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이공대를 완전 봉쇄한 경찰, 물러서지 않겠다는 시위대. 실탄, 최루탄, 물대포가 시민을 겨눌 때마다 한국에서는 어떤 기억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화염병과 벽돌에 어떤 간절함이 담겼던가 기억해낸다. 홍콩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는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자보가 붙고 훼손되는 사건도 반복되고 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이미 한국에 당도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과 우리는 어디에서 연결될 수 있을까? 경찰의 폭력을 비판하며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하면 충분할까?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립으로 보면서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면 되는 문제일까? 한국이 '이미' 이룬 민주주의를 뒤늦게 쫓아오려는 것이 홍콩 시위의 전부일까? 연대를 위해 우리 앞에 당도한 질문을 더욱 깊이 살펴야 할 때다.
굴절되기 쉬운 목소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4일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홍콩 시위를 "폭력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시위를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 간주한다. 시 주석은 "혼란을 제압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홍콩의 가장 긴박한 임무"라며 홍콩 정부의 폭력 진압을 지지했다. 시위 진압이 주권과 안보를 수호하는 행위로 둔갑한다. 이를 국가폭력을 국가안보로 정당화하려는 정부들의 반인권적 수사로만 본다면 홍콩 시위에 반대하는 중국인의 입장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의 침략전쟁인 아편전쟁 결과, 1841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래서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이 '반환'될 때 중국은 그것을 식민지 역사의 종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들에게 '반환'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는 다른 사건이었다. 영국은 홍콩인의 참정권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전과 빈곤의 혼란을 겪는 '조국' 중국보다 홍콩을 더 나은 사회로 여기도록 식민 통치전략은 작동했다. '하나의 민족'으로 정체화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다른 사회를 살았던 것이다.
홍콩인들이 중국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약속된 것이 '일국양제' 원칙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50년간 홍콩특별행정구는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약속. 그러나 이것은 홍콩 시민의 목소리를 굴절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방한한 홍콩 민간인권전선 라이 부의장도 말하듯 홍콩 시위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홍콩 시위를 사회주의 체제로부터의 이탈로 보는 의심과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 시위를 '지체된 탈식민'과 '서양식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에 사로잡힌 독립 요구로 간주하고,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 원칙의 훼손을 경고한다. 미국은 홍콩의 운명을 쥐고 싶어 한다. 미국 하원은 이번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홍콩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을 발의했다. 10월 하원을 통과한 홍콩인권법은 미국 정부가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하고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취할 권한을 부여한다. 일국 내 도시로서는 상당 수준의 자치를 보장받는 홍콩에서의 시위는 더욱 의심 당한다. 누구도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식민과 냉전의 역사에 홍콩 시위가 갇혀 있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들
1997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하나의 민족'이나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쉽게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홍콩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 했고 홍콩 시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2003년 "반역, 국가분열, 반란 선동, 중앙인민정부의 전복"을 금지하고 "외국 정치 조직 및 단체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국가안전법' 입법이 시도되자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여 철회시켰다. 2007년 '민족의식 배양'과 '애국심 고양'을 의도한 '국민교육과정' 도입이 추진되자 이 또한 철회시켰다.
이번 6월 홍콩 시위는 '범죄인 인도 조례' 개정안 발의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중국 본토로 강제 송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경찰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시민의 힘으로 9월에 법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홍콩 시민들의 요구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시위대 '폭도' 규정을 철회하라. 체포된 시위대를 조건 없이 석방하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한 독립 조사를 진행하라. 그리고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하라!
직선제 요구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400명의 선거인단이 행정장관을 뽑던 제도가 1200명까지 인원을 늘렸지만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지속되었다. 2014년 8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보통선거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후보추천위원회의 절반 이상 지지를 얻은 사람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했고 그 후보추천위원회는 기존의 선거인단과 다를 바 없었다. 홍콩 시민들에게 새로운 선거제도는 민주적 선거제도일 수 없었고 79일간 도심 점거 시위를 이어간 우산운동이 시작되었다.
'직선제 요구'는 한국의 87년 민주화항쟁과 비교되는 연결고리가 된다. 라이 부의장 역시 홍콩 시위가 한국의 80년대 운동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이 이미 이룬 직선제를, 중국 때문에 아직 못 이룬 홍콩이라는 시선으로만 봐서는 홍콩 시민들의 저항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고 정부가 국정교과서 단일화를 추진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고 심지어 그 정부는 직선제 보통선거로 선출됐다는 걸 기억하자. 민주주의를 향한 홍콩인의 열망은 한국과 동시대의 것이다.
