끊지 않는 차원에서 개입했다.

대담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해 볼 법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민자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건 도시 재생을 위해 중요하다. 결국 인구는 대도시로 밀집하기 마련이며, 이에 맞서는 도시 재생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서울의 밀집도를 오히려 올리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서울 개발의 주도권은 민간이 아닌 공공이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주인공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두 편에 나눠 연재한다.

▲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혜화1117에서 로버트 파우저 박사와 김시덕 교수가 대담을 나눴다. 대담 장소인 출판사 혜화1117 '사옥'이자 이 일인출판사의 이현화 대표 거주지인 이곳은 1936년 지어진 고택이다. 이 대표가 거주지 목적으로 지난해 이 집을 구입 후, 리모델링해 일인출판사를 차렸다. 리모델링 당시 예전부터 이 대표와 인연이 있던 파우저 박사가 한국에 올 때마다 들러 이 대표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이 집의 기와나 주요 기둥은 전부 옛것을 재활용했다. 파우저 박사는 서울 거주 당시 서촌에 '어락당(언어를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지어 생활하기도 했다. 사진 왼쪽은 김시덕 교수, 오른쪽은 파우저 박사. ⓒ프레시안(최형락)

서울은 재생 대상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서울은 뉴타운 정책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전면 재개발로 신음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서울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도시 재생, 마을 재생 사업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서울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죠. 하지만 도시 재생 역시 뉴타운과 다르지 않게 원주민을 쫓아내고 대자본의 이익만을 위한 사업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서울 창신동 등 재생 지역에서 꾸준히 나오는 소리죠. 두 분이 가진 도시 재생에 관한 생각을 시작으로 대담을 풀어가면 좋겠습니다.

로버트 파우저(이하 파우저): 도시 재생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도시 재생의 '재생'을 영어로 쓰자면 '리제너레이션(regeneration)'이 될 텐데, '리(re)'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어요. 도시를 재생한다는 건 해당 도시가 현재 '죽은 상태'라야만 성립합니다. 해당 도시를 죽은 상태로 규정한다면, 결국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은 가치 없는 존재라는 얘기가 되죠. 뜻 자체가 좋지 않습니다.

'재생'을 일본어로 '사이세(再生)'라고 합니다. 같은 한자에서 출발한 단어를 두 나라가 사용하죠. 그런데 한국에서 사용하는 '도시 재생'과 일본인이 사용하는 '토시 사이세'의 어감은 조금 달라요.

일본에서 도시 재생은 주로 빈 가게가 많은 죽은 상권을 활성화함을 뜻합니다. 이미 죽어있으니 살려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의 도시 재생 대상은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은 동네, 즉 낙후했지만 사람은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어서 죽은 곳이 아닌데도 살리겠다고 합니다.

김시덕: 지자체가 인위적으로 죽인 거죠. 서울 곳곳에 재개발하겠다고 정비구역으로 묶어두고는 방치한 지역이 많습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일본의 경우 주로 일본철도(JR) 신칸센이 통과하지 않는 작은 역 부근지 등 명백히 상업 활동이 죽은 곳을 살리자는 게 재생의 목적입니다. 반면 한국의 도시 재생 대상은 원도심이고 구도심이고를 가리지 않습니다. 일본이 과거 버블 경제 절정기 대대적으로 추진한 지이키오코시(地域おこし, 마을 부흥) 사업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정부 돈은 대규모로 쏟아 부었지만 크게 실패한 사업이죠. 유후인 정도가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입니다. (지이키오코시에 관한 일본 위키피디아 바로 보기)

한국의 큰 문제는 재개발과 도시 재생의 개념 차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정부나 지자체는 신도심 개발을 이유로 핵심 기관은 그곳으로 이전해 원도심을 죽인(낙후화한) 다음, 뒤늦게 원도심 재생 사업한다고 돈을 뿌리고 있습니다. 병주고 약주는 격이죠. 그렇다고 그 돈이 원도심에 살던 주민에게 가는 것도 아닙니다. 건물주와 토지주가 써야 할 돈을 정부가 대신 써주는 격이죠. 그렇게 죽었던 도심이 활성화된 후엔 결국 전면적인 재개발이 일어나겠죠. 세금을 얼마나 낭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사례로 돌아가자면, 도쿄 23구의 경우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방식의 재생 사업이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원도심을 한국식으로 죽이지 않으니까요.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은 죽은 적이 없는 도시입니다. 아현동도 을지로도 원래 살아있던 지역이에요. 공무원 같은 외부인들이 이곳 지저분하니 밀어야 한다고 해 저 꼴이 난 거죠.

