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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노조를 만들고자 했을 뿐인데...

[삼성공화국, 어디로 가나] 꽃들에게 희망을

얼마 전 이 지면에서 황규관 시인은 25미터 고공에 올라간 김용희 씨가 그레고르 잠자, 갑충으로 변한 노동자 같다고 했다. 변신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온몸으로 고발한 거대한 벌레. 그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김용희 씨가 나비라고 생각했다. 뇌리를 스쳐간 <꽃들에게 희망을>의 노랑나비.

<꽃들에게 희망을>. 이 우화는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는 이야기다. 여기 한 마리 줄무늬애벌레가 있다. 그는 어느 날 들판에 하늘을 향해 끝 모르게 벋어 올라간 기둥을 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기둥은 꿈틀거리는 애벌레들로 이루어진 탑이었다. 줄무늬애벌레의 마음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불이 반짝 켜진다. 그는 올라간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한 노랑애벌레의 머리를 밟고 오르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 애벌레의 슬픈 눈을 본다.

우화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가혹한 출세지상주의 경쟁사회의 본질적 모습을 애벌레들이 서로의 몸뚱이를 밟으며 이루고 있는 기둥에 비유한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몰두하던 줄무늬애벌레가 다른 애벌레, 노랑무늬의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 약육강식의 전쟁터이던 애벌레기둥은 생각하는 존재의 질문이 터져나오는 장소가 된다. 왜 올라가야 할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두 마리 애벌레는 대열을 이탈하여 풀숲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같지만…

모든 고난과 해방의 서사가 그러하듯, 두 마리 애벌레 중 한 마리는 결국 “저 위에 뭐가 있을까?” 라는 궁금증, 다른 말로 상승의 욕망에 지고 만다. 줄무늬애벌레는 다시 애벌레들이 뒤엉켜 꿈틀대는 기둥으로 기어오르고, 남은 노랑벌레는 어찌해야 할까.

노랑벌레는 슬픔에 잠겨 있다가 뜻밖에도 고치가 된 다른 애벌레를 만난다.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다른 가능성을 만난다. 간절한 소망과 견딤과 기다림이 너를 나비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하는 고치애벌레의 말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노랑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되고..

한편 기둥을 타고 올라간 줄무늬애벌레는 거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러나 꼭대기로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애벌레들을 희생시켜야 하고, 심지어 그렇게 올라간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으며, 세상에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기둥과 똑 같은 애벌레기둥들만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진정으로 꼭대기를 보려면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 즉 날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 변신한 노랑애벌레를 줄무늬애벌레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눈빛만은 줄무늬애벌레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우화의 결말이 그러하듯 줄무늬애벌레는 크나큰 용기로 기둥을 내려와 고치를 만들고 들어간다. 그리고 나비가 된다.

▲ 김용희 씨 고공농성장. ⓒ프레시안(최형락)

이 아름답고 행복한 우화처럼, 나는 김용희 씨를 나비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용희는 나비가 아니라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치이다. 과연 그는 강남역 네거리에 기다림과 견딤이라는 고치집을 짓고 날아오를 날을 기다린다. 다른 많은 애벌레들인 우리가 용기를 지니고 애벌레들이 만든 기둥에서 빠져나오면 나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다.

패배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겪는 고난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여전히 희망을 준다. 함께 날아오를 다른 나비들이 있기에 희망은 희망에 머물지 않고 실현될 것이다. 이 유명한 우화 <꽃들에게 희망을>이 보여준 진짜 희망은 나비가 계속 태어난다는 것이다. 강남역 네거리에 매일 저녁 조촐한 촛불을 켜들고 기타 한 자루 들고 모여드는 장차의 나비들. 김용희 씨의 용기에 감염된 우리들.

꽃들에게 희망을.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나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삼성일가와 그 하수인들을 높은 데로만 오르려고 기둥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하는 꿈틀벌레들이고 무노조정책에 저항하다 갖은 고초를 겪은 노동자들을 나비가 되는 애벌레로 상상한다.

어쩌면 나의 상상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모두가 나비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비는 배도 고프고 나비는 오래 견뎌야 하며 나비는 자유 말고는 가진 게 없다. 꿈틀애벌레는 고치를 다 짓기도 전에 말라죽을 수도 있고 고치 속에서 잠들어 못 깨어날 수도 있다. 계속 오르기만 하면 높은 곳이 기다린다는 환상이 좀더 현실감 있게 생각되기도 한다. 출세지상주의 현실, 가혹한 경쟁의 현실, 약육강식의 현실, 하여간 현실은,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밟고 무작정 오르기만 하는 기둥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둥에는 유혹이 있고 평안이 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삼성이 세운 이 기둥에는 무노조경영이라는, 이름은 단순하지만 노동자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반인권적 억압이라는 꿀이 발라져 있다. 아니 접착제다. 저 꼭대기로 가면 이 질곡을 벗어날 수 있을까.


너무 환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25미터 상공에 고치집을 지은 김용희 씨가 바라는 것은 모든 노동자의 해방이라든가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의 척결 같은 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것이다. 단지 노조를 만들고자 했을 뿐인데 왜 그랬어요?

