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비가 기어이 50조 원을 돌파했다. 국회가 10일 본회의를 열어 2020년 국방예산을 정부안과 비슷한 수준인 50조 1527억 원으로 의결한 것이다. 이는 올해보다 액수로는 3조 4556억 원이, 비율로는 7.4%가 오른 것이다. 우리나라 국방비가 50조 원을 넘어선 것도 건국 이래 처음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의 국방비 증액이 남북관계와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에 미칠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며, 국방비 동결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문제의 심각성이 비해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실망감'과 '배신감'은 다르다
최근 남북관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회복하기도 힘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전문가들과 언론은 그 주된 원인을 '하노이 노딜'의 여파에서 찾는다. 작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올해 2월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진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북미협상 중재 및 촉진 역할에 한계가 드러났고 남북경협 역시 하나도 제대로 이뤄진 없기 때문이다.
이게 주된 원인인 것은 맞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문재인 정부의 '선의' 부족보다는 역량 부족 및 한미관계의 현실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에 따라 북한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 여러 차례 실망감을 토로해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토록 남북관계가 악화된 이유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또 한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작년에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단계적 군축" 추진과는 반대로 남한의 역대급 군비증강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품고 있다. 일종의 근친 증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작년 4월 판문점과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군 수뇌부를 총출동시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시켰다. 그만큼 군사 문제 해결에 의지를 갖고 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거꾸로 흘러갔다. 그러자 김정은은 올해 7월 25일 실시된 미사일 발사를 지도한 자리에서 "남조선 당국자"를 향해 "하루빨리 지난해 4월과 9월과 같은 바른 자세를 되찾기 바란다는 권언을"을 전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김정은의 권언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8월 중순에 실시된 한미 연합지휘소훈련에는 '수복지역에 대한 치안·질서 유지'와 '안정화 작전'까지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북한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8월 14일 국방부는 '2020-2024년 국방중기계획'을 통해 5년 간 무려 290.5조 원의 국방비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 때 '김정은 참수 작전' 운운하면서 도입 결정된 F-35가 문재인 정부 들어 착착 들어오고 추가 구매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했던 북한군 수뇌부는 김정은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위신이 땅에 떨어진 김정은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최근 북한의 언행은 분명 유감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 원인의 작지 않은 부분을 문재인 정부가 제공한 것은 아닐까?
이는 김정은의 위신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한의 대규모 전력증강은 재래식 군사력을 줄여 경제건설에 쓰겠다는 계획부터 중공업의 비중을 낮추고 경공업의 비중을 높이겠다는 경제정책과 비핵화에 대한 판단에 이르기까지 김정은 정권의 국가전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단계적 군축"에 합의하지 말았어야
문재인 정부는 말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 자주국방 능력을 확보하고 주변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군비증강이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의 엄청난 국방비 투입에 힘입어 한국은 이미 세계 7위의 군사 강국으로 올라섰다.
2006년 한국군 주도의 한미군사훈련을 목도한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국 국방장관에서 보낸 편지에서 "지금 당장 전작권을 전환해도 문제가 없다"며 한국군의 우수한 능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400조 원 가까이 국방비를 써왔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정부의 국방비 증액 논리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국방비를 증액해 대규모 군비증강에 나설 계획이었다면 차라리 북한과 "단계적 군축" 추진에 합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러한 합의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사상 최초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극도의 불일치'는 "단계적 군축" 합의를 안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가운데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이 국방비 증액일 것이다. 2017년 GDP 대비 2.5%였던 국방비를 5년 후에는 2.9%로 늘리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상당한 기회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남북관계 악화와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의 낭비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거듭 호소하고 싶다. 2021년부터는 국방비를 50조 원 정도로 동결하자고 말이다. 이렇게 해도 상당한 수준의 군비증강은 가능해진다. 동시에 북한에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늘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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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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