-파우저 박사는 책에서 도시 재생의 실패 사례로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인 프로비던스(Providence) 시의 이야기를 소개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의 주도로 재생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주변부로 다시금 밀려났다고 하셨죠. 김시덕 교수는 유후인을 성공 사례로 드셨습니다. 왜 어떤 곳은 재생에 성공하고 어떤 곳은 실패할까요?

파우저: 부끄러운 미국의 역사를 말하게 됩니다만, 프로비던스시 재생사를 잠시 정리해보죠.

프로비던스시에 브라운 대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 주변에 18세기경, 정조대왕 시절 지어진 오래된 집들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이 슬럼화했죠. 오래된 집이니 난방시설도 부족하고, 살기도 좋지 않아 자연스럽게 그리 됐습니다. 도시 빈민이 모여들게 됐죠. 즉,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됐습니다.

1950년대,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대학과 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습니다. 지역을 '정화'하자는 거였죠. 지역 오피니언 리더가 모여 이곳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개량해 되팔았습니다. 명분은 역사 보전입니다. 이곳에 거주하던 흑인 세입자 커뮤니티는 전부 쫓겨났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죠. 이 지역은 이후 시의 대표적 부촌으로 변했습니다. 프로비던스를 찾은 외지인이 가장 먼저 들르는 관광지가 됐습니다. 당시는 이 사업이 성공사례로 알려졌습니다. 시카고 대학 등도 (비록 실패했지만) 프로비던스 사례를 모방했죠.

김시덕: 박사께서 책에 언급한 이야기입니다만, 프로비던스는 그렇게 노력했으나 결국 보스턴에 밀려나 주변부로 다시 가라앉았죠. 사람은 밀도가 높은 대도시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파우저: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는 실패한 게 맞습니다. 제가 책에 썼듯, 1970년대 들어 프로비던스가 다시 가라앉자 새로운 재생 사업이 단행됐고 그 결과 2000년대 프로비던스는 되살아났습니다. 상권이 활성화하고 외지인이 유입됐죠.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도시는 다시 가라앉았습니다. 보스턴의 주변부 도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죠.

다만 브라운 대학은 이득을 봤습니다. 캠퍼스 주변이 깨끗해지면서 사람이 바뀌고 학생 유치에도 도움이 됐으니까요. 말하자면, 브라운 대학의 이익을 위해 시 전체가 매달린 셈이죠.

프로비던스 사례는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의 북촌, 전주 한옥마을과 비슷한 듯합니다. 제가 지금은 프로비던스 인근에 사는데, 외지인이 올 경우 데려갈 만한 곳이 브라운 대학 주변 정도입니다. 북촌이 현재 소비의 대상이 된 것과 비슷하죠.

프로비던스가 결국 보스턴의 주변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대도시가 항상 사람에게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최근 2~3년 사이에 미국에서 주로 보이는 현상이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이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대도시의 집값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보스턴에서 프로비던스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보스턴과 프로비던스의 거리는 서울과 평택 정도(64.9㎞)입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젊은 중산층이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젊은 부부가 삶을 꾸리기에 대도시는 너무 비싸죠.

미국 중부의 많은 도시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년 사이 뉴욕시 인구가 줄어든 이유입니다.