불평등에 맞서는 자치의 요구
홍콩 시위의 배경에도 심각한 경제 불평등이 있다. 영국 식민지 시기 홍콩은 유럽과 아시아, 중국과 그 밖의 세계에서 돈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부를 축적해왔고, 2차 대전 직후 경공업 중심 수출가공기지를 형성하며 70년대 '동아시아 기적'의 주역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의 부는 아니었다. 1967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영국은 이를 테러로 규정하며 진압했다. 1986년에서 1996년 사이 홍콩의 지니계수는 급증하며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맞물리며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불만은 중국을 향하곤 했다. 중국인은 홍콩에 돈 벌러 오는 '가난한 동포'에서 점차 홍콩의 부를 빼앗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게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중국은 홍콩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했다. 홍콩을 시장 개방의 부작용을 줄일 적응지대로 삼는 대신 중국의 관문으로서 독점적 위치를 보장하는 정책으로 홍콩의 재계 엘리트에게 기득권 유지를 약속했을 뿐이다. 홍콩의 특수한 지위로부터 미국 역시 경제적 이득을 취해 왔음은 물론이다.
2016년 홍콩의 지니계수는 0.539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 본토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홍콩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전체 상품 수출액의 57.2%를 차지하고, 2018년 11월까지 홍콩 방문 관광객 수 1위는 중국인으로 78.4%를 차지한다. 2001년 본토에서 홍콩으로 원정 출산이 시작되자 복지 자원까지 빼앗아간다는 불만과 중국인들이 와서 홍콩 물가를 올려놨다는 불만이 쌓여갔다. 사회 변화에 대한 도전이 '친중파'가 장악한 홍콩 정부와 의회에 의해 번번이 제한당해 온 상황에서 시민의 대표를 직접 뽑겠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시위의 한가운데 자리하게 됐다.
존엄을 되찾으려는, 동시대의 목소리들
홍콩 시민들의 자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선거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민의 존엄을 지키고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인민 자신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겠다는 열망이다. 홍콩 시위에 참여하는 대다수가 20~30대 청년들이라는 점 역시 더욱 눈여겨봐야 한다. 일자리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대학 졸업도 더 이상 안정된 삶을 약속하지 않는 시대는 한국에도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삶의 위기를 맨몸으로 맞부닥뜨려야 하는 청년 세대의 저항은 세계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는 시위와 닿아 있다.
홍콩 반환에 관한 1984년의 중영공동성명은 "지역 내 선거 결과에 근거해" 행정장관을 임명하도록 했고, 1997년 반환과 함께 시행된 홍콩기본법은 "실제 상황과 순서점진의 원칙에 근거하여"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 규정을 들며 충분한 자치를 보장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홍콩 시민의 자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일국'이 우선이라는 입장만 반복하는 중국 정부야말로 일국양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홍콩 중문대학교가 수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홍콩에서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1997년 32.1%에서 2014년 8.8%로 더욱 줄어들었다. 불안정한 삶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홍콩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중국과 홍콩의 상층 계급이 부를 전유한 결과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내지인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며 개화되지 않았다'는 인종화된 반중 정서로도 표출된다. 홍콩인에 대한 백색테러나 중국인의 적대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봉쇄된 채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서로를 타자화하는 인종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그 책임은 무엇보다도 홍콩과 중국 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
홍콩 시위는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 말은 한국에도 고스란히 새겨져야 한다. 불평등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요구는 어떻게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가. 탈분단을 사유할 때 '하나의 민족'에 기댄 '일국양제'의 현재는 어떤 참조점을 주는가. 주체화의 새로운 양식을 상상하지 못하고 홍콩인이거나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에 머물 때 우리는 어떤 정치공동체에 이르게 되는가. 홍콩 시민이 살아내는 현재는 한국의 미래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권은 언제나 국경을 넘나들었으나 그것은 정부가 협력하거나 제도를 참조한 결과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시민의 저항을 통해 형성되는 감각을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배워온 덕분이다. 홍콩을 넘어 더 많은 저항에 우리를 연결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얻을 것이다. 유서를 쓰며 저항을 이어가는 홍콩의 시민들은 80년 광주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내일이 홍콩 시민의 저항에 기대고 있음을 기억할 때 연대가 시작되고 우리의 오늘로 홍콩의 내일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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