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자산이나 상품이 아니라 인권으로서 주거 개념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2018년 5월, 한국주거권 실태 조사 당시 UN 주거권 특별보고관의 발언이다. 가장 기본적 권리 중 하나인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 올해 10월 계약갱신청구권과 임대료상한제 등의 도입을 요구하며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연대가(이하 개정연대) 출범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선 이런 요구가 집주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시장 질서에 어긋나 되레 세입자에게 손해가 될 거라고 한다. 주거권 특보가 말한 '인권으로서 주거 개념', 즉 주거권은 한국사회에서 너무 낯선 개념인 듯하다.
주거권이 낯선 한국사회
주거권이라는 권리가 담고 있는 내용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월세 부담을 덜기 위해 전세로 옮기고 싶거나, 가족이 늘어나서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 또는 2년 마다 이사 다니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 등을 권리의 언어로 풀어내면 그게 주거권이다. 하지만 '누구나 주거를 위해 적정한 비용만 지불하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주할 수 있도록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는 순간, 현실에서 주거권은 생소한 권리가 된다. 이와 같은 주거권이 현실에 실제로 펼쳐지는 상황을 떠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8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자가 소유자의 평균 거주기간은 10.7년이다. 이에 반해 임차 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3.4년이다. 집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2년마다 돌아오는 재계약 시기이면 전·월세가 올라 주거비 지출이 늘거나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세가 얼마나 오를지 모르는 채로 마음을 졸일 바에야 거액이지만 대출을 받아 이자를 내면서 집을 사는 게 안정적이라는 판단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소유를 선택할 때 비로소 원하는 만큼 살 권리, 주거권을 누릴 수 있는 현실이 열리기 때문이다. 같은 조사에서 82.5%가 내 집 마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소유가 아니면 주거 안정을 상상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주거권은 주택 소유권일 뿐이다.
주거 정책이 아닌 부동산 정책만 펼친 정부
1970년대에는 주택 보급률이 70%대에 불과해 신규 주택 수요가 컸다. 정부 주도의 택지개발과 건설업의 이해가 맞물리며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집은 돈 있는 사람만 살 수 있었고 보급된 아파트는 다주택자를 양산했다. 그 이후 정부정책은 같은 일을 반복한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부동산 투기가 문제되면 정부에서는 규제 정책으로 다주택자들이 주택을 내놓도록 해 집값 안정을 꾀했다. 그러다 경기가 침체되면 다시 아파트를 지었고 부동산 투기는 다시 기승을 부렸다.
대규모 개발로 수백만 가구의 주거 환경이 달라지는 일이었지만 제대로 된 주거 정책은 없었다는 게 문제다. 수십 년간 반복되어온 개발 역사 속에서 자가 소유에 '성공'하면 안정된 주거를 보장받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든든한 자산까지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집을 사지 못하면,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런데도 국가에선 주택 보급의 증가와 자가 보유율의 확대로 주거 안정이 도모되고 있다는 태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거 안정화는 여전히 국가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부동산 정책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주택 보급률이 진즉 100%를 넘어섰지만 '사는 곳'이 아닌 주택은 계속 지어지고 거래된다.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권유하던 지난 정권이든, 부동산 투기를 근절시켜 주택가격을 안정시킬 테니 걱정 말고 집을 사라고 하는 현 정권이든 주거 정책은 오직 자가 소유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이 아닌 주거 정책이 있긴 있다. 공공임대주택 보급이다. 하지만 공공임대주택은 공급량이 매우 부족하다. 정부에서 발표한 10년 이상 임대 가능한 공공임대주택은 2018년 기준 136만 가구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분양 전환 가구, 집이 아니라 임대료를 보조하는 전세임대, 시세와 거의 차이가 없는 행복주택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136만 가구는 전체 가구 대비 6.7%에 불과하다.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만 임대주택 청약 당첨률은 복권당첨에 비유될 정도다. 공공임대주택 보급은 여전히 너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약갱신청구권, 임대료상한제 도입은 주거권의 시작
수억 원씩 빚을 내서 집을 사거나, 공공임대주택에 당첨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이 두 가지 길밖에 없을 때 한국 사회에서 주거권은 계속 낯설고 생소한 권리일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만큼 적정한 가격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주거권을 중심으로 제도와 정책을 정비해야한다. 개정연대에서 요구하는 계약갱신청구권과 임대료상한제는 바로 그 맥락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주택임대차계약은 집이라는 재화를 소유한 사람에게 주거를 원하는 사람이 비용을 지불하고 임대하는 사인(私人) 간의 계약관계로 설명된다. 이 틀에서는 누구나 안정적인 주거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요구되는 계약갱신청구권과 임대료상한제 도입이 재산권을 침해하는 제도가 된다. 어떤 물건을 소유한 사람이 자신이 지정한 가격으로, 자신이 원하는 기간만큼만 빌려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재산권의 행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껏 정부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부동산' 정책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자가 소유를 통한 주거 안정을 도모 했고 이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당연할까?
바로 작년에 상가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됐다. 계약갱신청구권이 생겨서 5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계약갱신을 청구하면 상가 사용에 관해서 10년까지 보장받고 임대료 상승은 연 5% 이내로 제한된다. 지난 몇 년 동안 건물주의 횡포에 쫓겨나는 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건물주의 재산권을 침해한 게 아니라, 자영업자의 생존권을 보호한 것이다.
주택도 마찬가지다. 1981년에 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주요 내용은 임대차 계약기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기존 주택임대차계약은 관행상 6개월 계약을 맺어왔지만 지나치게 기간이 짧아 세입자의 주거가 불안정해지면서 계약기간을 1년으로 명시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부동산 가격 폭등 시기에 세입자의 주거불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89년, 계약 기간을 2년으로 늘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도가 주택임대차보호법이다. 하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보장하는 계약 기간은 2년에 불과하고, 계약 갱신을 청구할 권리도 없다. 딱 2년 살고 나면 임차인은 주거권을 방어할 제도적 장치가 없으니 임대료를 올리거나 이사를 가는 수밖에 없다. 비용을 내고 임차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못 하나 박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은 앙상한 주거권의 일면이다. 주거권이라는 게 낯선 사회다보니 주택 매매권일 뿐인 집주인의 재산권이 임차인의 주택 사용, 주거 안정성을 흔들고 있는 이상한 형국인 것이다. 주택임대차 시장이 기본적으로 주거권을 보장하는 전제에서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임대료상한제 도입 요구는 집주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주택임대영역에서 소유권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의 사용과 주거를 제한당하는 현실을 끊어내기 위한 주거권에 대한 요구다. 집 때문에 2년 단위로 끊어지는 인생 계획이 아니라 더 길게 내다보고 삶을 계획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다. 집을 가졌건 갖지 않았건 누구나 원하는 집에서, 원하는 만큼, 적정한 가격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주거의 권리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다.
하소연이 아닌 기본권 실현요구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이었으며, 20대 국회에서만 관련 개정안이 41건이 상정되어 있지만, 계약갱신청구권과 임대료상한제를 골자로 하는 법안 개정작업은 국회에서 거의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단지 세입자의 집 없는 설움을 생각해 임차기간을 좀 더 늘려달라는 하소연으로만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보편적, 기본적 권리로서 주거권을 한국사회가 보장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당당한 주장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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