▲ 프로비던스시 전경. 아래 강은 본래 도로였으나 1970년대 도시 재생 사업 때 복원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이곳을 찾기도 했다. 프로비던스는 관과 자본의 주도로 여러차례 재생에 나서 어느 정도 재생 효과를 누렸으나, 결국 중심부인 보스턴을 극복하지 못했다. ⓒflickr.com

도시를 채우는 건 사람

-<도시 탐구기>를 보면 박사께서는 특히 도시를 채우는 사람의 중요성을 크게 보시는 듯합니다. 결국 도시란 사람이 사는 곳이니만큼 도시 재생도 사람을 위해 이뤄져야 할 텐데, 지금 한국의 도시 재생은 주객이 전도됐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됩니다.

파우저: 저는 미시간주 (앤아버) 태생입니다. 미국 중부(미드웨스트) 사람이죠. 반면 프로비던스는 (최초의 식민 지역인 미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 도시입니다. 지역색이 아주 강한 곳이죠.

어학적으로 미국을 보자면, 크게 동부 방언과 남부 방언이 있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소위 말하는 표준어(General American English) 지역입니다. 미국 TV를 보면 나오는 발음이죠. 제가 그 말투를 씁니다. 이런 언어권에서 생활하다 처음 프로비던스에 갔을 때 지역 방언이 무척 신기했죠. 뉴잉글랜드 방언과 뉴욕 방언을 섞은 듯하달까요.

대표적인 지역 말투가 '유(you)'의 복수형으로 '유스(yous)'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대규모 이민 시기 이탈리아 이민자 사회의 영향입니다. 이민자들이 영어를 배우기 어려우니, 모든 복수형에 에스(s)를 붙여 발음하던 흔적입니다. 따라서 프로비던스 노동계층 사람들은 일상적인 인사말을 사용할 때 "하우 아 유~즈 투데이(How are yous today)?"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아마 흔히 미국은 거대한 대륙국이니 한국과 거리개념이 다르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중부의 거대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거리개념은 그렇습니다. 자동차로 1~2시간 거리의 슈퍼마켓에서 쇼핑하고 집에 돌아가는 게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프로비던스 사람들은 다릅니다.

프로비던스가 위치한 로드아일랜드주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입니다. 제주도의 두 배 정도 크기입니다. 프로비던스 사람들은 (서울-평택 거리인) 보스턴도 매우 멀게 느낍니다. 저는 엄밀히 말해 프로비던스 바로 곁의 도시인 포투켓(Pawtucket)이란 곳에 삽니다. 프로비던스와 포투켓 거리는 우리가 인터뷰하고 있는 종로구와 마포구 정도 입니다. 그런데도 두 도시 토박이들은 상대 도시를 매우 먼 곳으로 인식합니다. 자기 마을을 향한 애착이 아주 강하죠.

이런 오래된 마을에서는 이웃 사람과 깊은 인연을 맺고 지내야 합니다. 저희 집 바로 앞에는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계시고, 옆에는 40대 남성 프로그래머가 홀로 삽니다. 이 세 집이 자연스럽게 미시적 커뮤니티를 만들게 됩니다. 저의 경우 한국에 오는 동안 이웃집 아저씨에게 제 집을 봐달라고 부탁해뒀죠. 이런 ‘자발적 마을 만들기’는 정부가 주도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김시덕: 한국 정부, 한국 지자체는 자신들이, 공무원들이 마을 만들기를 주도하려 하죠.

일본의 대도시에도 마을 정체성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한국만큼 사람의 이동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반면 한국의 도시인은, 특히 세입자라면 끝없이 이사해야만 합니다. 100년에 걸쳐서 전 국민이 여러 차례 이동했고, 지금도 이동 중이죠.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에서 커뮤니티 문화, 마을 문화가 자연스럽게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도시 재개발이 오직 토지주, 건물주의 권리만 인정하고 세입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한 이 같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파우저: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살 때가 생각나는군요. 당시 오래된 동네의 집을 빌려 살았는데, 이웃 할머니들이 젊은 사람이 왔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이미 40대였는데도요.(웃음) 지역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꾸려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오래된 마을에는 미국과 비슷한 느낌이 있었어요.

김시덕: 이런 이웃 간의 교류 문화는 제인 제이콥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자발적 감시 문화'입니다. 경찰이나 국가에 치안을 맡기기보다, 소통하는 이웃 주민 간 자발적인 감시 문화를 만드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이론이죠.