국민들은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분개도 한다. 기업의 불법적 경영을 통해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치권에 뇌물을 제공하여 공직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권력승계를 위해 못할 짓이 없다. 최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이재용 재판도 핵심은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과 뇌물 제공, 그 뇌물에 사용된 회사자금에 대한 횡령이 핵심이다. 이병철은 5,16 군사정변 이후 부정축재자1호로 지목되었지만 일본에 있어 구속을 면하고, 곧 정경유착의 통로가 된 전경련(처음에는 한국경제인연합회)을 만들어 법망을 피했다. 삼성X-파일사건으로 8천억 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던 이건희. 비자금 사건으로 차명재산을 사회환원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모두 돈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경영권 방어와 권력유지에 사용해온 삼성이 한사코 노조설립을 방해한 진짜 이유가 도대체 무얼까. 노조결성을 방해하고자 삼성이 지속적으로 저지른 악행은, 어느 현장에서나 몹시 비슷하다. 그 집약적 모습이 바로 김용희 씨와 이재용 씨(삼성 부회장 이재용과 동명이인의 삼성중공업해고노동자이며 강남역 고공농성 공동투쟁자)에게 가한 일들이다. 협박, 납치, 회유, 폭력, 모함. 누명씌우기,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매수한 공권력을 통한 폭력.

나는 가끔 참 궁금하다. 무노조경영이 뭐길래 삼성총수일가는, 그리고 그 하수인들은 그토록 악행을 저질러왔을까.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자기가 경영하는 회사에 노동조합은 없다는 고집-자기들은 원칙이라고 하지만-을 부린 이래, 3세인 이재용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삼성의 공작은 계속되고 있다. 그 무수한 부당노동행위는 들판 곳곳에 솟아오른 애벌레기둥들처럼 노동자들을 묶어놓았다. 이병철 일가는 왜 노조를 그렇게 질색을 할까.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 보면 코미디영화 한 장면 같은 풍경이 등장한다. 이건희의 생일잔치 풍경이다. 2003년 1월 9일 저녁 6시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유명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고 유명 예술가와 연예인들이 등장하여 공연을 한다. 이때 상차림이 걸작이다. 소위 상석에는 이건희 가족들이 앉고 그 주변으로 고관대작들과 회사 임직원들 기타 하객들이 앉았는데, 무려 푸아그라가 와인안주로 대령된다. 그런데, 이건희 가족의 테이블에는 프랑스에서 공수된 냉장 푸아그라가 등장하고 다른 테이블에는 냉동 푸아그라가 제공되었단다.

차별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건희 가족의 테이블에는 병당 천만 원짜리 페트뤼스 와인이, 다른 테이블에는 훨씬 값싼 와인이 나오더라는 것이다.(<삼성을 생각한다> 227쪽 참조). 이들 일가는 자신들이 ‘다른 신분’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이런 차별을 손님을 청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 머릿속에, 노동자들과 대등하게 협상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노동조합의 존재란 역모를 당하는 느낌 아니었을까? 단순하게 말해서 노동자는 노비고 마름인데 조합을 만들어서 "감히" 주인의 경영에 감놔라 배놔라 하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원칙이라고 불러주면 안 된다. 그것은 원칙도 변칙도 아닌 오만방자일 따름이라서.

창업주의 가짜 원칙 오만방자를 지켜나가고자 삼성 그룹이 저지른 무리수는 장난이 아니다. 1938년 삼성상회 시절부터 따지지 않고 극히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삼성전자서비스, 김용희 씨가 첫 번째 노조협의회 회장이 되었던 삼성항공의 후신인 삼성테크윈, 그룹차원의 삼성노동조합, 삼성웰스토리지회 등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드디어 구속수감되기까지 한 이재용의 죄상 어디에도 그 잔인한 부당노동행위들은 없다.

이재용이 재수감되어 실형을 살 가능성이 높아지자 삼성에서 탄원서를 내었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에 총수를 정점으로 한 리더십을 지켜달라는 요지다.

삼성을 지키는 것이 어째서 이재용인가. 소비자인 국민들, 백혈병 걸려가며 반도체를 생산한 노동자들, 전세계를 누비며 삼성을 판매한 노동자들. 심지어 노조파괴가 진짜로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은 구사대들까지도, 이재용보다 덜 공헌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노동조합이 건강하게 활동하는 회사는 위기가 닥쳤을 때도 탄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총수 하나의 왕국처럼 경영되는 회사는, 총수가 구속되는 일을 왕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나보다. 비록 티비드라마지만, 청일전자라는 조그만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삼성은 상상하지 못하나보다.

삼성의 3세 이재용 씨에게 말한다. 당신은 선대에 비해 좀더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성장했지 않나. 보다 글로벌한 기업윤리기준을 잘 알지 않나. 무노조경영이라는 그 우스운 원칙은 실제로는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지난 시절의 악행들까지 다 무효가 된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사과하고, 김용희 씨와 이재용 씨, 두 해고노동자를 복직시켜 단 하루라도 근무하게 하라. 나비의 날개를 활짝 펼 때까지, 김용희 씨와 우리 꿈틀벌레들은 기다리고 지켜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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