그런데 한국이라고 해서 마을이 모두 해체된 건 아닙니다. 서울 도심처럼 고도화한 도시에서나 그렇죠. 지역 소도시에서 마을 문화는 여전히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를 억지로 대도시에 이식하려는 게 최근 몇 년간의 마을 재생 사업이죠. 현재의 행정 담당자들은 '도시는 악하고 마을은 선하다'는 생각을 가진 듯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정부나 지자체가 주도하는 마을 만들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전 국민에게 2만 엔씩 그냥 뿌린 적이 있습니다. 과거 억지 마을 부흥 사업이 실패하자, 저소득층은 일단 돈만 있으면 바로 소비하리라고 보고 정책을 튼 결과죠.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 로버트 파우저 박사. 세계 여러 나라를 주유한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13년여를 살았다. 한국어에 능통해 서울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한 그는 한국어 책을 한글로 직접 쓴다. 영어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몽골어도 공부했다. 한국의 서촌 보전 운동에 큰 힘을 보탠 인물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서울은 '언젠가 개발될 도시'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이제 서울 사람들은 이웃과 소통하기보다 이웃과 자신을 차단하는 삶을 더 욕망하는 듯합니다. 도시와 아파트 단지를 분리하고, 단지 내에서도 소통을 분리하는 식으로 말이죠.

김시덕: 그렇게 단순화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사람은 아파트 삶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에 투자한 결과 발생하는 자산 상승을 욕망하죠. 서울만 해도 도심 바깥 지역으로 나가면 옛 마을의 분위기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다시 제이콥스를 소환하자면, 서울도 쪼개서 봐야 합니다. 서울이라고 하나로 묶어서 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강남 3구 같은 도심지와 나머지 구를 달리 봐야 합니다. 서울의 마을 재생은 강남 3구 같은 도심 지역의 외곽에 존재하는 커뮤니티를 살릴 목적으로 진행돼야지, 없는 마을을 억지로 만들겠다고 돈을 투자하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현상 유지냐, 도시 재생이냐, 재개발이냐를 두고 주민 간 분열이 일어나 원래 있던 사람마저 흩어지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파우저: 도시 재생을 하면서 정부(지자체)가 투자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하수도관이 낙후한 지역의 하수도 개선을 위해 정부가 투자한다면 원주민 생활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 투자가 커뮤니티를 해체하진 않을 겁니다. 일본 교토가 정화조 공사를 하면서 이렇게 낡은 마을을 개선했습니다. 그런데 '하수도 개선만 하려면 너무 복잡하니, 이참에 마을 전체를 새로 만듭시다'라고 나오면 안 됩니다.

김시덕: 고장난 부분만 개선하면서 되살리는 것보다 대단지 아파트를 개발하는 게 더 큰 수익이 나니까요. 서울의 모든 원도심은 잠정적 재개발 대상지입니다.

파우저: 맞아요. 서울은 '언젠가 개발될 도시'입니다. 오래된 도시에 투자하지 않고, 대규모 재개발로 모든 걸 새로 만들어버리려는 욕망이 큽니다.

도쿄 우에노에 국립 서양 미술관이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서양 미술관만큼 뛰어난 작품을 소장하진 않았지만, 지역 사람이 쉽게 서양미술 작품을 현지에서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예전 한 자리에서 한국에도 이처럼 시민 문화생활을 뒷받침할 공간을 낡은 도심에 만들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더니 "한국 사람은 그냥 비행기 타고 현지에 가서 봐요"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행기를 쉽게 탈 수도 없을 텐데, 왜 이런 투자를 하지 않는지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지자체도 재개발을 선호하니 그런 것 아닐까요. 굳이 낡은 도심에 투자하는 것보다 민간이 주도하는 전면 재개발이 도시 입장에서 더 좋으니까요.

김시덕: 박정희 정권 이후 한국에 고착화한 개발 방식이죠. 공공이 투자하지 않아도 민간이 알아서 외관을 좋게 꾸미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일부 땅을 기부체납 받아 이익을 얻고요. 박철수 교수가 쓴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집 펴냄)를 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자세한 이야기가 나와요. '정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도시를 근대화할 수 있다'는 게 민간개발이 등장한 중요한 이유였죠. 결국, 오늘날 서울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근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중재 기능을 수행해야 할 정부는 빠지고 민간 이해관계자끼리 싸웁니다. 이들이 용역을 동원해서 불법을 자행하는데도 정부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도시 개발에 정부가, 지자체가 움직이고 돈을 써야 합니다.

파우저: 결국 공공이 해야 할 일을 민간이 한다는 게 한국의 문제예요. 그러니 도시에 공공성은 사라지고 민간의 욕망이 커질 수밖에 없죠.

지난 봄 서울에 왔을 때 어쩌다 보니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인터뷰 후 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야 했는데, 지도를 보니 인터뷰 장소와 역 사이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더군요. 이를 바로 가로지르면 금방 역에 도착하는데, 단지가 외지인 출입을 막아 빙 둘러갈 수밖에 없었어요. 아파트 단지가 도심 한가운데에 성처럼, 군부대처럼 들어선 결과죠. 사람이 걷기 어렵고 교통여건도 나쁜, 좋지 않은 주거 형태입니다.

-미국에는 한국처럼 대규모로 도시를 개발한 사례가 없나요?

파우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어요. 전후 200만 명에 달하는 남성이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주택 수요가 급증했죠.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게 교외 단독주택단지 개발입니다. 오늘날 '미국'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주택 형태가 그때 만들어졌죠. 이를 상징하는 주택 형태가 1947년 등장한 레빗타운(Levittown, 조립식 주택단지)입니다. 연방정부가 부동산업자 윌리엄 레빗의 조립주택 대량 생산안을 받아들여 급속도로 도시 주위를 개발했죠. 사람을 대규모로 수용하기 위해 고속도로 건설도 이 시기 붐을 이뤘고요. 실은 냉전기 소련과의 대결 목적도 이 방안에 포함됩니다.

오늘날 보기에는 개성 없는 획일적 단지의 대표격으로 거론됩니다만, 레빗타운을 단순히 좋다,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기 힘듭니다. 그저 그 시기의 현상이었다고 봐야겠죠.

김시덕: 한국의 레빗타운이라 할 만한 곳은 용인시입니다. 시 상당부분을 민간이 마구 개발해, 난개발에 따른 후유증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민간 건설업자들이 규제를 딱 피할 정도로만 공공도로를 남기고 주택 밀집도를 높인 바람에 거주 환경이 매우 안 좋아졌죠.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남양주도 이런 후유증을 겪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시 당국이나 시민이 난개발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그나마 정부가 강한 의지로 추진한 1기 신도시(일산, 분당 등)는 거주환경이 좋습니다. 1기 신도시 건설 당시는 집값 폭등으로 인해 '정부가 당장 주택 200만호를 짓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일던 시기였습니다. 공공이 투자해야만 거주민의 환경이 좋아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시민의 분노와 욕망을 아파트로 해소한 '아파트 공화국(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국에서는 파우저 박사가 말한 미국의 교외 이주 현상과는 정반대의, 도심 회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듯합니다. <도시의 승리>(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해냄 펴냄)나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리처드 플로리다 지음, 안종희 옮김,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등의 저서가 제기하는 이슈이기도 합니다. 교외를 난개발하는 바람에 교통 체증이 발생하고, 도심은 밀집에 따른 매력이 커지면서 오히려 도심 회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용인에서 볼 수 있듯 도시의 무차별 확장과 난개발이 있습니다.

▲ 전후 미국의 대표적 교외 대규모 개발지인 레빗타운의 일반적 형태. ⓒwikipedia

-도시계획은 결국 원주민/빈민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나요?

파우저: 미국은 그렇습니다. 뉴욕이 그렇고, 시카고도 그렇습니다. 시카고의 경우, 도시 남부가 20세기 이후 전통적으로 흑인 거주지였습니다. 지역이 점차 낙후하고 시카고 대학 부근이 슬럼화하자, 학교의 학생 유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때 시카고 대학은 애리조나주로 이주하려고도 했죠.

이주의 대안으로 제시된 게 슬럼지역을 대규모 개발해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자는 거였습니다. 지금 시카고대 주변 동네를 걸으면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가 갑자기 현대식 주택단지가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도시계획이 남긴 흔적입니다.

다만 시카고대 인근 재생은 프로비던스 사례만큼 (어느 정도나마) 성공적이진 않았습니다. 인근 지역이 워낙 낙후한 데다, 흑백 인종 갈등 문제도 컸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기본적으로 인종 문제와 결부돼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미국에서 일정 비율 이상의 흑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성공적으로 재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외적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게 뉴욕 브롱크스 지역입니다. 흑인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에 (백인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지역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변화 후 대자본이 들어와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죠. 이처럼 미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단순화하기 어렵습니다.

김시덕: 과연 지자체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어떻게 보느냐를 물어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한국의 지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상업 지구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면 세금이 많이 걷혀 좋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활성화된 지역에 재건축, 재개발 바람이 불면 계급 교체가 일어나니 좋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계급 변화를 유도합니다. 한국의 경우, 서울은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 곳이니 인구가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젠트리피케이션 후 지방의 중산층이 서울의 빈민층을 밀어내는 구도가 만들어지죠.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은 계급 전쟁입니다.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디로 흩어졌을까요. 아마 멀게는 원주, 천안, 안성과 같이 범 서울 생활권이라 할 수 있는 도시로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을 겁니다. 서울 인구는 줄고 경기도 인구가 늘어나는 이유겠죠.

파우저: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다만 모든 도시가 인구를 빨아들인다고 보기는 어렵고, 서울 정도로 사람을 흡수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하는 도시는 5~6개 정도 됩니다. 워싱턴이 특히 심하고,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LA 정도가 그렇습니다.

미국의 도시는 여러 계층으로 나뉩니다. 땅이 넓고 도시도 많다보니 인구 밀집도가 낮은 도시에서는 재생 사례가 발견되더라도 사람이 밀려나진 않아요. 예를 들어 미국 한가운데에 캔자스시티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곳의 낙후한 공장 지대에도 힙스터들이 찾을 만한 가게가 생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시의 힙스터 문화 소비가 가능한 계층은 한정됐고, 재생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은 없으니 밀려나는 사람도 없죠. 미국 중부의 여러 도시는 지금도 외곽에 계속 주거지를 짓고 있습니다. 이미 도시가 포화 상태에 달한 (뉴욕 등의) 대도시와는 다르죠. 포화도가 너무 높고 밀집도도 너무 높은 도시에서나 젠트리피케이션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김시덕: 도쿄에서는 한국만큼 젠트리피케이션이 심각하게 일어나진 않습니다.

일본의 도시는 기본적으로 넓게 퍼져나갑니다. 대지진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층 주거지가 서울만큼 높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내진 설계가 발달한 최근에서야 고층 주거지가 늘어나는 수준이죠. 도시가 넓게 퍼져나가다 보니, 그만큼 도시 내부에 빈틈도 많습니다(밀집도가 떨어집니다.). 그러니 빈민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서 중산층과 함께 거주합니다.

지난 6월에 도쿄를 찾았을 때 산야(山谷)지구라는 유명한 빈민촌을 방문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입니다. 외국인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도 도쿄 곳곳에 있습니다. 인도인은 도쿄 동남쪽 끝인 에도가와구에 주로 살고, 쿠르드인은 도쿄에서 열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사이타마현 와라비시에 모여 삽니다. 그래서 와라비는 '와라비스탄'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모여 사는 한국의 마석, 안산, 군포 등과 비슷합니다.

파우저: 교토에서 생활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일본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활발히 일어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의 경우 다양한 사람이 한 지역에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아주 작은 집 바로 옆에 새로 올린 5층짜리 집이 있는 식이었죠. 여러 계층의 사람이 한 곳에 어울려 사니 전면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 어렵습니다. 제 생각엔 서울에도 이런 지역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성북동이 그렇죠. 이런 지역이 앞으로 도시의 다양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봅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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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기자
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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